오랜 기간 베트남에게 중국은줄곧 가장 두렵고 극도로 증오하는 이웃이었다. 그리고 중국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는 정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이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 P27

태국 국경 주변을 떠돌던 크메르루주군은 그곳에다가 길을 따라지뢰를 무수하게 뿌려놓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땅속에서 터지기를기다리는 천만 개의 지뢰다. 그렇다면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관계는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이에는 국경선의 천만 지뢰들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국민들 간의 원망과 증오가 묻혔다.
- P61

린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더 큰 세상으로나가서 성장하길 바라. 캄보디아로 돌아오지 말고 말이야." 매일 같이육체노동으로 달러를 벌면서 다양한 피부와 언어를 가진 외국인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도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단다. 타이완으로 해외여행도 가고 말이다. 그런데 해외는커녕 프놈펜도아직 못 가봤고, 그저 이 세상이 얼마나 광활하고 그곳 생활들은 얼마나 좋을지 상상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린은 비록 자신은 평생 씨엠립을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아이들만큼은 이 나라의 국경을 넘어 자신과는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길 비라면서 오늘의 고단함을 버티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고, 육체노동으로 먹고사는 이들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힘을 지닌 사람으로 커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 P65

산업 기반이 취약한 라오스는 대부분의 민생물자를 태국으로부터수입해온다. 게다가 라오스인들은 쉬면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선택할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 태국 것으로 한정된다. 라오스 정부가 미디어를 엄격히 통제하면서 채널을 하나만 공개하고, 그나마 따분한 국내뉴스만 내보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라오스인들은 태국에대해 두려움과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힘과 투자에 의해 경제가 좌지우지되면서 더욱 태국에 의존하게 된다.
- P73

14세기 남칸강 부근에 도달한 라오족은 남칸강과 메콩강이 합류하는 루앙프라방에 란쌍 왕조(란쌍은 백만 마리 코끼리와 하얀 파라솔이라는 뜻이다)를 세운다. 그전까지 해당 영토에 분포하고 있던 작은 공국은 진랍(캄보디아)과 앙코르 왕조의 지배를 받았는데, 란쌍 왕조가 세워지면서 비로소 라오스의 초기 틀이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윤곽만 그린 것일 뿐이었다. 라오스는 이웃 국가인 미얀마와 태국의 침략과 공격을 받아오며 오랫동안 사방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근대 제국주의 시절에 이르러선 프랑스가 태국에게 메콩강 동쪽 땅을 양도하도록 압박함에 따라 식민지배를받으며 양귀비를 재배하는 제국의 뒤뜰이 된다.
- P78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은 동남아시아의 적화를 막기 위해 인도차이나반도에 대거 주둔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파테트라오의 집권을 막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북베트남이 라오스 영토 내의 ‘호찌민 트레일‘을 경유해 부대와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60만 차례나 항공기를 동원해 200만 톤이 넘는 폭탄을 라오스에 투하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퍼부어진 것이나 한국전쟁 때 쓰인 폭탄보다도 많은 양이다. - P83

기어츠의 말에 따르면 수학공식처럼 정리된 지도는 민족주의를 불러왔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국가 단위로 선명하게 구분된 지도를 통해 종족의 역사, 문화부터 자기 정체성까지 모두 국가와 관련지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민족주의 자체가 결코 잘못된 사상은 아니었다. 다만 완전히 다른 특성들까지도 하나로 아울러 저마다 품고 있던 고유한 정서들을 모호하게 뭉뚱그리는 식으로 잘못 쓰일수는 있었다. - P93

그 땅에 도달한 이들은 순서와 무관하게 전부 토착성을 가진 토착인 (인도네시아어로 아슬리asi) 으로 간주되었고 동시에 ‘원주민 (인도네시아어로 프리부/pribum, 이 땅의 자손‘이라는 뜻이다)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화교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이주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외국인 인도네시아어로 아싱asing)‘ 취급을 받는다.
그와 같은 화교와 원주민 간의 지우지 못할 경계선은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대에 그어진 이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당시 식민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인종 분리 정책을 실시했다. 종족 전체를 상류층에 속하는 유럽인, 중류층에 위치하는 동양계 외국인, 그리고 하류층의 토착인으로 나눈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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