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만나뵈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연세는 더 많으신데 외모는 더 젊어보이셨습니다(아마 젊은 사람들하고 자주 어울리신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그 날 식사 자리에는 제가 아는 다른 선배분하고 또 다른 젊은 철학도가 한분 더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두 분 다 참석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57학번이시니까 우리 나이로 하면 67세이신데, 철학과를 졸업했고 조선일보 정치부에 근무하다가 75년에 해직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뒤 다시 언론계로 복직하지 않고 거의 30여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으로 지내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한겨레 신문] 창간될 때 복직하지 않으셨냐고 여쭤보니까, 빙그레 웃으시면서 두려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느낀 두려움은, 간단히 말하자면, 기자로서,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것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언론 통제가 극심하게 이루어지던 당시에 기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순응하면서,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렵고 교묘한 언어들로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맞서 저항하는 길, 신문사를 그만 두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이 이 마지막 길을 실행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 때문에, [한겨레 신문]으로부터 끈질긴 동참 요청을 받았지만 결국 입사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 날 대화의 초점 중 하나가 이 세번째 길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길과 관련하여 세 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중국의 백화문의 사례이고, 둘째는 리영희 선생(선생님은 당시의 언론인들 중에서는 리영희 선생만이 유일하게 이 세번째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지젝, [Self-Interview](The Metastases of Enjoyment)에서 지젝이 말한 "말의 윤리"라는 사례였습니다(선생님은 올해 나온 지젝의 Organes without Bodies를 벌써 구해 읽으셨을 만큼, 지젝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이 세 가지 사례들 모두는 지식인들이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의 빼어난 사례들이라는 것이지요.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들이 원하는 진실한 내용을 전달하되, 그 때문에 전해야 할 내용의 함량이 줄어들거나 또 하나의 권력이나 관행으로 고착되지 않게 하기. 선생님은 [한겨레 신문]이 이런 일을 해줄 수 있을지, 또 당신이 새로 신문기자가 되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래서 결국 [한겨레 신문]에 입사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 [한겨레 신문]이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겨레 신문]은 결국 “문민 정부”의 한계, “50년만의 정권 교체”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선생님의 예견을 입증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결국 그 선택(들)로 인해 해직 이후부터 따지면 30여년 가까운 세월을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하신 셈인데, 당신께서는 “돈 별로 안들이고 시간 잘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그 세월의 고독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러한 “선택”은 당신의 헤겔 해석과도 맞물려 있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헤겔 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헤겔 저작만이 아니라 헤겔 연구서들까지 폭넓게 섭렵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헤겔의 문제, 헤겔이 청년기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심했던 문제를 “어떻게 하면 법의 실정성을 극복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집약하셨습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법은, 법의 실정성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이지만, 또 그 법이 단지 법으로, 실정적인 법으로만 남아 있게 되면, 그 법을 처음 정립했던 힘, 원칙은 퇴락하고 전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상적인 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따른다면, “어떻게 법을 흐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헤겔에게는 근본적인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헤겔의 이런 문제의식은 단지 헤겔의 문제의식일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 근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알튀세르에 관해, 문화혁명에 관해, 노무현 대통령에 관해 하시는 이런저런 말씀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독일의 저명한 헤겔 연구가인 디이터 헨리히(Dieter Henrich, 1927-)가 발굴해낸 “반성의 논리Logik der Reflexion”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시는 게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이 문제를 한번 연구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셨는데, 사실 전부터 얼마간 막연하게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였던 터라, 선생님의 권유를 받자 매우 반가웠습니다. 

* 병아리 모이만큼 찔끔찔끔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만(-_-;;;;), 아무래도 오늘도 여기에서 글을 줄여야 할 듯합니다.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영 쉽지 않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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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페이퍼] 쓰기가 뜸했는데, 당분간 다른 일 때문에 [리뷰]나 [페이퍼]를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 틈새를 메우는 의미에서 지난 주에 만나뵌 독자분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한달 전쯤 어느 독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60대 정도인 이 독자분은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얻었다고 하시면서, 성함을 밝히신 뒤 먼저 좋은 책([헤겔 또는 스피노자])을 번역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독자 중에 60이 넘은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랬고, 처음 들어보는 성함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철학계에 몸담고 계시는 분 중에 그 연세에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만한 분이라면,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그 분의 성함은 제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제 당혹감을 눈치채셨는지, 곧이어 당신께서는 아마추어 독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번역에 관해 몇 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또 놀랄 만한 일인데, 그 분이 지적해 주신 것은 헤겔 인용문 중 독일어 원문의 쪽수가 두 어군데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이었고, 제가 독일어 원문 쪽수를 표시하면서 몇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해놓은 게 유감스럽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헤겔 저작의 독일어본 쪽수 표시 중에서 몇 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일인데, 이렇게 표기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곧 제가 책머리의 [일러두기]에 표시해둔 것처럼, 마슈레가 사용한 헤겔 저작의 불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과, 제가 갖고 있는 헤겔 저작집(Suhrkamp 출판사에서 펴낸 20권짜리 저작집), 그리고 임석진 교수의 국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 전집(Felix Meiner)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전집의 경우 이전의 헤겔 저작 편집본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들이 재편집되고 상당히 첨삭되어 있어서, 인용문의 쪽수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교정 작업은 지난 해 1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1월 초로 예정된 출판사의 인쇄 날짜에 맞춰 책을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상당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갖고 있는 주어캄프 판본 위주로 독일어 원문의 쪽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주어캄프 본에 빠져 있는 독일어 원문은 일단 <독어본 누락>이라고 표시해놓은 뒤, 나중에 재판을 내면 다른 판본에서 원문을 찾아 빠진 쪽수를 채워 넣자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에 쫒기던 그 때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도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까 이 문제가 줄곧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분께 이 문제를 지적당하고 보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원문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책을 읽으신 것을 볼 때,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분이 (헤겔) 철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애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문제점을 더 지적당하지나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으니, 책을 다 읽은 뒤에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망신은 그래도 면했구나 안도하면서, 식사 초대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는데, 그 뒤 3주 정도 지난 뒤에(그러니까 지지난 주) 이 독자분께서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책을 잘 읽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피에르 마슈레의 철학적 능력을 칭찬하고 번역의 노고도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번역과 관련하여 두 어 군데 미심쩍은 점을 물어보시고, 지난 번에 약속했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공짜로 저녁을 얻어먹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고,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시간과 약속 장소를 정하고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만나뵙고 식사를 했습니다.

* 이것도 글이라고 쓰기 힘들어서(-_-;;) 2부는 내일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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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5-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 still have such a reader!..

balmas 2004-05-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번역료로 지금까지 받은 돈이 대략 150만원 가량 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많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이 책을 번역해서 이런 독자분을 만날 수 있었으니 돈 몇푼으로 따지기 힘든 보답을 받은 셈입니다.
나이 어린 독자들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 욕심이 과한가요?^^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번역을 마다 않는 건 결국 이런 독자들(과의 소통)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월 2004-05-2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이가 어릴테니(?) 과한 욕심이 채워지는 셈입니다. ^^;

balmas 2004-05-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렇게 영계(^^)란 말입니까? 제가 말한 나이 어린 독자는 20대 초반의 독자를 가리키는데 ... ^^ 그나저나 3편은 언제 올리나? -_-;;;
 

관련 글: 로쟈,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까,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한 대학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데리다의 [불량배들] 번역에 관한 서평을 읽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면서, 국내 철학서들의 오역 문제에 관해 이런저런 걸 묻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말해서 역자와 출판사의 명예에 피해를 입힌 것 같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런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할 경우 독자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해봤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도 역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출판사도 이 책을 개역할 생각을 하지 않는 마당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문제를 처리했을 경우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겠느냐고요. 그리고 오역으로 점철된 책을 비싼 돈주고 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지적 능력만 한탄할 독자들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주느냐고요.
그 기자는 정말 그렇겠다고 수긍을 했지만, 정말 문제를 제대로 인식해서 수긍을 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고, 또 그 기자에게 그런 식의 "점잖은 해결 방안"을 제안했던 사람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 어떤 역자나 출판사가 그런 식으로 책을 출판했을 경우, 그 역자나 출판사가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것과, 번역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역에 대한, 독자들에 대한 역자나 출판사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다른 연구자들이나 신문, 잡지들이나 모두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를, 굳이 애써서 파헤치고 밝혀내어, 아까운 시간과 정력 소비하고 덤으로 모진 놈 소리까지 듣는, 로쟈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peeker님의 고언은 그런 우스꽝스러워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러쿵저러쿵 덕담이나 해가면서 점잖게 살 수 없는 팔자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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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03(월) 21:12

 

시민의 사법참여 어떻게


△ 한인섭·서울대 법대 부학장, 봉욱·대검찰청 검찰연구관(왼쪽부터)

배심제·참심제 도입 논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시민의 사법참여’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사법개혁위원회는 사법개혁이라는 큰 틀 아래 시민의 사법참여의 구체적인 안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는 참·배심제 도입을 두고 뜨거운 논쟁 중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부학장과 봉욱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 지난달 27일 서울대에서 만나 시민의 사법참여와 참·배심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인섭 교수는 “‘국민을 위한 사법’을 위해서는 ‘국민에 의한 사법’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며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적극적인 사법참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봉욱 검사는 “검찰도 폐쇄적·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노력이 검찰에서도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인섭=시민의 사법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책을 보면 자신이 배심·참심제 도입을 주장해왔지만 ‘황야의 외침’이고 ‘사막의 절규’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상황이었죠. 2000년까지 학술논문을 보면 그냥 외국의 제도만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2001년부터는 학계와 실무 쪽에서도 논문이 급속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아 행정부를 만들고 국회의원을 뽑지만,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해서 사법부가 정당성을 갖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한걸음 물러난 정당성이죠. 법관을 뽑는데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가 보장돼야 하고, 재판 내용에서도 시민적 관점과 변화하는 가치관이 적시에 투입돼야 하는데 우리나라 법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관생활만 하고 상당히 법조, 법원의 폐쇄성에 갇혀서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시민의 정의와 법원의 정의는 시차가 있는 듯 한 거죠. 이로 인한 불만은 국민들의 사법불신으로 쌓이게 됩니다. 변화하는 가치관이 사법 결정과정에서 바로바로 투입되고, 직업 법관과 일반시민의 교류를 통한 질높은 판단, 그래서 쉽게 수용될 수 있는 판단이 행해질 때가 됐습니다.

봉욱=사법부도 그렇지만 검찰도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고, 운용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국민이 요구하는 공무원 수준과 참여요구 등을 우리도 상당히 깊이있게 느끼고 있습니다. 검찰만 해도 최근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국민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국민의 눈 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표는 안됐지만,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고심사회 제도라고 해서 항고심사를 할 때 외부인사들, 교수, 변호사 등이 참여해서 같이 결정하도록 하는 획기적 제도를 시범 제도로 하고 있고, 시민 옴부즈만 제도도 시범 운영하고 있습니다. 큰 드라이브인 특별수사 등의 경우 예전에 검사들끼리 결정했다면 요즘은 특별수사 모니터링 제도라해서 일반 시민 등을 위촉해서 실제 의견을 종합해 절차화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검찰도 개방적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시민 참여를 바라보려는 입장들이 있습니다.

한=현재의 형사재판 수사의 구조로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제대로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제도적 문제부터 건드려야 합니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하다고 보고 있지만, 저는 검사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 변호사의 참여가 보장이 안되죠. 99년에 경찰이 변호인 참여를 보장한다고 문을 먼저 열었고, 법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열었죠. 하지만 실적을 보면 몇백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봉/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
영미법·대륙법 계통의 차이에서 발생

봉=변호사가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여건이기 때문에 그렇죠.

한=미국은 변호사가 수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엔 현재 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실질적인 조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없죠. 미국 판사는 이를 두고 변호인 참여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봉=영미식과 대륙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형사재판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불만은 피의자 단계에서부터 검사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증거에 있어서도 피의자 심문조서의 영향력이 80~90% 되는 것 아닙니까. 형사재판에서 실제로 판사들이 편견없이 임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검사가 수사해왔던 것을 대체로 존중하는 경우가 많죠. 무죄 판결의 비율이 낮은 통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 미국은 그걸로 끝인데, 한국은 검찰이 거의 반사적으로 항소를 하고 있습니다.

봉=항소율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한=피의자와 피고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구조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봉=무죄율에 대해서는 말이죠, 미국의 학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독일은 어떻게 그렇게 무죄율이 낮을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무죄율은 0.73% 입니다. 미국은 10~20% 정도 되죠. 대륙법 체제는 재판에 넘기기 전에 진실 여부를 한번 가리고, 유죄가 틀림없다 하는 부분만 재판하도록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사건이 100%라면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하는 비율이 43.6% 거든요. 영미법 체계에서는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재판정에서 이 문제를 가리자는 쪽입니다. 그래서 무죄율이 더 높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점을 비판하죠. 무죄 나올 사안은 아예 재판정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 제대로 수사를 안해서 변호사 비용 등의 부담까지도 국민한테 지우는 것은 형사사법의 실패 아니냐는 비판이 크거든요. 사법개혁위원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입장에서 사법제도를 고칠 부분은 첫번째가 폐쇄적인 재판제도, 둘째가 비싼 변호사 수임료, 세번째가 부실한 사법서비스이고 다음이 전관예우 등 법조비리 등 입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실제 국민이 불안한 것은 재판이 폐쇄적이고 나의 재판결과가 어떻게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것이 거든요. 기준의 불명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실무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가 구속될지, 구속되면 석방될지 안될지, 재판 과정에서는 실형이 선고 될지 감옥에 가게 될지 어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변호사를 사서 유무죄를 다투지만, 우리는 오히려, 실제 전관예우는 대개 선처를 요구할 때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의 사법참여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할 부분은, 이런 기준을 정하는데 국민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피고인들이 수사단계에서 자기 자신의 진술로서 만들어진 증거와 또 재판과정에서 각각의 증거를 효율적으로 판별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변호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데 형사사법에서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요, 폐쇄적 재판도 법관과 검사가 많은 역할을 하게 됨으로 그렇게 된 것이죠. 재판 결과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높은 상고율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의 근원적 치료 방법이 시민의 사법참여라고 생각합니다.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하면 폐쇄적 재판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재판관인 배심인, 참심인으로 인해 검사와 변호인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법조인들끼리의 암묵적 존중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거죠.

봉 검사는 배심이 도입될 경우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비용과 시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제도 적용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한국식 배심제를 도입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봉=배심이 도입되더라도 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연간 1천여건에서 많이 잡아 3천여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폐쇄성이 극복되는데, 나머지 230만건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교수들은 배심재판에 소요되는 인력과 비용이 커서 나머지 사건에서는 오히려 더 상황이 열악해진다고 비판합니다. 배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간이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사법시스템이 운영되지 않거든요. 1%의 배심사건은 그나마 폐쇄성을 극복하게 되겠지만 나머지 99%는 어떻게 될까요 일반국민들의 사건은 사각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한=미국도 2~3%의 사건만 배심으로 이뤄집니다. 그 2~3%의 사건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진실규명의 필요성이 아주 큰 사건이며, 결과의 신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배심에 회부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비배심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배심은 민·형사 사건에서 시민의 일부가 시민재판관으로 뽑혀, 사실판단과 유·무죄에 필요한 사실판단을 하는 것인데요. 단순사실 판단과 유죄냐 무죄냐의 최종판단을 배심원이 한다는 것이죠.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 등을 청취하고 직업재판관인 재판장의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설시와 지도를 받으면서 하게 됩니다. 유죄가 되면 양형은 직업법관에 다시 맡기고요. 배심제는 영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꽃피우고 세계 50개국 내외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참심제는 독일이 대표적이죠.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을 모두 시민재판원이 직업재판관과 함께 합니다. 양형판단과 손해배상 액수 결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재판원이 직업법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봉/미국식 배심제가 성공하려면
관련 제도들 함께 도입돼야
한/몽땅 고쳐야 한다고 생각 안해
밈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

봉=영미식 배심제와 독일식 참심제 외에도 조금씩 변형들이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미국식 배심을 도입하면 수사·재판과 관련된 여러 다른 제도도 함께 다 들여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수사단계보다 재판단계에서 모든 것이 가려지거든요. 문제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실을 가린다는 게 어렵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에서의 위증이나 수사기관에서의 거짓진술도 사법방해죄로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개 장소인 재판정에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주요 재판이나 청문회에 증인 등이 나오지 않아 공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배심제를 하려면 법정에서 변호사의 역할도 실제 재판을 이끄는 당사자로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국가변호사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증인보호제도와 내부고발제도 뿐 아니라 법관 선발방식도 포괄해서 들여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게 됩니다. 일괄해서 도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독일식은 아니더라도, 미국식과 독일식을 절충해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국식 배심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현재 우리 제도 중에서 익숙한 부분을 몽땅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중심리 등 구두변론을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도입해야겠죠. 변호인 조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배심제를 안 해도 해야할 것입니다. 미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요. 두 가지의 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한국형 배심제인데요. 직업법관이 재판공판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고요, 배심원 숫자를 9명으로 하고 12명까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명 전원일치 평결로 하고, 정 합의가 안될 때는 8대1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일본이 최근 도입키로 한 재판원제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과반수로 평결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결정은 과반수로 할 수 있지만 사법적 결정은 거의 절대적 진실 추구에 가까우므로 개개인의 특수한 체험은 9명 중 한두명 밖에 안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배심의 최대 장점은 치열한 평의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최대치가 드러나게 되고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참심제가 도입될 경우 전문법관 2명과 시민재판원 7명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보다는 한국형 배심이 더 낫다고 봅니다.

봉/일본이 1928년 배심제 도입했는데
15년뒤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편입
장점 발휘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봉=배심제든 참심제든 장점은 도입해야 하나 단점은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수들의 주장은 주로 재판이 쇼처럼 진행된다는 것이고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을 맡았던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는 “가장 훌륭한 변호사는 모든 적법수단을 이용해 총체적 진실을 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용과 시간도 문제입니다. 제가 미국 연수를 갔을 때 실제로 배심재판에 관여했는데 한 사건에 보통 2주가 걸리고 한달에 2건, 많아야 3건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재판부에서 사건 처리 건수가 월 90건 정도이고, 2심은 12건 정도거든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론적으로 진실이 밝혀지느냐에서 효용은 낮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배심원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은 사건이 전문화돼, 중요 경제부패사건의 경우 직업법관도 실체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피고인의 권익 부분은 존중하나 피해자 인권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도 배심제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으나, 80년대 이후 피해자 인권옹호 운동을 계기로 문제의식이 커져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배심제를 그대로 도입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식 참심제로 갔을 때는, 절충형으로 2+7 혹은 3+9 방식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주로 관심가지는 것은 유무죄가 가려진 이후에 양형부분이고 변호사 선임이유도 유무죄 주장보다는 유리한 양형을 받으려는 것인데 미국식 배심에서는 양형의 투명성이 제고되지 않아 문제가 있습니다. 배심재판이 이뤄지려면 1~2주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죠. 재판 이전에 진실을 가리는 절차가 짧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는 배심재판에서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항소가 불가능한 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또한 초기 수사단계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기능이 약화돼, 미국처럼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 국민의 소박한 법감정으로는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서면 안되거든요. 배심재판이 배심원 구성 등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1928년에 일본이 배심제를 도입해 15년간 운영했는데, 첫해에는 143건이 있었지만, 점점 줄어 10년 뒤에는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일본의 배심제가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 수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은 전시체제로 국민인권이 억압되던 때죠. 배심제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정치상황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과 돈있는 사람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 비용과 시간의 문제 등이 중요한 논점인 듯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배심원을 상대로 쇼처럼 하는데 배심이 각계각층에서 나올 수 있다면 변호사가 쇼할 때 진실을 감추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등 저항감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쇼에 현혹된다기보다 증거에 의해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법관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의 경우,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전원일치의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변호인 쪽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검사 쪽이 극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또 많은 수의 유능한 변호인들을 선임해서 진실에 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들 말하는데, 진실은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퍼즐을 모아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변호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검사의 전제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다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변호사가 최대로 투입된 사건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면, 변호사 없는 피고인은 얼마나 불리한 판결이 나오겠습니까.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배심제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간, 비용과 관련해서도 국민이 배심원이 되는 경우는 평생 1~2번에 불과할 것입니다. 재판관이 되는 체험을 선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많고 군 복무 등의 체험을 통한 국가 의무에도 익숙해 삶의 보람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많죠.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1~2주 사이에 끝날 것이고 1년씩 가는 일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한 교수는 일본의 배심제가 실패한 것은 정치적 상황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 검사는 배심원 구성 등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 폐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 배심제를 주장하는 한 교수와 참심과 배심의 절충형이 옳다는 봉 검사는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했다.

봉=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있기 때문에 배심제 도입여부를 떠나 일반사건의 양형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원으로 뽑히면 우리 국방의 의무처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 다루는 사건이 살인 사건 등 강력 사건이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여론조사에서는 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조직폭력 사건이 있어 피고인 앞에 있는 상황에서라면 그 부담이라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절충형 참심은 법관과 부담을 나누지만 배심제는 100% 배심원들이 부담을 다 안게 돼있습니다. 신변 안전의 부담, 실제 생업의 부담까지 고려한다면 절충형으로 가는 게 적합할 듯 합니다.

한=판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도 배심원들이 누가 봐도 무죄인데 유죄로 결정할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알쏭달쏭한 경우 판사만 판단하면 되느냐의 문제인데, 판사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복잡다단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 시민들의 지식·경험·상식을 보충받아야 됩니다. 얼마전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검사가 사전에 억압적인 분위기를 동원해 자백을 받아내고 심문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소파에 따라 미국식으로 해야 됐었죠.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법정에 미군 병사를 내놓으면 피고인에게 훨씬 불리한 쪽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미국인 기준에서는 한국 재판이 반쯤은 유죄추정상태에서 되는 것 아니냐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원칙을 정하고 있음에도 실제 운영은 피고인에게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면 참심형으로는 어렵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봉/재판이 쇼처럼 진행되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한/현재도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 있어

봉=미국의 제도가 미국의 문화와 미국민의 법감정, 국민의식에 맞는 제도라면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도입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배심이 미국의 법감정에 맞지만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다고 할 때 바꾸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영미는 절차적 정의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대신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사필귀정의 뿌리 깊은 법감정도 존중하면서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한=피해자의 분노와 고통을 해결하려면 일단 검사가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입증해야죠. 피해자를 재판에 참여하게 한다거나 재산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소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흉악범이나 조직폭력 사건에 관여하는 부담은 판사나 검사도 큽니다. 알 카포네의 재판을 둘러싼 온갖 영화가 있는데요, 직업 법관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매수됐지만 배심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았거든요. 배심원 선정때 검사와 피고인 쪽이 한번 기피절차로 걸러내고,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배심원을 선정해 신원 노출을 방지하면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봉=배심원의 신분노출을 방지해야하는 것은 참심이나 배심에서 모두 마찬가지죠. 일본의 재판원제도에서도 배심원을 노출하면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판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이것이 여러 단계에서 걸러지는 게 좋다면 배심원을 통한 집중심리에서 한번보다는 수사단계에서도 미리 한차례 걸러주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의 인권보장은 실질적인 국선변호인 제도의 도입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배심제가 돼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피해자의 인권부분도 동시에 확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한=시민 개개인에게는 배심원으로 시민재판관으로 참여하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가 참여하지만 전체가 다 공유하겠죠. 전 국민이 잠재적 배심원이 되는 것인데, 시민이 항상 사법의 대상이고 객체이다가, 주체가 되면 법에 대한 지식이 자기의 것으로 되고, 법의 생활화가 이뤄지고 또 시민들이 법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준법정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를 통해 법 위반자가 줄어든다는 게 아니라, 전문관료들이 만들어갔던 기준들을 시민적 기준으로 바꾸어 나가고 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모세혈관에까지 침투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시민참여에 대해서는 저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50년 동안은 아버지 세대가 열심히 노력해 이끌어왔는데, 지금은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할 때입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법에 대한 존중과 법치주의, 또 하나는 앞선 글로벌 스탠더드 문화와 제도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배심제든 참심제든 절충형이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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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5-0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 씁니다. 최근 저도 '법철학'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힘'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인지요...
실은 이 얘기를 드리려 했던 건 아니고,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책들(혹은 이들에 대한 이차저작) 중에서 '책임'에 관해 상세히 다룬 글이 어떤 건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참, 그리고 저번에 '그라마톨로지' 번역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떤지요? 아마 말씀이 없으신 거 보면 신통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4-05-0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 힘]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는데, 출판사 얘기로는 마침 [문학과 사회] 편집, 출간 일정과 겹쳐서 지연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6월 초 쯤에는 출간이 되겠지요.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책들 중에서 <책임>에 관한 책들이 어떤 게 있는지 물었는데, [전체와 무한] 이후 레비나스의 저술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다 책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는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데리다가 레비나스에 관해 쓴 책에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Adieu to Emmanuel Levinas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는 레비나스의 윤리, 정치사상, 따라서 <환대>와 <책임>의 문제가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차 문헌 가운데 국역본 책으로는 [사랑의 지혜]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알랭 핑켈크로트라고, 프랑스에서 가장 방송을 많이 타고 인기있는 저술가 중 한 사람의 책인데, 제목만 봐서는 흔한 잠언류의 책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사실은 레비나스의 철학에 관한 매우 독창적이고 명쾌한 해설서입니다. 에세이 스타일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렵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사실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영어로 된 저술 중에서는, Richard Beardsworth, Derrida and the Political(1996)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이 책은 데리다의 정치철학, 법철학에 관한 제일 좋은 책 중 한 권이고,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과 데리다 철학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관련된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운데, 조만간 하루 날을 잡아서(^^) 구내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검토해볼 생각입니다.

aporia 2004-05-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큰 도움을 받습니다. 공부하면서 의문드는 점 있으면 종종 질문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이리가레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


        이는 정신의 생성에 필수적인 계기이며―하지만 헤겔은 이 이행 안에서/이행에 대해 거의 우울증적인 애석함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의 누이/누이 자체[역주: “그의 누이/누이 자체”의 원문은 “la/sa soeur”이다.]에 대한 (피들이) 뒤섞이지 않은(불순하지 않은, san mélange) 애착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다. 종과 성별(젠더, genre)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 통일체, 이 개인성, 아직 살아있는 이 피의 주체가 단순하게[곧 종이나 성별 없이―역자] 발생했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의 향수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차화된sexué 관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expose, 성적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이 욕망을 이행시키지는 않고 있다. 성적 욕망은 피의 주기 안에 통합되어 있는 조화를 깨뜨리게 될 텐데, 이러한 조화 안에서 오빠와 누이 사이의 구별은 피의 순환의 각 국면들phases, 곧 들숨/날숨, 유동적임/딱딱함,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역주: apprehension은 “파악”이나 “포착” 같은 의미 이외에도,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들은 “흡수résorption”와 달리, 바깥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로 번역했다.]/바깥의 흡수―이들이 아직 동물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국면들은 거의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그/녀)가 내쉴 때 타자는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그/녀가 붉은 피가 될 때 타자는 자신의/자신들의 정맥(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미 되돌아가고, 그/녀가 혈구(들)의 원자적 개체성으로 긍정될 때 타자는 림프로 남아 있고, 그/녀가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갈 때, 타자는 이제 겨우 휴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등등. 하지만 이들은 소화digestion 과정에서는 이미 치유할 수 없게 분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하나가 [남성적인] 하나 안에서 자신을 재인지reconnaître할 수 있을지 몰라도―따라서 이 경우 [남성적인] 하나는 [여성적인] 하나를 이미 동화시켰을 것이다―그 반대의 경우는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안티고네가, 이 외부, 그녀에게는 도시 바로 그것인 이 외부를 향해/외부에 맞서 자율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와 마음씨coeur[역주: 여기서 “coeur”는 “심장”, “마음”, “마음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리가레가 글의 서두에 제사로 인용한 헤겔의 『자연철학』에 나오는 “중추”를 뜻하기도 한다.], 분노를 입증해주고 있다면, 이는 바로 그녀가 남성적인 것을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한 순간은. 하지만 아마도 이는 그녀가 오빠를 애도할 때에만, [여성적인] 죽음la mort으로 인해 상실한 남성성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영혼에 다시 양분을 제공해주는, 그리고 그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d'en mourir 시간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이미 피의 균형은 와해되고 변질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 자신을 동요시키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불순함이 뒤섞이지 않은 [남성적] 행복le bonheur은 동등하게 분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살아있는 통일성 안에서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누이는, 오빠가 자기로 복귀하기 위해 동화시키는 이러한 실체―피―의 자기-표상적인 지주(支柱)가 될 수 있다. 아들이 그를 낳은 부부로부터 독립해서 대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보증(담보, gage)인 그녀는 살아 있는 거울, 곧 그녀의 반사를 통해 [오빠의] 자기[역주: 여기에서 “자기”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헤겔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원천이다. 붉은 피와 그것의 외관상 유사물이 서로 안에서 조화롭게 (혼)융되는 특권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혼)융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기를 비추기auto-spéculation에 관해 도시가 오빠와 누이 각각에게 부여한 상이한 재인지[인정]의 권리는 항상 이미 그들의 결합을 도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공개적인pubblique 재-표시를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여성[아내]-어머니는 양분을 전달하고 유동화하는[용해시키는] 림프쪽에 전념하게 되고, 주기적인 출혈로 인해 피를 상실함으로써 거의 백색에 가까워지며,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 및 기관들이 체화하여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중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남자(아버지)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체화를 진전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활력, 성마름, 활동성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체내에 타자를 흡수하는 순간에 특별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버지-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살아 있는) 교환의 단절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지양함으로써 반복한다. 법의 텍스트의 기록 속에서 피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그는 동시에 이 텍스트(자신)를 분신(으로서)―하지만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그의 부인 안에서 각각 상이하게―생산하며, 외관상 유사한 것들, 상이한 방식으로 피를 잃어버린 개별적 자아들의 원자들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함으로써 피의 색깔을 더욱 더 퇴색시킨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실체가 상실된다. 곧 자신을 살아 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함으로써 피가 상실된다.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역주: hypochondria와 melancholia는 둘 다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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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어떤 담론도 간단히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역주: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의 원어는 “re(n)fermée”이다. “renfermée”라면 “봉합하지”의 의미이고, “refermée”라면 “다시 메우지”의 의미이다.] 못할 상처를 낳는 이러한 타격, 가격이 불가피하게 가해지는 윤리적 계기로 되돌아가봐야 한다. 오빠와 누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소위) 평등한 인정[재인지] 안에, 두 본질들 사이의 비폭력적인 상호 삼투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인정과 상호 삼투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안에서 자신들의 보편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일치는, 아직 청춘들인 전자와 후자가 행위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집 안의 수호신들의 축복 속에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유년 시절이 마치 낙원처럼 계속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가적이고 오염되지 않은immaculées―또는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가적인―유아적 사랑은 어떤 시기 동안에만 존속될 수 있다 ... 그리고 각자는 곧바로, 동등한 자신의 맞짝 안에는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와 타자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공정하게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공동의 분유départage 속에서는 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양심, conscience)은 자신의 단순성 그대로, 의무에 대한 파토스라는 온전한 성격 그대로 재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양심]은 자신에게 드러난 윤리적 본질의 이 부분, 하나의 성에게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상응하는 부분에 따라 행위하도록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식[양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범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 편파적인 작용에 의해 공격을 받은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사후에야 비로소 의식[양심]에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다른 쪽이 대립물과 적대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범행이 이루어질 때 분출하는 어두운 잠재적 힘, 자기[의] 의식conscience de soi은 이러한 행동 속에서 이 힘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이러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식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살해된 공공의 적대자는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결혼한 여왕은 어머니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역주: 여기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힘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양심]”의 원어가 “la conscience éthique”라는 여성형 명사로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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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삼단논법이 이루는 경탄할 만한 악순환. 여기에서는 무의식이 계속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의식―의식은 무의식을 몰라도 무방하도록 허락받고 있다―의 법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으며, 이 법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더 억압받게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윤리적 법, 성적으로 다른 두 현존재를 아래층/위층으로 나누는 것―게다가 이는 오빠와 누이의 죽음 속에서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은 자기Soi에서 유래한다. 정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운동은 이러한 층화를 필연적이게 만들며, 타자가 구덩이로 더욱 깊이 매장될수록[우물 속으로 더 깊이 잠겨들수록] 더 쉽게 자신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처럼 [남성적] 하나는 타자로부터 새로운 힘, 새로운 형태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 타자와 결합하는(성교하는, copule) 반면, 타자는 아무런 독특성의 표시 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어떤 실체가 거주하는 땅 속으로 항상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성적] 타자에 대해 계속 자행되는 강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러한 [강간] 작용은 여성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납골당으로 자신을 밀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경우에는, 너무나 “다른” 본질이 생겨나서 이 본질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본질을 동일자로, (인간적인 법만을 의식하는 [남성적] 무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은) 어떤 무의식으로 환원시킨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범행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자행될 수 있고, [강간] 작용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항들 각자를 근본적으로 이중화하여, 하나의 변증법만으로는 이 항들의 결합을 표현하는(접합하는, articuler) 데 충분치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성격과 다른 성격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분할되고 각자가 스스로 이러한 대립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의식의 법들이 의식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고, 소위 신의 법들은 철학의 법들로, 여성성의 법들은 남성성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음 운동에서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로 이행하게 되는가? 또는 오히려 정신의 운동은 이 차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정신은 사후 효과effet d'après-coup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 차이에 관해 입법하고 차이의 생성을 언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차이를 해소하지만, 실은 이미 모종의 언표 과정(언표의 소송, procès d'énonciation)이 동일자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배제해버렸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남성적인 것은 자신의 담론 기획의 법칙이 전개된 과정을 되밟아갈 수 있지만,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자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의 법을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남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식적인 것은 오히려―또는 훨씬 일찍부터?[역주: 불어에서 “plutôt”는 “오히려”, “차라리”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와 발음이 같은 “plus tôt”는, “plus”가 “더 ~한”을 뜻하는 비교급 부사이고, “tôt”는 “일찍, 빨리”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훨씬 일찍부터”을 의미한다.]―남성쪽에 속하고, 무의식은, 모성적인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에 억압된 채로 여성쪽에 속하게 된다. 이는 남성성―남자쪽에 존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쪽에도 존재하는―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관계들 및 모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소속성을 변증법화할 수 있는 반면(여기에는 모든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부정 작용이 포함된다), 여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l'être라는 추상적 직접성이나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역주: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의 원문은 “un (comme) être”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고, 괄호를 함께 읽으면 “하나로서의 존재”, 곧 “존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는 한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에 대한 거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성 및 심지어 남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자기로서의 하나un comme soi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보편화될 수 있는 연계를 긍정하는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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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그녀를 [그녀] 자신(과 같은 것)으로 정체화할―자기 자신으로 복귀할―수 있게 해주고, 그녀를 자연적인 거울 반영 과정에 대한 속박에서 떼어내고 [자연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사변화 과정에 대한 시각이나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역사Histoire의 생성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여전히 무차별적이고 불분명한 감각적 질료에 불과하며,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내지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역주: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즉자적 상태들이다.]의 지양을 위한 실체(의) 저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언표작용이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재 순간의 복제물redoublement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현재 순간에 자기 자신의 유사-주체성으로 도래할 때,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보편적인 현재 자체로 이행한 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 순간의 복제물은 [여자의] 자기 의식으로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나는 결코 나와 같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여자는 주인이 전유하는 이 독특한 의지에 불과하고, 동일자에 대한 주인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각적이고 저항적인 물질성의 잔여, 또는 달리 말하면 그의 대역 배우doublure에 불과하다. 여자는 그 자신만으로는 역사Histoire의 담론의 언표 과정을 성취하지 못하며, (동일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결여된 노예로 머물러 있다. 곧 자신의 주인에 대해 소외되어 있듯이 이러한 역사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타자, 곧 말하는 존재인 당신Toi[역주: 여기서 “Toi”는 한편으로는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신분이 높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어 표현인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당신”이라고 번역했다.]―또는 그분Il―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자아―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고유 의지는 이러한 주인에 대해 겪게 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의 부정성[쓸모없음]에 대한 내밀한 감정 속에서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타자, 이 대타자Autre를 위한 그녀의 노동은, 그녀 자신에게 종별적인 어떤 욕망의 비현실성(비실효성, ineffectivité)을 구성한다.
        하지만 여자가 욕망의 소유를 이처럼 포기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은 실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이 사물들의 형태는 어떠한 독특한 파토스, 어떠한 우연적 자의성에 의해서도 재-표시되지 않는 어떤 자기에 의해 규정되며, 이 사물들 속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 실재성으로 재-직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에게 제기되는 복종의 요구, 곧 여전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여자의] 자연 본성의 비본질적인 변덕스러움은 보편적인 의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궁극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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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피의 수호자이다. 하지만 피와 여자 모두가 피의 실체로부터 보편적 자기 의식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피와 여자는 핏기 없는 그림자들―무의식적 환상들―이라는 형태로 기저에서 영속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대지에 대해 무기력한 그녀는, 발현하는 정신이 자신의 어두운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길어내는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기―남성성, 공동체, 통치―의 확실성은, 망각의 물 속에 무의식적이고 침묵한 채 억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 실체 속에서 남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자신의 말과 서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대지의 품[자궁]으로 죽은 남자를 다시 안치하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사해주는 데 있음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que)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알고 있는 매개이며, 이를 통해, 묻혀 있는 있는 가장 독특한 생명체로부터 이러한 모든 [독특한] 자기이기를 그만 둔 어떤 현존재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매개적 계기를 기억함으로써, 적어도, 망각 속에 소실되어 버린 남자 및 공동체의 영혼을 보존해줄 수 있다. 그녀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기 의식의 기-억[내면-화][역주: “기-억/내면-화”의 원어는 “Er-innerung”이다. 이 독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기억”, “회상”을 뜻하는데, 이처럼 분철된 형태로는 “내면-화”를 의미한다.]를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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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의 세계,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여 적대적으로 변화된 이 세계가 솟구쳐올라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겠노라고, 뒤집어 엎겠노라고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을 양육하는 무의식적인 대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은 스스로 쾌락plaisir, 향락jouissance의 권리, 심지어 현실적인 능동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보편적 운명을 배반한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보편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나이든 시민을 조롱하고 미숙한 젊은 여자의 경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의 소유[속성]을 도착시킨다. 여성성은 나이든 시민에게 아들, 오빠, 젊은 남자의 젊음이 지닌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이렇게 하는데, 여성성은 이들에게서 정부의 권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인, 동등한 자, 연인을 인지하고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타락의 요소들이라고 억압함으로써만, 이러한 요구들에 맞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반항의 씨앗들은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시민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목적들로부터 분리된 것들로서 이미 무로 환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젊은 남자들―여자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쾌락을 얻는다―이 피흘리는 갈등 속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 힘들을 자신의 무기들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실체는 바로 이 힘들을 통해, 형식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에게 자신의 최후의 자원들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결코 친밀한 가족의 동굴[역주: 이는 '자궁'의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 다시 모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점들로 자신의 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뿌림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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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역주: 원어는  “se/s'en relever”이다. ] 대표적인repré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적어도 절대적으로는―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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