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04.05.03(월) 21:12

 

시민의 사법참여 어떻게


△ 한인섭·서울대 법대 부학장, 봉욱·대검찰청 검찰연구관(왼쪽부터)

배심제·참심제 도입 논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시민의 사법참여’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사법개혁위원회는 사법개혁이라는 큰 틀 아래 시민의 사법참여의 구체적인 안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는 참·배심제 도입을 두고 뜨거운 논쟁 중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부학장과 봉욱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 지난달 27일 서울대에서 만나 시민의 사법참여와 참·배심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인섭 교수는 “‘국민을 위한 사법’을 위해서는 ‘국민에 의한 사법’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며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적극적인 사법참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봉욱 검사는 “검찰도 폐쇄적·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노력이 검찰에서도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인섭=시민의 사법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책을 보면 자신이 배심·참심제 도입을 주장해왔지만 ‘황야의 외침’이고 ‘사막의 절규’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상황이었죠. 2000년까지 학술논문을 보면 그냥 외국의 제도만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2001년부터는 학계와 실무 쪽에서도 논문이 급속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아 행정부를 만들고 국회의원을 뽑지만,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해서 사법부가 정당성을 갖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한걸음 물러난 정당성이죠. 법관을 뽑는데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가 보장돼야 하고, 재판 내용에서도 시민적 관점과 변화하는 가치관이 적시에 투입돼야 하는데 우리나라 법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관생활만 하고 상당히 법조, 법원의 폐쇄성에 갇혀서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시민의 정의와 법원의 정의는 시차가 있는 듯 한 거죠. 이로 인한 불만은 국민들의 사법불신으로 쌓이게 됩니다. 변화하는 가치관이 사법 결정과정에서 바로바로 투입되고, 직업 법관과 일반시민의 교류를 통한 질높은 판단, 그래서 쉽게 수용될 수 있는 판단이 행해질 때가 됐습니다.

봉욱=사법부도 그렇지만 검찰도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고, 운용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국민이 요구하는 공무원 수준과 참여요구 등을 우리도 상당히 깊이있게 느끼고 있습니다. 검찰만 해도 최근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국민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국민의 눈 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표는 안됐지만,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고심사회 제도라고 해서 항고심사를 할 때 외부인사들, 교수, 변호사 등이 참여해서 같이 결정하도록 하는 획기적 제도를 시범 제도로 하고 있고, 시민 옴부즈만 제도도 시범 운영하고 있습니다. 큰 드라이브인 특별수사 등의 경우 예전에 검사들끼리 결정했다면 요즘은 특별수사 모니터링 제도라해서 일반 시민 등을 위촉해서 실제 의견을 종합해 절차화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검찰도 개방적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시민 참여를 바라보려는 입장들이 있습니다.

한=현재의 형사재판 수사의 구조로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제대로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제도적 문제부터 건드려야 합니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하다고 보고 있지만, 저는 검사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 변호사의 참여가 보장이 안되죠. 99년에 경찰이 변호인 참여를 보장한다고 문을 먼저 열었고, 법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열었죠. 하지만 실적을 보면 몇백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봉/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
영미법·대륙법 계통의 차이에서 발생

봉=변호사가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여건이기 때문에 그렇죠.

한=미국은 변호사가 수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엔 현재 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실질적인 조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없죠. 미국 판사는 이를 두고 변호인 참여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봉=영미식과 대륙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형사재판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불만은 피의자 단계에서부터 검사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증거에 있어서도 피의자 심문조서의 영향력이 80~90% 되는 것 아닙니까. 형사재판에서 실제로 판사들이 편견없이 임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검사가 수사해왔던 것을 대체로 존중하는 경우가 많죠. 무죄 판결의 비율이 낮은 통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 미국은 그걸로 끝인데, 한국은 검찰이 거의 반사적으로 항소를 하고 있습니다.

봉=항소율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한=피의자와 피고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구조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봉=무죄율에 대해서는 말이죠, 미국의 학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독일은 어떻게 그렇게 무죄율이 낮을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무죄율은 0.73% 입니다. 미국은 10~20% 정도 되죠. 대륙법 체제는 재판에 넘기기 전에 진실 여부를 한번 가리고, 유죄가 틀림없다 하는 부분만 재판하도록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사건이 100%라면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하는 비율이 43.6% 거든요. 영미법 체계에서는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재판정에서 이 문제를 가리자는 쪽입니다. 그래서 무죄율이 더 높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점을 비판하죠. 무죄 나올 사안은 아예 재판정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 제대로 수사를 안해서 변호사 비용 등의 부담까지도 국민한테 지우는 것은 형사사법의 실패 아니냐는 비판이 크거든요. 사법개혁위원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입장에서 사법제도를 고칠 부분은 첫번째가 폐쇄적인 재판제도, 둘째가 비싼 변호사 수임료, 세번째가 부실한 사법서비스이고 다음이 전관예우 등 법조비리 등 입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실제 국민이 불안한 것은 재판이 폐쇄적이고 나의 재판결과가 어떻게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것이 거든요. 기준의 불명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실무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가 구속될지, 구속되면 석방될지 안될지, 재판 과정에서는 실형이 선고 될지 감옥에 가게 될지 어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변호사를 사서 유무죄를 다투지만, 우리는 오히려, 실제 전관예우는 대개 선처를 요구할 때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의 사법참여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할 부분은, 이런 기준을 정하는데 국민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피고인들이 수사단계에서 자기 자신의 진술로서 만들어진 증거와 또 재판과정에서 각각의 증거를 효율적으로 판별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변호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데 형사사법에서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요, 폐쇄적 재판도 법관과 검사가 많은 역할을 하게 됨으로 그렇게 된 것이죠. 재판 결과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높은 상고율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의 근원적 치료 방법이 시민의 사법참여라고 생각합니다.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하면 폐쇄적 재판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재판관인 배심인, 참심인으로 인해 검사와 변호인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법조인들끼리의 암묵적 존중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거죠.

봉 검사는 배심이 도입될 경우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비용과 시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제도 적용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한국식 배심제를 도입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봉=배심이 도입되더라도 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연간 1천여건에서 많이 잡아 3천여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폐쇄성이 극복되는데, 나머지 230만건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교수들은 배심재판에 소요되는 인력과 비용이 커서 나머지 사건에서는 오히려 더 상황이 열악해진다고 비판합니다. 배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간이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사법시스템이 운영되지 않거든요. 1%의 배심사건은 그나마 폐쇄성을 극복하게 되겠지만 나머지 99%는 어떻게 될까요 일반국민들의 사건은 사각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한=미국도 2~3%의 사건만 배심으로 이뤄집니다. 그 2~3%의 사건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진실규명의 필요성이 아주 큰 사건이며, 결과의 신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배심에 회부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비배심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배심은 민·형사 사건에서 시민의 일부가 시민재판관으로 뽑혀, 사실판단과 유·무죄에 필요한 사실판단을 하는 것인데요. 단순사실 판단과 유죄냐 무죄냐의 최종판단을 배심원이 한다는 것이죠.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 등을 청취하고 직업재판관인 재판장의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설시와 지도를 받으면서 하게 됩니다. 유죄가 되면 양형은 직업법관에 다시 맡기고요. 배심제는 영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꽃피우고 세계 50개국 내외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참심제는 독일이 대표적이죠.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을 모두 시민재판원이 직업재판관과 함께 합니다. 양형판단과 손해배상 액수 결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재판원이 직업법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봉/미국식 배심제가 성공하려면
관련 제도들 함께 도입돼야
한/몽땅 고쳐야 한다고 생각 안해
밈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

봉=영미식 배심제와 독일식 참심제 외에도 조금씩 변형들이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미국식 배심을 도입하면 수사·재판과 관련된 여러 다른 제도도 함께 다 들여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수사단계보다 재판단계에서 모든 것이 가려지거든요. 문제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실을 가린다는 게 어렵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에서의 위증이나 수사기관에서의 거짓진술도 사법방해죄로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개 장소인 재판정에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주요 재판이나 청문회에 증인 등이 나오지 않아 공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배심제를 하려면 법정에서 변호사의 역할도 실제 재판을 이끄는 당사자로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국가변호사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증인보호제도와 내부고발제도 뿐 아니라 법관 선발방식도 포괄해서 들여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게 됩니다. 일괄해서 도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독일식은 아니더라도, 미국식과 독일식을 절충해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국식 배심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현재 우리 제도 중에서 익숙한 부분을 몽땅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중심리 등 구두변론을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도입해야겠죠. 변호인 조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배심제를 안 해도 해야할 것입니다. 미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요. 두 가지의 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한국형 배심제인데요. 직업법관이 재판공판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고요, 배심원 숫자를 9명으로 하고 12명까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명 전원일치 평결로 하고, 정 합의가 안될 때는 8대1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일본이 최근 도입키로 한 재판원제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과반수로 평결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결정은 과반수로 할 수 있지만 사법적 결정은 거의 절대적 진실 추구에 가까우므로 개개인의 특수한 체험은 9명 중 한두명 밖에 안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배심의 최대 장점은 치열한 평의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최대치가 드러나게 되고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참심제가 도입될 경우 전문법관 2명과 시민재판원 7명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보다는 한국형 배심이 더 낫다고 봅니다.

봉/일본이 1928년 배심제 도입했는데
15년뒤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편입
장점 발휘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봉=배심제든 참심제든 장점은 도입해야 하나 단점은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수들의 주장은 주로 재판이 쇼처럼 진행된다는 것이고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을 맡았던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는 “가장 훌륭한 변호사는 모든 적법수단을 이용해 총체적 진실을 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용과 시간도 문제입니다. 제가 미국 연수를 갔을 때 실제로 배심재판에 관여했는데 한 사건에 보통 2주가 걸리고 한달에 2건, 많아야 3건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재판부에서 사건 처리 건수가 월 90건 정도이고, 2심은 12건 정도거든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론적으로 진실이 밝혀지느냐에서 효용은 낮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배심원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은 사건이 전문화돼, 중요 경제부패사건의 경우 직업법관도 실체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피고인의 권익 부분은 존중하나 피해자 인권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도 배심제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으나, 80년대 이후 피해자 인권옹호 운동을 계기로 문제의식이 커져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배심제를 그대로 도입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식 참심제로 갔을 때는, 절충형으로 2+7 혹은 3+9 방식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주로 관심가지는 것은 유무죄가 가려진 이후에 양형부분이고 변호사 선임이유도 유무죄 주장보다는 유리한 양형을 받으려는 것인데 미국식 배심에서는 양형의 투명성이 제고되지 않아 문제가 있습니다. 배심재판이 이뤄지려면 1~2주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죠. 재판 이전에 진실을 가리는 절차가 짧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는 배심재판에서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항소가 불가능한 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또한 초기 수사단계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기능이 약화돼, 미국처럼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 국민의 소박한 법감정으로는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서면 안되거든요. 배심재판이 배심원 구성 등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1928년에 일본이 배심제를 도입해 15년간 운영했는데, 첫해에는 143건이 있었지만, 점점 줄어 10년 뒤에는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일본의 배심제가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 수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은 전시체제로 국민인권이 억압되던 때죠. 배심제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정치상황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과 돈있는 사람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 비용과 시간의 문제 등이 중요한 논점인 듯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배심원을 상대로 쇼처럼 하는데 배심이 각계각층에서 나올 수 있다면 변호사가 쇼할 때 진실을 감추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등 저항감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쇼에 현혹된다기보다 증거에 의해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법관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의 경우,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전원일치의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변호인 쪽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검사 쪽이 극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또 많은 수의 유능한 변호인들을 선임해서 진실에 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들 말하는데, 진실은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퍼즐을 모아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변호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검사의 전제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다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변호사가 최대로 투입된 사건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면, 변호사 없는 피고인은 얼마나 불리한 판결이 나오겠습니까.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배심제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간, 비용과 관련해서도 국민이 배심원이 되는 경우는 평생 1~2번에 불과할 것입니다. 재판관이 되는 체험을 선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많고 군 복무 등의 체험을 통한 국가 의무에도 익숙해 삶의 보람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많죠.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1~2주 사이에 끝날 것이고 1년씩 가는 일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한 교수는 일본의 배심제가 실패한 것은 정치적 상황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 검사는 배심원 구성 등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 폐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 배심제를 주장하는 한 교수와 참심과 배심의 절충형이 옳다는 봉 검사는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했다.

봉=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있기 때문에 배심제 도입여부를 떠나 일반사건의 양형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원으로 뽑히면 우리 국방의 의무처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 다루는 사건이 살인 사건 등 강력 사건이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여론조사에서는 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조직폭력 사건이 있어 피고인 앞에 있는 상황에서라면 그 부담이라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절충형 참심은 법관과 부담을 나누지만 배심제는 100% 배심원들이 부담을 다 안게 돼있습니다. 신변 안전의 부담, 실제 생업의 부담까지 고려한다면 절충형으로 가는 게 적합할 듯 합니다.

한=판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도 배심원들이 누가 봐도 무죄인데 유죄로 결정할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알쏭달쏭한 경우 판사만 판단하면 되느냐의 문제인데, 판사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복잡다단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 시민들의 지식·경험·상식을 보충받아야 됩니다. 얼마전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검사가 사전에 억압적인 분위기를 동원해 자백을 받아내고 심문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소파에 따라 미국식으로 해야 됐었죠.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법정에 미군 병사를 내놓으면 피고인에게 훨씬 불리한 쪽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미국인 기준에서는 한국 재판이 반쯤은 유죄추정상태에서 되는 것 아니냐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원칙을 정하고 있음에도 실제 운영은 피고인에게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면 참심형으로는 어렵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봉/재판이 쇼처럼 진행되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한/현재도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 있어

봉=미국의 제도가 미국의 문화와 미국민의 법감정, 국민의식에 맞는 제도라면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도입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배심이 미국의 법감정에 맞지만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다고 할 때 바꾸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영미는 절차적 정의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대신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사필귀정의 뿌리 깊은 법감정도 존중하면서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한=피해자의 분노와 고통을 해결하려면 일단 검사가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입증해야죠. 피해자를 재판에 참여하게 한다거나 재산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소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흉악범이나 조직폭력 사건에 관여하는 부담은 판사나 검사도 큽니다. 알 카포네의 재판을 둘러싼 온갖 영화가 있는데요, 직업 법관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매수됐지만 배심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았거든요. 배심원 선정때 검사와 피고인 쪽이 한번 기피절차로 걸러내고,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배심원을 선정해 신원 노출을 방지하면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봉=배심원의 신분노출을 방지해야하는 것은 참심이나 배심에서 모두 마찬가지죠. 일본의 재판원제도에서도 배심원을 노출하면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판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이것이 여러 단계에서 걸러지는 게 좋다면 배심원을 통한 집중심리에서 한번보다는 수사단계에서도 미리 한차례 걸러주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의 인권보장은 실질적인 국선변호인 제도의 도입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배심제가 돼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피해자의 인권부분도 동시에 확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한=시민 개개인에게는 배심원으로 시민재판관으로 참여하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가 참여하지만 전체가 다 공유하겠죠. 전 국민이 잠재적 배심원이 되는 것인데, 시민이 항상 사법의 대상이고 객체이다가, 주체가 되면 법에 대한 지식이 자기의 것으로 되고, 법의 생활화가 이뤄지고 또 시민들이 법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준법정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를 통해 법 위반자가 줄어든다는 게 아니라, 전문관료들이 만들어갔던 기준들을 시민적 기준으로 바꾸어 나가고 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모세혈관에까지 침투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시민참여에 대해서는 저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50년 동안은 아버지 세대가 열심히 노력해 이끌어왔는데, 지금은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할 때입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법에 대한 존중과 법치주의, 또 하나는 앞선 글로벌 스탠더드 문화와 제도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배심제든 참심제든 절충형이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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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5-0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 씁니다. 최근 저도 '법철학'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힘'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인지요...
실은 이 얘기를 드리려 했던 건 아니고,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책들(혹은 이들에 대한 이차저작) 중에서 '책임'에 관해 상세히 다룬 글이 어떤 건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참, 그리고 저번에 '그라마톨로지' 번역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떤지요? 아마 말씀이 없으신 거 보면 신통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4-05-0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 힘]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는데, 출판사 얘기로는 마침 [문학과 사회] 편집, 출간 일정과 겹쳐서 지연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6월 초 쯤에는 출간이 되겠지요.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책들 중에서 <책임>에 관한 책들이 어떤 게 있는지 물었는데, [전체와 무한] 이후 레비나스의 저술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다 책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는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데리다가 레비나스에 관해 쓴 책에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Adieu to Emmanuel Levinas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는 레비나스의 윤리, 정치사상, 따라서 <환대>와 <책임>의 문제가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차 문헌 가운데 국역본 책으로는 [사랑의 지혜]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알랭 핑켈크로트라고, 프랑스에서 가장 방송을 많이 타고 인기있는 저술가 중 한 사람의 책인데, 제목만 봐서는 흔한 잠언류의 책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사실은 레비나스의 철학에 관한 매우 독창적이고 명쾌한 해설서입니다. 에세이 스타일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렵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사실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영어로 된 저술 중에서는, Richard Beardsworth, Derrida and the Political(1996)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이 책은 데리다의 정치철학, 법철학에 관한 제일 좋은 책 중 한 권이고,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과 데리다 철학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관련된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운데, 조만간 하루 날을 잡아서(^^) 구내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검토해볼 생각입니다.

aporia 2004-05-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큰 도움을 받습니다. 공부하면서 의문드는 점 있으면 종종 질문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