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글: 로쟈,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까,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한 대학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데리다의 [불량배들] 번역에 관한 서평을 읽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면서, 국내 철학서들의 오역 문제에 관해 이런저런 걸 묻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말해서 역자와 출판사의 명예에 피해를 입힌 것 같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런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할 경우 독자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해봤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도 역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출판사도 이 책을 개역할 생각을 하지 않는 마당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문제를 처리했을 경우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겠느냐고요. 그리고 오역으로 점철된 책을 비싼 돈주고 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지적 능력만 한탄할 독자들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주느냐고요.
그 기자는 정말 그렇겠다고 수긍을 했지만, 정말 문제를 제대로 인식해서 수긍을 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고, 또 그 기자에게 그런 식의 "점잖은 해결 방안"을 제안했던 사람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 어떤 역자나 출판사가 그런 식으로 책을 출판했을 경우, 그 역자나 출판사가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것과, 번역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역에 대한, 독자들에 대한 역자나 출판사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다른 연구자들이나 신문, 잡지들이나 모두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를, 굳이 애써서 파헤치고 밝혀내어, 아까운 시간과 정력 소비하고 덤으로 모진 놈 소리까지 듣는, 로쟈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peeker님의 고언은 그런 우스꽝스러워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러쿵저러쿵 덕담이나 해가면서 점잖게 살 수 없는 팔자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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