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페이퍼] 쓰기가 뜸했는데, 당분간 다른 일 때문에 [리뷰]나 [페이퍼]를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 틈새를 메우는 의미에서 지난 주에 만나뵌 독자분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한달 전쯤 어느 독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60대 정도인 이 독자분은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얻었다고 하시면서, 성함을 밝히신 뒤 먼저 좋은 책([헤겔 또는 스피노자])을 번역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독자 중에 60이 넘은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랬고, 처음 들어보는 성함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철학계에 몸담고 계시는 분 중에 그 연세에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만한 분이라면,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그 분의 성함은 제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제 당혹감을 눈치채셨는지, 곧이어 당신께서는 아마추어 독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번역에 관해 몇 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또 놀랄 만한 일인데, 그 분이 지적해 주신 것은 헤겔 인용문 중 독일어 원문의 쪽수가 두 어군데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이었고, 제가 독일어 원문 쪽수를 표시하면서 몇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해놓은 게 유감스럽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헤겔 저작의 독일어본 쪽수 표시 중에서 몇 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일인데, 이렇게 표기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곧 제가 책머리의 [일러두기]에 표시해둔 것처럼, 마슈레가 사용한 헤겔 저작의 불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과, 제가 갖고 있는 헤겔 저작집(Suhrkamp 출판사에서 펴낸 20권짜리 저작집), 그리고 임석진 교수의 국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 전집(Felix Meiner)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전집의 경우 이전의 헤겔 저작 편집본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들이 재편집되고 상당히 첨삭되어 있어서, 인용문의 쪽수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교정 작업은 지난 해 1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1월 초로 예정된 출판사의 인쇄 날짜에 맞춰 책을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상당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갖고 있는 주어캄프 판본 위주로 독일어 원문의 쪽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주어캄프 본에 빠져 있는 독일어 원문은 일단 <독어본 누락>이라고 표시해놓은 뒤, 나중에 재판을 내면 다른 판본에서 원문을 찾아 빠진 쪽수를 채워 넣자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에 쫒기던 그 때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도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까 이 문제가 줄곧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분께 이 문제를 지적당하고 보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원문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책을 읽으신 것을 볼 때,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분이 (헤겔) 철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애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문제점을 더 지적당하지나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으니, 책을 다 읽은 뒤에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망신은 그래도 면했구나 안도하면서, 식사 초대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는데, 그 뒤 3주 정도 지난 뒤에(그러니까 지지난 주) 이 독자분께서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책을 잘 읽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피에르 마슈레의 철학적 능력을 칭찬하고 번역의 노고도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번역과 관련하여 두 어 군데 미심쩍은 점을 물어보시고, 지난 번에 약속했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공짜로 저녁을 얻어먹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고,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시간과 약속 장소를 정하고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만나뵙고 식사를 했습니다.

* 이것도 글이라고 쓰기 힘들어서(-_-;;) 2부는 내일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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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5-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 still have such a reader!..

balmas 2004-05-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번역료로 지금까지 받은 돈이 대략 150만원 가량 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많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이 책을 번역해서 이런 독자분을 만날 수 있었으니 돈 몇푼으로 따지기 힘든 보답을 받은 셈입니다.
나이 어린 독자들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 욕심이 과한가요?^^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번역을 마다 않는 건 결국 이런 독자들(과의 소통)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월 2004-05-2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이가 어릴테니(?) 과한 욕심이 채워지는 셈입니다. ^^;

balmas 2004-05-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렇게 영계(^^)란 말입니까? 제가 말한 나이 어린 독자는 20대 초반의 독자를 가리키는데 ... ^^ 그나저나 3편은 언제 올리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