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가레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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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신의 생성에 필수적인 계기이며―하지만 헤겔은 이 이행 안에서/이행에 대해 거의 우울증적인 애석함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의 누이/누이 자체[역주: “그의 누이/누이 자체”의 원문은 “la/sa soeur”이다.]에 대한 (피들이) 뒤섞이지 않은(불순하지 않은, san mélange) 애착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다. 종과 성별(젠더, genre)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 통일체, 이 개인성, 아직 살아있는 이 피의 주체가 단순하게[곧 종이나 성별 없이―역자] 발생했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의 향수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차화된sexué 관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expose, 성적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이 욕망을 이행시키지는 않고 있다. 성적 욕망은 피의 주기 안에 통합되어 있는 조화를 깨뜨리게 될 텐데, 이러한 조화 안에서 오빠와 누이 사이의 구별은 피의 순환의 각 국면들phases, 곧 들숨/날숨, 유동적임/딱딱함,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역주: apprehension은 “파악”이나 “포착” 같은 의미 이외에도,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들은 “흡수résorption”와 달리, 바깥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로 번역했다.]/바깥의 흡수―이들이 아직 동물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국면들은 거의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그/녀)가 내쉴 때 타자는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그/녀가 붉은 피가 될 때 타자는 자신의/자신들의 정맥(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미 되돌아가고, 그/녀가 혈구(들)의 원자적 개체성으로 긍정될 때 타자는 림프로 남아 있고, 그/녀가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갈 때, 타자는 이제 겨우 휴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등등. 하지만 이들은 소화digestion 과정에서는 이미 치유할 수 없게 분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하나가 [남성적인] 하나 안에서 자신을 재인지reconnaître할 수 있을지 몰라도―따라서 이 경우 [남성적인] 하나는 [여성적인] 하나를 이미 동화시켰을 것이다―그 반대의 경우는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안티고네가, 이 외부, 그녀에게는 도시 바로 그것인 이 외부를 향해/외부에 맞서 자율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와 마음씨coeur[역주: 여기서 “coeur”는 “심장”, “마음”, “마음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리가레가 글의 서두에 제사로 인용한 헤겔의 『자연철학』에 나오는 “중추”를 뜻하기도 한다.], 분노를 입증해주고 있다면, 이는 바로 그녀가 남성적인 것을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한 순간은. 하지만 아마도 이는 그녀가 오빠를 애도할 때에만, [여성적인] 죽음la mort으로 인해 상실한 남성성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영혼에 다시 양분을 제공해주는, 그리고 그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d'en mourir 시간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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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미 피의 균형은 와해되고 변질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 자신을 동요시키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불순함이 뒤섞이지 않은 [남성적] 행복le bonheur은 동등하게 분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살아있는 통일성 안에서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누이는, 오빠가 자기로 복귀하기 위해 동화시키는 이러한 실체―피―의 자기-표상적인 지주(支柱)가 될 수 있다. 아들이 그를 낳은 부부로부터 독립해서 대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보증(담보, gage)인 그녀는 살아 있는 거울, 곧 그녀의 반사를 통해 [오빠의] 자기[역주: 여기에서 “자기”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헤겔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원천이다. 붉은 피와 그것의 외관상 유사물이 서로 안에서 조화롭게 (혼)융되는 특권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혼)융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기를 비추기auto-spéculation에 관해 도시가 오빠와 누이 각각에게 부여한 상이한 재인지[인정]의 권리는 항상 이미 그들의 결합을 도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공개적인pubblique 재-표시를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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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여성[아내]-어머니는 양분을 전달하고 유동화하는[용해시키는] 림프쪽에 전념하게 되고, 주기적인 출혈로 인해 피를 상실함으로써 거의 백색에 가까워지며,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 및 기관들이 체화하여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중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남자(아버지)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체화를 진전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활력, 성마름, 활동성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체내에 타자를 흡수하는 순간에 특별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버지-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살아 있는) 교환의 단절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지양함으로써 반복한다. 법의 텍스트의 기록 속에서 피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그는 동시에 이 텍스트(자신)를 분신(으로서)―하지만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그의 부인 안에서 각각 상이하게―생산하며, 외관상 유사한 것들, 상이한 방식으로 피를 잃어버린 개별적 자아들의 원자들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함으로써 피의 색깔을 더욱 더 퇴색시킨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실체가 상실된다. 곧 자신을 살아 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함으로써 피가 상실된다.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역주: hypochondria와 melancholia는 둘 다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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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담론도 간단히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역주: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의 원어는 “re(n)fermée”이다. “renfermée”라면 “봉합하지”의 의미이고, “refermée”라면 “다시 메우지”의 의미이다.] 못할 상처를 낳는 이러한 타격, 가격이 불가피하게 가해지는 윤리적 계기로 되돌아가봐야 한다. 오빠와 누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소위) 평등한 인정[재인지] 안에, 두 본질들 사이의 비폭력적인 상호 삼투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인정과 상호 삼투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안에서 자신들의 보편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일치는, 아직 청춘들인 전자와 후자가 행위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집 안의 수호신들의 축복 속에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유년 시절이 마치 낙원처럼 계속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가적이고 오염되지 않은immaculées―또는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가적인―유아적 사랑은 어떤 시기 동안에만 존속될 수 있다 ... 그리고 각자는 곧바로, 동등한 자신의 맞짝 안에는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와 타자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공정하게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공동의 분유départage 속에서는 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양심, conscience)은 자신의 단순성 그대로, 의무에 대한 파토스라는 온전한 성격 그대로 재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양심]은 자신에게 드러난 윤리적 본질의 이 부분, 하나의 성에게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상응하는 부분에 따라 행위하도록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식[양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범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 편파적인 작용에 의해 공격을 받은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사후에야 비로소 의식[양심]에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다른 쪽이 대립물과 적대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범행이 이루어질 때 분출하는 어두운 잠재적 힘, 자기[의] 의식conscience de soi은 이러한 행동 속에서 이 힘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이러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식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살해된 공공의 적대자는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결혼한 여왕은 어머니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역주: 여기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힘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양심]”의 원어가 “la conscience éthique”라는 여성형 명사로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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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삼단논법이 이루는 경탄할 만한 악순환. 여기에서는 무의식이 계속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의식―의식은 무의식을 몰라도 무방하도록 허락받고 있다―의 법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으며, 이 법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더 억압받게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윤리적 법, 성적으로 다른 두 현존재를 아래층/위층으로 나누는 것―게다가 이는 오빠와 누이의 죽음 속에서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은 자기Soi에서 유래한다. 정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운동은 이러한 층화를 필연적이게 만들며, 타자가 구덩이로 더욱 깊이 매장될수록[우물 속으로 더 깊이 잠겨들수록] 더 쉽게 자신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처럼 [남성적] 하나는 타자로부터 새로운 힘, 새로운 형태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 타자와 결합하는(성교하는, copule) 반면, 타자는 아무런 독특성의 표시 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어떤 실체가 거주하는 땅 속으로 항상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성적] 타자에 대해 계속 자행되는 강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러한 [강간] 작용은 여성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납골당으로 자신을 밀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경우에는, 너무나 “다른” 본질이 생겨나서 이 본질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본질을 동일자로, (인간적인 법만을 의식하는 [남성적] 무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은) 어떤 무의식으로 환원시킨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범행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자행될 수 있고, [강간] 작용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항들 각자를 근본적으로 이중화하여, 하나의 변증법만으로는 이 항들의 결합을 표현하는(접합하는, articuler) 데 충분치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성격과 다른 성격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분할되고 각자가 스스로 이러한 대립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의식의 법들이 의식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고, 소위 신의 법들은 철학의 법들로, 여성성의 법들은 남성성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음 운동에서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로 이행하게 되는가? 또는 오히려 정신의 운동은 이 차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정신은 사후 효과effet d'après-coup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 차이에 관해 입법하고 차이의 생성을 언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차이를 해소하지만, 실은 이미 모종의 언표 과정(언표의 소송, procès d'énonciation)이 동일자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배제해버렸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남성적인 것은 자신의 담론 기획의 법칙이 전개된 과정을 되밟아갈 수 있지만,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자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의 법을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남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식적인 것은 오히려―또는 훨씬 일찍부터?[역주: 불어에서 “plutôt”는 “오히려”, “차라리”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와 발음이 같은 “plus tôt”는, “plus”가 “더 ~한”을 뜻하는 비교급 부사이고, “tôt”는 “일찍, 빨리”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훨씬 일찍부터”을 의미한다.]―남성쪽에 속하고, 무의식은, 모성적인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에 억압된 채로 여성쪽에 속하게 된다. 이는 남성성―남자쪽에 존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쪽에도 존재하는―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관계들 및 모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소속성을 변증법화할 수 있는 반면(여기에는 모든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부정 작용이 포함된다), 여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l'être라는 추상적 직접성이나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역주: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의 원문은 “un (comme) être”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고, 괄호를 함께 읽으면 “하나로서의 존재”, 곧 “존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는 한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에 대한 거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성 및 심지어 남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자기로서의 하나un comme soi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보편화될 수 있는 연계를 긍정하는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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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그녀를 [그녀] 자신(과 같은 것)으로 정체화할―자기 자신으로 복귀할―수 있게 해주고, 그녀를 자연적인 거울 반영 과정에 대한 속박에서 떼어내고 [자연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사변화 과정에 대한 시각이나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역사Histoire의 생성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여전히 무차별적이고 불분명한 감각적 질료에 불과하며,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내지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역주: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즉자적 상태들이다.]의 지양을 위한 실체(의) 저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언표작용이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재 순간의 복제물redoublement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현재 순간에 자기 자신의 유사-주체성으로 도래할 때,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보편적인 현재 자체로 이행한 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 순간의 복제물은 [여자의] 자기 의식으로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나는 결코 나와 같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여자는 주인이 전유하는 이 독특한 의지에 불과하고, 동일자에 대한 주인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각적이고 저항적인 물질성의 잔여, 또는 달리 말하면 그의 대역 배우doublure에 불과하다. 여자는 그 자신만으로는 역사Histoire의 담론의 언표 과정을 성취하지 못하며, (동일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결여된 노예로 머물러 있다. 곧 자신의 주인에 대해 소외되어 있듯이 이러한 역사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타자, 곧 말하는 존재인 당신Toi[역주: 여기서 “Toi”는 한편으로는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신분이 높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어 표현인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당신”이라고 번역했다.]―또는 그분Il―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자아―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고유 의지는 이러한 주인에 대해 겪게 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의 부정성[쓸모없음]에 대한 내밀한 감정 속에서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타자, 이 대타자Autre를 위한 그녀의 노동은, 그녀 자신에게 종별적인 어떤 욕망의 비현실성(비실효성, ineffectivité)을 구성한다.
하지만 여자가 욕망의 소유를 이처럼 포기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은 실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이 사물들의 형태는 어떠한 독특한 파토스, 어떠한 우연적 자의성에 의해서도 재-표시되지 않는 어떤 자기에 의해 규정되며, 이 사물들 속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 실재성으로 재-직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에게 제기되는 복종의 요구, 곧 여전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여자의] 자연 본성의 비본질적인 변덕스러움은 보편적인 의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궁극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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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피의 수호자이다. 하지만 피와 여자 모두가 피의 실체로부터 보편적 자기 의식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피와 여자는 핏기 없는 그림자들―무의식적 환상들―이라는 형태로 기저에서 영속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대지에 대해 무기력한 그녀는, 발현하는 정신이 자신의 어두운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길어내는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기―남성성, 공동체, 통치―의 확실성은, 망각의 물 속에 무의식적이고 침묵한 채 억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 실체 속에서 남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자신의 말과 서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대지의 품[자궁]으로 죽은 남자를 다시 안치하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사해주는 데 있음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que)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알고 있는 매개이며, 이를 통해, 묻혀 있는 있는 가장 독특한 생명체로부터 이러한 모든 [독특한] 자기이기를 그만 둔 어떤 현존재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매개적 계기를 기억함으로써, 적어도, 망각 속에 소실되어 버린 남자 및 공동체의 영혼을 보존해줄 수 있다. 그녀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기 의식의 기-억[내면-화][역주: “기-억/내면-화”의 원어는 “Er-innerung”이다. 이 독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기억”, “회상”을 뜻하는데, 이처럼 분철된 형태로는 “내면-화”를 의미한다.]를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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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의 세계,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여 적대적으로 변화된 이 세계가 솟구쳐올라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겠노라고, 뒤집어 엎겠노라고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을 양육하는 무의식적인 대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은 스스로 쾌락plaisir, 향락jouissance의 권리, 심지어 현실적인 능동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보편적 운명을 배반한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보편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나이든 시민을 조롱하고 미숙한 젊은 여자의 경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의 소유[속성]을 도착시킨다. 여성성은 나이든 시민에게 아들, 오빠, 젊은 남자의 젊음이 지닌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이렇게 하는데, 여성성은 이들에게서 정부의 권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인, 동등한 자, 연인을 인지하고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타락의 요소들이라고 억압함으로써만, 이러한 요구들에 맞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반항의 씨앗들은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시민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목적들로부터 분리된 것들로서 이미 무로 환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젊은 남자들―여자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쾌락을 얻는다―이 피흘리는 갈등 속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 힘들을 자신의 무기들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실체는 바로 이 힘들을 통해, 형식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에게 자신의 최후의 자원들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결코 친밀한 가족의 동굴[역주: 이는 '자궁'의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 다시 모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점들로 자신의 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뿌림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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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역주: 원어는 “se/s'en relever”이다. ] 대표적인repré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적어도 절대적으로는―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