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살인의 추억: 불행에 중독된 시대의 살인

영구미제사건 - 화성연쇄살인사건
 
   영화 <살인의 추억>이 지난 2003년 4월 25일 개봉한 지 꼭 석 달만에 전국 510만 1645명(서울 191만 2369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막을 내렸다. 역대 한국 영화 흥행 랭킹 5위에 해당하는 작지 않은 성과를 거둔 이 영화는 지난 2001년 개봉한 <친구> 820만 명으로 1위,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이상 580만 명), <조폭 마누라>(520만 명)의 뒤를 잇고 있는 소위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한편 이 영화의 실제 소재가 되었던 '화성연쇄 살인사건'(지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여에 걸쳐 10명의 부녀자가 성폭행 당한 뒤 피살된 사건)은 유일하게 목격자가 확보되었던 7차 사건(88년 9월7일 발생)의 공소시효가 2003년 9월 6일로 만료되었다. 사실상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전체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을 수사해온 경기경찰청은 8일 “범인검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7차 사건의 살인혐의 공소시효 15년이 지남에 따라 화성 사건은 90년 11월15일 발생한 9차 사건과 91년 4월3일 발생한 10차 사건만 처벌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유일하게 범인이 검거된 8차사건은 나머지 연쇄살인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났었다. 7차 사건은 당시 수사팀에 의해 유일하게 목격자가 확보 돼 용의자에 대해 ‘갑동이’라는 별칭까지 붙는 등 검거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경우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목격자가 전혀 없던 이전 사건과는 달리 “사건 당일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옷이 흠뻑 젖은 남자를 범행 현장부근에서 태웠다”는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원이 나타나면서 수사에 더욱 활기를 띠었었다.

  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스포츠형 머리에 신장 165~170㎝, 오똑 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 가량 남자’를 현상금 500만원에 수배하고, 20만장의 전단을 전국에 배포하는 등 검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결국 미제사건으로 종결되게 되었다. 당시 사건의 수사팀장이던 경기경찰청 강력계장 하승균 경정은 모 출판사를 통해『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자전에세이를 펴내기도 했다. 하 계장은 이 책을 통해 “나는 아직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담당형사” 라면서 범인을 잡지 못한 아쉬움과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검거의지를 나타냈다.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취향만 남는다

  어느 책에선가 이 문장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를 읽고 무릎을 짝 소리 나게 때리고 싶었다. 가끔 통렬한 한 문장이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기도 한다. 물론 저 문장이 어느 경우에나 고스란히 제몫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저와 비슷한 감흥을 던져주었던 다른 문장은(일종의 아포리즘 같이) 가령, "천재가 사라지면 스타일만 남는다"와 같은 문장이 있었다. 여기에서 '이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소녀 취향'이 될 것이고, '천재'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스타일'이다. 공자를 대성(大聖)이라 하는데 비해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하는 것은 맹자를 폄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류(亞流)라는 말에 이르게 되면 '에피고넨(epigonen)'의 의미가 된다. 에피고넨이란 말은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테베를 공격한 그리스 7용사의 '자손'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그 뒤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돠었다. 에피고넨의 의미는 자손에서 후계자로 이어지다가 학문과 예술에 이르러 이에 대한 '모방자', '아류'의 의미로 확장된다. 예술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사조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 뒤를 이어 오는 이들이 좀더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시대의 징벌을 선구자들이 고스란히 맞아준 덕이다.

  종종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이 새로운 사조를 개창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탓이다. 우리는 세계 4대 종교라는 '공자, 예수, 부처, 이슬람'의 진리를 알고 있다. 또한 근세사를 통해 종종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의 폐해를 듣고 말한다. 이 말은 본래 20세기 초엽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파 내에서 신학적 해석과 진화론을 둘러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갈등에 대응하는 보수교단의 신앙운동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주의라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는 애초의 진리로 회귀하자는 운동이 된다. 기독교식으로 하자면 성서의 무오류성을 비롯한 몇 대 강령을 신앙처럼 준수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공자에 이르러서는 주희의 성리학이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져 조선에서는 유교의 다른 학파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처형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나의 진리가 처음 그것을 말한 이로부터 에피고넨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사라지고 '말씀'으로 기록된 진리만이 남을 때, 그리고 이것을 다시 절대선으로 추구하게 될 때 우리는 '도그마(dogma)'에 빠지게 된다. 중심은 유연하나 변방으로 이를수록 잔인해지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 고쳐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 정신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다." 80년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나는 무수한 소설가들이 달려들었던 '후일담' 문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일담이 진정한 후일담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선행돼야 한다고 보는데 하나는 그들이 통과한 시대에 대한 성과와 반성이 녹록치 않게 녹아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급한 후일담은 마치 지금도 똥 푸는 사람이 내가 옛날에 똥 펐었는데 말이야 하면서 떠들어대는 술집 무용담처럼 여겨진다(이건 절대로 똥 푸는 일에 대한 험담은 아니다). 어떤 내용들은 마치 과거 풍문으로 떠들던 -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형사들이 담배를 나눠피우며 대학생들이 MT가서 '떼씹'을 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 소문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들은 아니었음을 자인하는 정도의 반성(실제로 '100인위'에서는 지난 시기의 소위 '민주화운동권' 내에서의 성폭력을 조사했다)이 그것이다.

  어느 한 시대를 조망하는데 있어 개인의 성찰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작가의 절망은 곧 사회와 시대의 절망과 아직까지도 대등한 긴장관계 아래 놓인다는 나의 문학적 전망 아래에서 그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개소리의 연장이었다. "그래, 혁명은 파산했다. 그렇다고 절망도 파산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80년대를 회고하는 성찰에서 우리가 특히 주의할 것은 우리가 지난 80년대에 꿈꾸었던 전망은 아직 성취되지 못한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즉, 현재 진행형의 연장선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종료된 시점으로 정리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발 인정해 달라는 것이(즉, 현재도 우리는 똥 푼다는 것)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시대에 우리들은 그러할 수밖에 없었음을 살펴봐달라는 울먹임 섞인 반성에 대한 경멸이다. 반성은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반성이라 해서 비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나는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이 들었다. 마치 80년대의 풍속화를 보는 느낌을 전해주는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말이다. 감독 봉준호는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후일담을 시작한 것일까?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속에서 시대 정신으로, 스타일에서 천재로, 소녀취향에서 이성으로 말이다.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두 가지 선행 조건 - 반성과 극복

  나는 진정으로 어느 한 시대가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비극이 코미디로도 다루어질 수 있는 시점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믿는다. 80년대는 그런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의 비극이다. 386세대가 정치 일선에 등장한다고 해서, 과거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이 보상받는다고 해서, 그들의 운동이 재평가된다고 해서 그 시대가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살인의 추억>이 가진 미덕 중 한 가지는 80년대를 바라보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 하나를 얻었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바라보는 그간의 여러 영화들이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등이 있고, 그 이전의 또다른 영화들이 있었지만 그 영화들 또한 일정한 미덕과 함께 일정한 한계들 속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창동은 그 시대와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초록 물고기>가 자본과 근대화의 폭력성을 그렸다면, <박하사탕>은 개인과 국가 권력 사이의 폭력에 대해 그리고 있다는 미덕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는 지나치게 파편화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섣부른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비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애초에 그런 의도같은 것은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의 시선에 사로잡힌 두 명의 형사는 전근대성(시골형사 박두만)과 근대성(서울형사 서태윤)을 상징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는 이 둘 사이를 애초부터 화해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서울 형사의 근대성이란 것은 그 토대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울 형사 서태윤은 영화의 후반부에 진입하면서 꼬이고 꼬인 범인 체포에 대한 미련과 열망으로 박두만과 닮아간다. 그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박형규를 철도 터널 앞에서 구타하고, 그에게 권총을 들이댄다.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순간마다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신청되었다는, 자신이 그를 미행하지 못한 순간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연속되는 우연의 심증으로 그는 박형규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올드'old'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던'modern'한 한 인간은 결국 'old'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날아든 미국범죄수사국의 DNA조사 보고서는 어리석은 미망을 깨우는 근대의 세계로부터 날아온 타임머신과 같다. 이 영화에는 유력한 범죄 용의자 세 사람이 등장한다. 범죄용의자들이 차례로 등장할 때마다 당신과 나의 전근대성은 함께 피의자를 지목하고, 함께 범죄자를 추적하고, 잠시동안은 연쇄강간살인범의 심정이 되기도 하면서 발로 범인을 잡는 대한민국 형사들의 어처구니없는 발걸음이 되어 이 영화의 히트한 광고 카피처럼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심정이 된다.  우습게도 우리들 중 누구도 현재까지 이 사건의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사상 미증유의 미해결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박현규가 범인일 것이라는 심증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들의 이성이 소녀취향을 능가하지 못하는 순간

  감독 봉준호는 이 상황에서 슬며시 우리들의 뒤통수를 노린다. 그는 마치 시대를 표현하기 위한 풍속의 아이콘을 삽입하듯 - 이미 모든 장치가 드러나 있음에도, 워낙 잘 녹아들어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 시대를 드러낸다. 시대를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이 모든 것이 시대의 잘못이라고 그는 섣부르게 대놓고 지목하지 않는다), 그는 시대를 드러내는 고도의 술수를 부린다. 우리는 몇 번의 살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된다. 전두환의 지방 방문을 위해 빗속에 강제동원된 여고생들과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빗속을 뛰어다니는 경찰들, 살인사건이 벌어질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국사건에 차출된 전경들, 문귀동의 부천성고문 사건 뉴스를 바라보며 우리들은 감독이 말하지 않아도 범인이 잡힐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감독은 더욱 잔인하고 예리하며 집요하게 관객들을 괴롭힌다. 범죄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또 한 명의 피의자. 광호는 범죄 현장의 유력한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형사에게 엉겁결에 못 박힌 각목을 후려친뒤 이에 놀라 뛰어나가고,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숨지고 만다. 형사들이 조금만 더 일찍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대응했더라면, 광호에게 고문을 행사해 광호가 공권력을 두려워하게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유력한 증인이었던 광호가 열차 선로로 뛰어들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호를 때렸던 형사는 녹슨 못에 찔린 뒤 치료를 미루다가 파상풍에 걸려 결국 다리를 잘라내고 만다. 이것을 단순히 형사 개인의 인과응보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형사와 함께 시대의 징벌을 받고 있다. 피의자들은 하나같이 범인이 아니었으며 진짜 범인은 유유히 사라져 과거의 살인현장을 추억한다.

어느 비평가는 영화 <살인의 추억>을 한국적인 토양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걸작이라고 평한다. 오랫동안 한국영화계는 오랫동안 스스로의 갈 길에 대한 고민은 거듭해 왔다. 할리우드 식의 블록버스터를 실험해보기도 했고, 유럽 영화의 예술성을 흉내내보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수사반장>의 시그널을 들으며 발장단을 맞추는 형사와 범인을 외국 관객들이 쉽게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헌법 개정을 논하는 것만으로 적국을 이롭게 만드는 이적행위로 규정되어 치도곤을 당해본 적 없는 그네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도리어 억울할 지경일 것이다. 이 영화는 1996년 초연된 김광림 연출의 연극 <날 보러와요>를 바탕으로, 실제 사건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화 되었다고 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불과 10여년 전의 사건으로 사건발생지역인 화성과 당시 관계자, 피해자 유족들이 예민하다는 점,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제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주 민감한 소재이기도 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보면서 심각해진다는 것, 우리들은 왜 저 지난 시기에 저렇게 답답하게 굴었을까를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어째서 우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그 흔한 DNA조사기가 없었을까를 탓한다. 왜 저 순간에 하필이면 형사가 타고 다니는 고물 '맵시나'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나를 탓한다. 감독 봉준호는 전작 <플란더즈의 개>를 통해 그가 장르적인 영화 만들기를 이미 터득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을 적절한 지점에서 배분하는 장르 뒤집기에 능숙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솜씨를 <살인의 추억>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냈다. 그런 솜씨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낯익은 이야기들을 만난다. 경찰의 무능을 욕하고, 시대의 덜떨어짐을 비난하던 사람도, 경찰의 무능이 또한 우리 시대의 무능이었음을 깨우치고 아파한 사람도 이 대목에 가서는 속이 쓰리다. 우리들은 이 나라의 민주헌정질서를 군홧발로 짓이긴 자들과 광주학살의 주범들과 함께 어두침침한 극장에서 함께 희희덕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달콤 쌉싸름한 살인의 추억을 즐기고 있다. 아시겠는가?

달콤쌉싸름한 학살의 추억

  며칠전에 실린 신문 기사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경찰청이 이날 국회 행자위 소속 한나라당 박종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지난 7월말까지 서울지역에서 전직 대통령들을 위해 교통통제를 한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 1백97회, 전두환 전 대통령 1백93회의 교통통제를 요구하여 시민들이 다니는 길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차를 신호대기없이 달리도록 만들었다. 1997년 노씨가 선고받은 비자금 추징액 2,628억여원의 추징금 가운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78.8%인 2,073억여원이 국고에 환수되었고, 이중 555억여원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엔 전체 추징금 2,205억원 가운데 14.3%에 불과한 314억여원 만이 추징된 상태다. 얼마전 방영된 TV 시사 프로그램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들은 우리나라 상위 5%안에 드는 부자들이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법정에서 판사에게 도리어 성을 내며 자신은 돈이 없어 추징금을 낼 수 없고 일가친척들이 도와주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며 넉살을 떨었다.

  학살자의 피묻은 손이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보해야 할 백주대로의 거리를 막고 신호대기없이 통과하는 이 나라에서는 2002년도 통계에 따르면 9시간에 한 명씩 살해당하고, 1시간 30분마다 한 명씩 강간당한다. 3분마다 한 곳씩 털리고 1분 30초에 한 명 꼴로 거리에서 폭행당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것은 연쇄살인범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민이라도 가야하는 걸까?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정신은 힘을 지배할 수 없게 되자 그저 힘을 저주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음 좋은 사람들은 그건 좋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며 다닌다. 우리는 그것이 좋지 못한 일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론인즉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칼 앞에 결코 다시는 고개 숙이지 않는 일이며 정신을 섬기려 하지 않는 힘을 결코 다시는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사실 그것은 끝이 나지 않을 과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업을 계속하자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진보나  그 어떤 역사철학에 찬동할 만큼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은 그의 운명에 대하여 그가 지니는 인식에 있어서 한 번도 그치지 않고 발전해 왔음을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조건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인간조건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순 속에 놓여 있지만 그 모순을 거부해야 하며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책무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무한한 고통을 진정시켜줄 몇 가지 공식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는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야 하고 이토록 명백하게 부당한 세계 속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며 이 세기의 불행에 중독된 민중들에게 행복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존재가 역사가 자신들에게 부여해준 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혁명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파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속 편하게 미련두지 말고 파산했다고 해두자.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이 어설픈 희망을 찾아 이것이 희망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말 절실하고 정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아직 복원되지 못한 정의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거짓된 희망이 아니라 진실한 절망이다. 절망조차 진실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렇게 모순이 진리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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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10-0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영화평을 보니, 문득 제가 전에 본 정성일씨의 평이 생각납니다. 그때 이 영화에 대한 되지도 않는 감상문을 쓴다고 관련된 평론은 대부분 읽어보았는데, 이 글을 읽으니 '역시 정성일'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아마 [말]지에 실린 영화평이었는데, http://my.dreamwiz.com/dorati4/mal/mal200306.htm에 가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푸른 서울광장, 부끄러운 곳

오성훈
공간연구집단 연구원


밀려드는 차량의 매연과 소음은 지나가는 보행자를 답답하게 하고, 커다란 교통광장을 둘러싼 가구(블록)들은 칙칙한 지하도로만 연결되어 있던 곳이 분수와 잔디가 어우러지고, 지상의 횡단보도로 연결된 곳으로 바뀌었다면 누구나 환영할 것이다. 더구나 고궁과 산을 제외하고는 버젓한 녹지하나 없는 서울의 도심이라면 그 기꺼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도심의 차량교통속도와 같은 ‘수량’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우리도 이런 것좀 해보자는, 환경의 ‘질’에 대한 고려가 그 바탕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창한 여름날 시원한 녹지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바라보면서도 시원하기는커녕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네 마음가짐이 아직은 저런 고운 것을 즐거워하기엔 촌스럽기 때문일까?

서울시가 마련한 시청 앞 광장 홈페이지를 가보면, 광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하면서 옛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부터 시작하여 신성과 이성 등의 흐름이 광장이라는 공간에 면면히 담겨져 왔음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맞다. 광장은 저 들판 한복판에 자리잡은 휑뎅그레한 공간과는 다르다. 동일한 크기와 질감의 공간이라도 도시 한복판에 들어섬으로써 다른 효과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효과와 의미는 도시의 고유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 시청 앞 광장의 홈페이지의 설명이 단순한 구색맞추기가 아니라면, 광장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시청 앞 광장에 담았을 게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좀 다른 것 같다.

광장과 공원

광장은 공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장은 정치적인 논쟁을 벌이는 곳으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으로서, 아니면 전제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서 기능하였고, 광장이 위치한 도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경제적 수준, 문화적 위상을 나타내는 재현적 공간이다. 광장의 속성은 사적이기보다는 공적인 것이고, 사색과 휴식보다는 논쟁과 협상에 걸맞는 곳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공원은 사적인 향유를 그 전제로 하는 공간이며, 사적 향유에 장애가 되는 것은 최대한 배제하게 된다. 그렇다. 그 이름이 광장이면 어떻고, 공원이면 또 어떤가. 광장이라고 이름 붙인 공원도 있을 법한데, 시청 앞의 공간은 광장으로 꾸밀지 공원으로 꾸밀지조차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다. 즉 애초의 명칭은 광장이었으나, 서울시 일꾼들의 머리에는 어느 새 공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경비를 들여 설계공모전까지 개최한 후 선정한 시청 앞 광장 설계안 ‘빛의 광장’안에 따르면 시청 앞 광장은 조명시설이 갖춰진 높이 15m의 기둥, 음악에 따라 물을 내뿜는 분수, 2300개의 액정장치(LCD)모니터가 설치된 바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설계는 기본적으로 많은 인구가 이용할 수 있고, 정보전달체계가 갖추어짐으로써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공적인 의사소통체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광장’설계안은 곧 ‘공원’화된다. 10개월에 걸쳐 추진하던 원 설계안이 잔디광장으로 급작스레 바뀐 것이다. 이를 결정한 ‘시청 앞 광장 조성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시 측에서 5월에 열리는 ‘하이서울’ 축제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빈땅에 잔디라도 깔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울시는 ‘빛의 광장’ 공사비가 103억에 달하고 잔디광장은 40억이면 조성할 수 있어 시기상조인 안을 선택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기상조인 안을 당선작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것을 승인한 사람, 또 손바닥 뒤집듯 바꾼 사람은 누구인가? 시말서라도 써서 시민들 앞에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청 앞 광장 홈페이지에 가보면 서울시에서는 ‘2004년 5월 개최예정인 Hi Seoul Festival 행사 대비하여 4월까지 Open Space 형태의 광장을 조성하고, 당선작 작품의 시행은 일단 유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03억이 드는 광장을 결국 조성할 계획이라면 무슨 잔치마당 하나 때문에 40억짜리 공사를 임시로 가설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거기에 10억원 정도로 추산되는 설계, 공사업체에 대한 위약금도 물어줄 판이라고 한다. 하이서울페스티발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잔치마당의 개최시기는 몇 십억을 들여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하늘에서 절대절명으로 점지라도 해준 것인가?

‘들어가지 마시오’

잔디광장 안은 결국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을 광장아닌 공원으로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과연 그곳에 광장이 필요한지, 공원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슬그머니 공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잔디‘광장’은 지나치게 밟아서는 안되고 아름다운 상태로 보존해야 하므로, 거기에 따른 통제가 필요하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딱딱한 말, 또는 굳은 표정의 용역경비원들이 따라나온다. 잔디보호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통제가 개입되자, 그 통제는 ‘광장’이용의 허가를 서울시에서 가져가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이제 시청 앞 광장은 서울시장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모임은 가지기 어려워진 것이다. 의견수렴없는 비민주적 절차를 통해 실현된 광장설계안은 부적절한 통제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통제의 기준은 모호하다.

지금의 모습처럼 잔디가 깔리고, 물이 흩날리는 공간도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의 역량에 따라 공적인 공간으로 전화될 수는 있다. 그러나 공간의 물리적 배치 또한 일정한 의도, 또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밟으면 죽게되는 잔디를 유동인구가 상당한 고밀도의 도심의 보행자 공간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 목가적인 환상에 가깝다. 서울시는 집회 등으로 잔디가 손상될 경우, 그를 돈으로 물어내라고 조례를 제정하였다. 허가를 받을 경우에도 면적당 사용료를 내야 한다. 도시에서 누군가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무리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돈만 내면 누구나 집회를 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서울시는 정치적 집회는 원천적으로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열린 음악회나 축구경기 응원에는 허용한 잔디밭을 6월항쟁 기념행사에는 제한했고,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의 문화제는 ‘문화제를 가장한 정치적 집회’라며 미신고집회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거기에 새마을운동 서울시회, 자유총연맹 서울시지부,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협의회 등이 5, 6월 두달 내내 사용신청을 내 다른 시민단체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실제로 광장을 사용하는 일수는 적으면서도 공간을 미리미리 ‘확보’해놓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의 이러한 공간통제는 악법으로 거론되는 ‘집시법’보다도 더 강도가 높다고 한다.

역사 앞에 부끄러운

광장이란 이름의 공원은 싫다. 공원이면 공원이라고 해야 한다. 보수비 1억원씩 퍼붓는 잔디 걷어치우고, 차라리 적벽돌이라도 깔아달라. 서울시청 앞에서 여러 가지 집회도 하고, 시장님 듣기 불편한 소리도 하고, 시끌벅적 사람들이 이것저것 논쟁도 하고, 그런 와중에 서울시에서는 그런 말, 글을 귀담아 듣고, 더 좋은 정책도 내고 하는 것이 정말 건강한 모습 아닌가? 그런 소란스런 광장 하나 없는 서울시, 부끄럽지 않은가? 차량흐름 힘들여 걷어내어, 고작 시청 앞 잔디가꾸기에 정치집회 퇴출이라니. 아무리 푸르른 서울광장이라도,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공간이다. ●
[월간 문화연대]

- 통권 52호(2004년 8월호) 기획연재 기사들 중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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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따우님,


[감시와 처벌] 번역본이 잘 이해가 안되던가요? 번역을 평가해달라고 하시는 걸 보니 ...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나남)도 제가 강의에서 두 차례 사용한 적이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무난한 번역입니다. 그런데 3부와 특히 4부에서는 상당히 오역이 있더군요.

아시다시피 [감시와 처벌]은 17세기에서 18세기 말-19세기 초(푸코가 제일 좋아하는, 또는 제일 자주 다루는 역사적 시기죠)에 이르는 형벌체계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책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내용이 당대의 역사적 문헌들(푸코 역사 서술, 특히 [감시와 처벌]의 역사서술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대가들이나 유명한 저자들의 문헌들보다는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관공서의 문헌들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문헌들을 참고문헌들로 활용한다는 점이죠. 이는 푸코의 고고학, 또는 오히려 계보학이 드러내려는 인식의 층위가 공식화된 담론이나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그 아래에 위치해 있는 영역, 다시 말해 과학적인 담론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소하고 비과학적이고 매우 이질적인 이야기들, 문헌들이기 때문이죠. 푸코는 이러한 영역의 담론이야말로 과학의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조건들이지만, 동식적이거나 과학적인 담론에서는 배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지식의 형성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데 훨씬 적합하다고 보는 거죠)에 기초한, 역사적 변동과정을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것들이죠. 이런 내용들이야 번거롭긴 해도―왜냐하면 백과사전이나 기타 참고자료들을 자주 참고해야 하니까―번역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시와 처벌]의 1,2부, 또 3,4부에서도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서술 부분들은 번역이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3, 4부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이나 변동과정을 한참 서술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매우 일반적인 철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부분들 말이죠. 이런 내용들이 3,4부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3,4부가 다루는 시기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구요?

이 시기는 아시다시피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가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기이고, 대대적인 법적, 정치적, 행정적 개혁들이 일어났던 시기지요. 당연히 형벌제도나 형행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구요. 푸코 이전에 이러한 변화를 가리키던 일반적인 명칭이 있는데, 그건 인간화라는 것이죠. 형벌의 인간화, 행형제도의 인간화(또는 [광기의 역사]의 경우는 광인들의 인간화) 등등. 그리고 보통 이러한 인간화의 기초에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토대였던 [인권선언]이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평민, 예속자들이 [인권선언]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죄수나 광인 같은 사회의 배제된 주변인들 역시 [인권선언]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권리, 곧 인권을 보장받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감시와 처벌]이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이죠. 형벌제도나 형행제도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해서 급격한 단절을 보인 것도 아닐뿐더러, 그러한 변화의 양상이 구체제의 야만성에서 인권에 기초한 인간화로의 이행의 양상도 아니라는 것이죠.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은 사실은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푸코가 이 말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내 기억으로는^^)에 기초하고 있고 또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데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법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첫째,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자유로운 의지와 이성적 능력을 갖춘 존재이고, 둘째, 그들은 자유롭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국가를 구성하며, 다양한 대의 제도들을 통해 국가의 운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셋째, 모든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는, 국민들의 의사를 얼마간 대표하는 의회에서 공식적인 법률이 제정되고 이 법률에 기초하여 행정부서에서 각종의 제도적 절차들을 마련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 그리고 법적 이데올로기는 첫째,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왜곡할뿐더러, 둘째, 예속자들, 특히 수인들이나 광인들, 불량배들 같은 주변적인 존재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의 실제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보고 있지요. 푸코가 보기에 법제도는 사회적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진정한 원인은 미시적인 지식/권력관계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권력관계의 미시적인 상호작용이 어떻게 형벌체계와 형행제도를 변화시켜왔는지를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보여주려는 게 바로 [감시와 처벌]의 작업의 의미이지요.

이 작업을 통해 푸코가 밝혀낸 핵심적인 결과는 형벌제도와 형행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힘은 근대적인 규율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규율권력의 특징은 억압하고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목표에 잘 따르고 권력의 명령을 잘 이행할 수 있는 개체들, 곧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요. 다시 말하면 규율권력은 이 권력이 작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개체의 역량puissance―이 개념은 들뢰즈가 니체와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에서 매우 강조하는 개념이지요. 따라서 [감시와 처벌] 푸코의 분석은 그가 들뢰즈의 작업을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하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을 개체 자신(의 권한)으로부터 분리시켜(마치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상품화에 관해 말하듯이), 권력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들지요. 이처럼 사람들을 각자의 역량으로부터 분리시켜 권력의 목적에 순응하게 만드는 권력의 기술이 바로 규율입니다.

푸코는 이를 또한 예속화assujetissement의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따라서 푸코가 보여주고 싶은 점은 이거죠.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권선언]을 통해 사람들이 구체제의 야만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화, 또는 인간화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사실은 새로운 종류의 지배-종속관계가 실현되고 구체화되는 과정, 곧 예속화의 전개과정이다.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인간화, 자유화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의 실제적인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있다.'

이런 일반적인 철학적 테제들이 바로 3부 뒷부분과 4부 이곳저곳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번역본에는 이런 내용들이 제시되는 부분들에서 오역이 자주 보입니다. 특히 4부가 좀더 오역이 많지요. 제가 지금 책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예시를 해볼 텐데, 막연한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까 정확히 어떤 오역이 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네요. ^^;;;

그런데 이 책은 올해 초에 개역본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저도 개역본은 보질 못해서 이런 오역들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따우님은 아마 이전에 나온 판본을 보신 게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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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 ;;;

바람구두 2004-10-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는 보기 좋습니다만, 제가 질문 드려도 잘 답해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가을산 2004-10-0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맘 좋으시니까 추천이 많이 들어오네요. ^^

비로그인 2004-10-0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저도 추천!!

balmas 2004-10-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추천들을 많이 해주셨군요. 따우님의 인기의 영향인가요?^^
바람구두님, ㅎㅎ 무슨 질문을 하실지 겁이 나는데요 ...

비로그인 2004-10-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자하니 강원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 (박홍규)번역이 더 낫다고 해서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첫번째를 나남으로 읽어놔서... 이걸 별 불편없이 보았어요. 그리고 읽기엔 나남이, 나중에 읽어선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는 박홍규씨 것이 더 편했던 기억이..나남 개역판이 나왔군요.
저두 추천했는데, 여기엔 이런 정보를 더 자주 달라는, 시간없으셔도 좀 적어주시라는 주문의 추천이었음을... 헤헤헤... _(__)_

biosculp 2004-10-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 번역본은 불문학자가 강원대 본은 법학자가 번역해서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나겠죠.
근데 강원대 본은 절판이 되서

balmas 2004-10-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원대 출판부 판본은 책은 갖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
그 판본 번역이 더 낫다고요? 그럼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숨은아이 2004-10-0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언제 읽게 될진 모르지만 자료 삼아 퍼가서 간직하렵니다. ^^

balmas 2004-10-0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얼렁 읽을 기회를 얻게 되시기를 ...

모모 2004-10-1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홍규의 번역이 더 낫다고 들어서 그걸로 읽었었어요. 오생근의 번역은 읽지 못해서 무어라 비교하기가 힘들지만, 그렇게 아주 좋은 번역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의미는 정확하게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문장들이 거칠고 비문이 많았던 듯. 대신 역주가 꽤 많이 달려 있어서 도움은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듯.

balmas 2004-10-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모모님은 박홍규 교수의 번역본을 읽으셨군요.
저도 기회가 되면 한번 비교해서 읽어볼 생각입니다(오생근 교수 번역본은 개역본으로 한번 읽어봐야지 ...).
 

그렇지 않아도 두번째 글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처음과 끝님이 그 내용을 댓글로 달아주셨군요.^^

처음과 끝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는데, 막상 어떤 독자들은 그 책을 재미있게 읽고 또 나름대로 감명을 얻는 경우가 있죠. 저의 예를 하나 들자면, 88년인가 89년인가 김현 선생이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푸코가 60년대에 문학에 관해 쓴 이런저런 글들을 묶고, 김현 선생이 긴 해설을 붙인 책이었죠. 그 책을 읽어본 분들은 대개 공감하실 텐데, 푸코의 문학에 관한 글들은, 그가 나중에 쓴 글이나 책들, 특히 [감시와 처벌] 같은 책과는 문체부터 확연히 다르고, 내용들도 상당히 사변적, 철학적이죠. (푸코의 첫번째 주저, 그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1961)에는 그의 문학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사변적인 문체와 고고학 저술들에서 볼 수 있는 건조하고 담백한 문체가 모두 공존하고 있죠. 저는 그 점이 특히 매력적이더군요 ) 그래서 저는 당시에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이 책에 아주 매료됐었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푸코의 저작들을 이것저것 찾아 읽었고, 그래서 알튀세르와 푸코는 제가 제일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읽은 첫번째 프랑스 철학자들입니다(그 이전에 저의 철학적 영웅은 물론 루카치와 헤겔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그토록 매료되었던 푸코의 글들, 특히 바타이유에 관해 쓴 [위반에 대한 서언]이나 블랑쇼에 관한 글인 [한없는 언어] 그리고 몇몇 사변적인 글들은 어이없는 오역본들이더군요(^^;;;). 그 글들을 번역한 사람들은 김현 선생의 제자, 그러니까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소장 불문학도들이었는데, 푸코에 관해서는 그 책이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번역되는 책인데다가 매우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들로 가득 찬 글들을 소장 불문학도들이 제대로 소화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본다면 무리이겠죠. 그래서 좀 허탈하고 어이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에 강의를 하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수업교재 중 한 권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기말보고서를 발표할 때 보니까, 학생들 중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번역본을 참조해서 보고서를 쓴 학생들이 몇 있더군요. 앞의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국역본들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번역본들이어서, 들뢰즈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발표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니까 상당히 잘쓴 글들이고, 들뢰즈의 논의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학점도 잘 줬습니다.(^^) 처음과 끝님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번역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감명을 받고 또 내용을 어느 정도 잘 파악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우선 번역본의 번역 상태를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잘된 것보다는 잘못된 것들에 좀더 치중하게 되고,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검토할 때는 이 책이 원본에 나와 있는 저자의 논의, 그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지,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서 제시해주고 있는지 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원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된 한글 문장이 전달해주는 의미들을 쫒게 되죠. 이 경우 내용이 잘 이해되다가 어느 순간 잘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독자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가서, 다음 내용을 읽게 됩니다. 다행히 그 다음 문장이나 문단들은 내용이 잘  이해되면 독자는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계속 책을 읽게 되죠. 이처럼 독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나 문단, 내용들은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고 이해가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형편없는 번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그 책을 읽은 독자는 나름대로 책의 내용을 소화하고 거기에 감명을 받거나 실망하거나 자극을 받거나 혐오를 하게 되죠.

더욱이 형편없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장이 오역인 번역본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악의 번역본 중에는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이라는 책과 라비노우/드레퓌스의 [미셸 푸코](나남), 또는 존 레웰린의 [데리다의 해체주의](문학과 지성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절판이 되었지만 이 책들은 모든 문장이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지독한 오역 문장들로 가득차 있어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습니다(물론 모르고 읽었을 때는 책이 난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 -_-;;;). 이런 정도의 오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독자들은 이처럼 이해되는 문장들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책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따라서 번역본,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논증과 의미전달의 충실성을 염두에 두고 평가를 하는데, 독자들은 이를테면 번역본을 아포리즘과 같은 식으로 읽게 됩니다. 이 문장은 멋있군, 이 문장은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겠는데(문제는 나에게 있겠지만 ... ;;;) 이건 말도 안되는 문장인데, 반어법인가? 어 그래도 이 문장은 좋군, 말하자면 이런 식이죠. (가끔 알라딘 마이 리뷰에 보면 형편없는 번역본인데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식의 서평이 올라오곤 합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고 쓴 서평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 독자는 형편없는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고 실제로 무언가 의미있는, 감동적인 것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퍼즐맞추기에 비유하자면, 몇 개의 그림들이 빠진 상태에서 또는 잘못 맞춰진 상태에서 자신이 맞춰놓은 것만 가지고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의미 있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이끌어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번역본을 평가하는 사람으로서는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그 기준에 맞춰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지만, 독자들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어떤 의미있는 내용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사실 일반 독자들로서야 그 책을 완벽하게, 최선의 상태로 이해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는 거지요.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찾고, 또 즐길 수 있으면, 기쁘게 읽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죠. 하지만 연구자나 서평자로서는 독자들과 달리 그 책을 최대한 정확히, 최대한 완벽하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또 사실 그것이 바로 연구자나 서평자의 존재 이유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번역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는 그 평가대로 참조하시되, 자신이 그 책을 읽고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냈다,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하신다면 그걸로 만족하시면 될 듯합니다. 불만족이시라구요??? 그럼 이제 연구자의 길로, 고생문으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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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0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포리즘'으로 읽는다..... 제가 이렇게 읽는 것 같아 불만이었는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닌가보네요. (다행이다! ^^ )

balmas 2004-10-04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따우님,
얼렁 읽고 수업들어가셔야죠 ...
ㅎㅎ 가을산님,
그건 거의 전적으로 번역자들 책임이죠. 거의 모든 프랑스 철학자들을 아포리즘 작가로 만드는 것 ...

릴케 현상 2004-10-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가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재구성' 하는 독서 패턴을 정확히 지적하시니^^

balmas 2004-10-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많이 경험해봤거든요.

딸기 2004-10-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엉...
민음사 '앙띠 오이디푸스' 샀는데... ㅠ.ㅠ

balmas 2004-10-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딸기님,
아직도 그 책을 팔던가요 ...
그 책을 무리해서 읽으시면 철학에 대한 혐오와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공포감이
한층 더 강화되니까, 심신의 건강을 위해 아깝더라도 그냥 장식용으로 놓아두심이 ...
 

가을산님,

지난 번에 [시선의 권리] 마이리뷰에 댓글 달아놓으신 걸 봤는데, 이렇게 늦게 답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세하게 답변을 드리려고 했는데, 여건이 허락치 않아서 그냥 간단하게 몇 마디로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그동안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는 몇 개의 서평을 썼지만, 이런 류의 서평을 쓸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런 류의 서평이 혹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의욕을 꺾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지요. 사실 원서를 직접 접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데리다 번역이 형편없다더라, 들뢰즈의 어떤 책도 번역이 엉망이라더라, 지젝도 그렇더라더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책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까지도, 이 책의 번역이 엉망인데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읽은 게, 또는 읽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이런 류의 책들을 읽을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졸속 기획과 번역·출판을 일삼는 출판사와 역자들에게 돌아가야 하겠지만, 아직 우리 지식계에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적절하게 가려서 평가하는 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더 나아가 대중적인 수요에 비해 이를 감당해낼 만한 지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쉽지만, 당분간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불가피하게 반복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서두가 좀 길어졌는데, 가을산님의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두 가지 일반적인 조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가을산님이 질문하신 저자들 중에서 번역이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은 데리다와 들뢰즈 정도라는 점입니다. 가령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안티 오이디푸스} 최명관 옮김(민음사) 같은 책은 번역에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역자는 들뢰즈 철학을 거의 모르는, 원래 데카르트 철학을 공부한 분인데, 당시에는 연구자가 드물다 보니까 어떻게 이 책의 번역을 맡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은 품절되었고, 제가 아는 후배({천 개의 고원}의 역자이기도 하지요)가 지금 번역 중에 있는데, 역자의 능력으로 볼 때 훨씬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철학의 주사위} 신순범 옮김(인간사랑)이나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민음사) 같은 책들(이 두 권은 모두 Nietzsche et la philosophie(1962)라는 들뢰즈 책의 번역본인데, 앞의 경우는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고 후자는 불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은 {안티 오이디푸스}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번역에 문제가 있는 책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니체와 철학}은 니체 철학에 관한 매우 탁월한 연구서일 뿐만 아니라 들뢰즈 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합니다. 문체가 매우 탁월할 뿐만 아니라 아주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고 치밀한 논의가 일품이지요. 하지만 두 권의 번역본은 모두 들뢰즈의 문체나 논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아쉬운 일이지요. 

그리고 저는 번역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마이페이퍼를 보니까 {비평과 진단} 김현수 옮김(인간사랑)이라는 책(들뢰즈 생전에 나온 마지막 저서인데, 여러 개의 논문들을 모은 논문모음집입니다)도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민음사)의 경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하구요. 그리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권순모·이진경 옮김(인간사랑) 역시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국내에 번역된 들뢰즈의 저서들 중 태반이 번역에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반면 {차이와 반복} 같이 번역이 잘 된 책은 너무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사실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고, {천 개의 고원} 같은 경우는 번역은 괜찮은 편인데 다루는 주제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나 {프루스트와 기호들}, {카프카} 같은 책들은 좀 특수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또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들뢰즈의 {푸코}는 푸코에 관한 제일 좋은 연구서 중 하나이고 후기 들뢰즈의 문제의식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책이기는 한데, 제가 읽어본 번역본은 이전에 새길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뿐이고 얼마 전에 동문선(!!)에서 새로 나온 판본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새길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들뢰즈의 푸코})은 앞부분과 뒷부분을 둘이 나누어서 번역했는데, 번역의 질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권영숙 씨가 한 부분의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동문선에서 나온 판본은 출판사는 미덥지 않지만 역자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데,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콕 집어서 이걸 보시는 게 좋다고 할 만한 책이 없군요, 이런 ... -_-;;;

하여튼 번역의 질을 놓고 본다면, 이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에 입문하기에 괜찮은 책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라는 책(이전에 갈무리에서 나온 {들뢰즈의 철학사상}이란 책의 수정·증보판입니다)입니다. 이전에 번역된 {들뢰즈의 철학사상}은 들뢰즈의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의 사상을 해설한 책인데, 새로 책을 내면서 들뢰즈의 사회정치사상을 추가해놓았더군요. 하트는 아시다시피 네그리와 더불어 {제국}을 공저한 사람으로, 출중한 이론적 능력을 지닌 젊은 이론가인데, 이 책도 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 동문선(!!!)에서 알베르트 괄란디라는 프랑스의 소장 철학자가 쓴 {들뢰즈}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분량은 적지만, 매우 체계적이고 요령 있게 들뢰즈의 철학사상을 설명해놓은 좋은 책입니다. 번역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들뢰즈의 철학을 소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글쎄요, 저도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번역본을 사기가 좀 겁납니다. ;;;

2편은 다음에 ... (죄송. 제 노트북이 고장나서 당분간 인터넷을 오래 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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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욕이 꺾이는 건 사실인데,
어렵지만 잘 읽었다고 생각이 되는 책이 '번역이 엉망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난감해지죠.
아니, 분명히 제대로 읽었는데, 엉망이란 말야? 그럼 이럴 때는 어쩌면 좋죠?
이미 번역된 엉터리 글에 중독된 건가요?
그리고 그런 책으로 리포트를 쓰고 또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면, 그 평가내리는 분도 번역이 잘못된 책을 읽고 잘못 평가...?
뭐, 그렇다면 이놈의 번역된 책들을 읽고는 공부하는 게 불가능?
어, 그러면 외국어를 제대로 하는 게 없으면 공부는 하지 말라는 말씀?
...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죠.
어떻게 된 건가요? 이런 사태는.
갸우뚱.

가을산 2004-10-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balmas님 고맙습니다!
적어도 조심해야 할 번역본, 조심해서 골라야 할 저자는 알게 되었네요.
영어책인 경우는 갑갑하면 원서를 사서 어찌어찌 읽어볼텐데,
불어는 완전 까막눈이라 번역서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정말 고맙구요, 언젠가 있을 2편도 기대하겠습니다. (한참 후라도 괜찮습니다.)

starrysky 2004-10-04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balmas님. ^^
괜찮으시다면 이 1편과 위의 2편을 제 hidden category로 퍼가고 싶은데,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almas 2004-10-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starry님 뭘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
hidden category라고 하시니까 왠지 영광스러운 기분.^^;;

starrysky 2004-10-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락 감사합니다. 고이고이 접어서 잘 들고가, 제 비밀 목록 안에 잘 펼쳐놓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