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서울광장, 부끄러운 곳

오성훈
공간연구집단 연구원


밀려드는 차량의 매연과 소음은 지나가는 보행자를 답답하게 하고, 커다란 교통광장을 둘러싼 가구(블록)들은 칙칙한 지하도로만 연결되어 있던 곳이 분수와 잔디가 어우러지고, 지상의 횡단보도로 연결된 곳으로 바뀌었다면 누구나 환영할 것이다. 더구나 고궁과 산을 제외하고는 버젓한 녹지하나 없는 서울의 도심이라면 그 기꺼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도심의 차량교통속도와 같은 ‘수량’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우리도 이런 것좀 해보자는, 환경의 ‘질’에 대한 고려가 그 바탕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창한 여름날 시원한 녹지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바라보면서도 시원하기는커녕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네 마음가짐이 아직은 저런 고운 것을 즐거워하기엔 촌스럽기 때문일까?

서울시가 마련한 시청 앞 광장 홈페이지를 가보면, 광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하면서 옛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부터 시작하여 신성과 이성 등의 흐름이 광장이라는 공간에 면면히 담겨져 왔음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맞다. 광장은 저 들판 한복판에 자리잡은 휑뎅그레한 공간과는 다르다. 동일한 크기와 질감의 공간이라도 도시 한복판에 들어섬으로써 다른 효과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효과와 의미는 도시의 고유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 시청 앞 광장의 홈페이지의 설명이 단순한 구색맞추기가 아니라면, 광장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시청 앞 광장에 담았을 게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좀 다른 것 같다.

광장과 공원

광장은 공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장은 정치적인 논쟁을 벌이는 곳으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으로서, 아니면 전제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서 기능하였고, 광장이 위치한 도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경제적 수준, 문화적 위상을 나타내는 재현적 공간이다. 광장의 속성은 사적이기보다는 공적인 것이고, 사색과 휴식보다는 논쟁과 협상에 걸맞는 곳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공원은 사적인 향유를 그 전제로 하는 공간이며, 사적 향유에 장애가 되는 것은 최대한 배제하게 된다. 그렇다. 그 이름이 광장이면 어떻고, 공원이면 또 어떤가. 광장이라고 이름 붙인 공원도 있을 법한데, 시청 앞의 공간은 광장으로 꾸밀지 공원으로 꾸밀지조차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다. 즉 애초의 명칭은 광장이었으나, 서울시 일꾼들의 머리에는 어느 새 공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경비를 들여 설계공모전까지 개최한 후 선정한 시청 앞 광장 설계안 ‘빛의 광장’안에 따르면 시청 앞 광장은 조명시설이 갖춰진 높이 15m의 기둥, 음악에 따라 물을 내뿜는 분수, 2300개의 액정장치(LCD)모니터가 설치된 바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설계는 기본적으로 많은 인구가 이용할 수 있고, 정보전달체계가 갖추어짐으로써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공적인 의사소통체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광장’설계안은 곧 ‘공원’화된다. 10개월에 걸쳐 추진하던 원 설계안이 잔디광장으로 급작스레 바뀐 것이다. 이를 결정한 ‘시청 앞 광장 조성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시 측에서 5월에 열리는 ‘하이서울’ 축제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빈땅에 잔디라도 깔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울시는 ‘빛의 광장’ 공사비가 103억에 달하고 잔디광장은 40억이면 조성할 수 있어 시기상조인 안을 선택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기상조인 안을 당선작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것을 승인한 사람, 또 손바닥 뒤집듯 바꾼 사람은 누구인가? 시말서라도 써서 시민들 앞에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청 앞 광장 홈페이지에 가보면 서울시에서는 ‘2004년 5월 개최예정인 Hi Seoul Festival 행사 대비하여 4월까지 Open Space 형태의 광장을 조성하고, 당선작 작품의 시행은 일단 유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03억이 드는 광장을 결국 조성할 계획이라면 무슨 잔치마당 하나 때문에 40억짜리 공사를 임시로 가설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거기에 10억원 정도로 추산되는 설계, 공사업체에 대한 위약금도 물어줄 판이라고 한다. 하이서울페스티발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잔치마당의 개최시기는 몇 십억을 들여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하늘에서 절대절명으로 점지라도 해준 것인가?

‘들어가지 마시오’

잔디광장 안은 결국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을 광장아닌 공원으로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과연 그곳에 광장이 필요한지, 공원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슬그머니 공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잔디‘광장’은 지나치게 밟아서는 안되고 아름다운 상태로 보존해야 하므로, 거기에 따른 통제가 필요하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딱딱한 말, 또는 굳은 표정의 용역경비원들이 따라나온다. 잔디보호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통제가 개입되자, 그 통제는 ‘광장’이용의 허가를 서울시에서 가져가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이제 시청 앞 광장은 서울시장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모임은 가지기 어려워진 것이다. 의견수렴없는 비민주적 절차를 통해 실현된 광장설계안은 부적절한 통제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통제의 기준은 모호하다.

지금의 모습처럼 잔디가 깔리고, 물이 흩날리는 공간도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의 역량에 따라 공적인 공간으로 전화될 수는 있다. 그러나 공간의 물리적 배치 또한 일정한 의도, 또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밟으면 죽게되는 잔디를 유동인구가 상당한 고밀도의 도심의 보행자 공간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 목가적인 환상에 가깝다. 서울시는 집회 등으로 잔디가 손상될 경우, 그를 돈으로 물어내라고 조례를 제정하였다. 허가를 받을 경우에도 면적당 사용료를 내야 한다. 도시에서 누군가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무리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돈만 내면 누구나 집회를 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서울시는 정치적 집회는 원천적으로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열린 음악회나 축구경기 응원에는 허용한 잔디밭을 6월항쟁 기념행사에는 제한했고,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의 문화제는 ‘문화제를 가장한 정치적 집회’라며 미신고집회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거기에 새마을운동 서울시회, 자유총연맹 서울시지부,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협의회 등이 5, 6월 두달 내내 사용신청을 내 다른 시민단체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실제로 광장을 사용하는 일수는 적으면서도 공간을 미리미리 ‘확보’해놓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의 이러한 공간통제는 악법으로 거론되는 ‘집시법’보다도 더 강도가 높다고 한다.

역사 앞에 부끄러운

광장이란 이름의 공원은 싫다. 공원이면 공원이라고 해야 한다. 보수비 1억원씩 퍼붓는 잔디 걷어치우고, 차라리 적벽돌이라도 깔아달라. 서울시청 앞에서 여러 가지 집회도 하고, 시장님 듣기 불편한 소리도 하고, 시끌벅적 사람들이 이것저것 논쟁도 하고, 그런 와중에 서울시에서는 그런 말, 글을 귀담아 듣고, 더 좋은 정책도 내고 하는 것이 정말 건강한 모습 아닌가? 그런 소란스런 광장 하나 없는 서울시, 부끄럽지 않은가? 차량흐름 힘들여 걷어내어, 고작 시청 앞 잔디가꾸기에 정치집회 퇴출이라니. 아무리 푸르른 서울광장이라도,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공간이다. ●
[월간 문화연대]

- 통권 52호(2004년 8월호) 기획연재 기사들 중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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