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게시판에 실린 이병창 교수의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그 영화가 정말 보고싶군요. 어떻게 볼 수 있는 길이 없을까 ...

 

1. 냄비를 두드리며

 

이 선생, 오래 만이야, 이젠 나를 찾아 주지 않는군.
아, 교수님, 부산에 국제 영화제 한 거 아시죠? 그거 구경 다니느라고, 정신 없었어요.
아, 자네야, 영화 팔아먹고 먹고 사니까, 그만한 수고는 해야겠지? 그래 재미있는 영화 있던가? 뭐, 빈집이라고 해서 김기덕 감독 영화 얘기가 신문지상에 떠돌던데? 보았던가?
그걸 보긴 했는데, 약간 실망했어요. 김 감독의 영화가 너무 청초(?)해져서, 이게 그 사람 작품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코가 말하는 감시의 눈을 피해 거기서 사랑과 자유를 회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무척이나 좋았어요.
하지만 이런 작품 가지고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받는다면 아마 우리나라 영화감독 가운데 감독상 받을 사람은 앞으로도 부지기수일거예요.
근데 이번 영화제에서 인상 싶었던 건,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이 만든 영화 ‘사회적 학살’이었어요. 영화보고 눈물 흘리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니까요 거리에 민중들이 모여서 냄비를 두드리면서 시위를 벌리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니까요.
음, 그럼 어디 그거 얘기해 보게. 제목이 사회적 학살이라? 그럼 또 아르헨티나에 군부 구테타가 난건가?
그건 아니고, 배신에 관한 이야기예요. 정치가의 배신, 말입니다. 영화는 다큐멘타리예요. 주로 1989.7.8 부터 한 십년간 (97.10 까지) 아르헨티나를 통치했던 페론주의자 (거기선 정의당이라 부르는데), 메넴을 다루고 있어요.
그가 배신자란 이야기 인가?
예, 영화에서 메넴은 대통령 당선 전까지 구레나루를 기르고 있었는데, 당선 뒤 6일 만에 전격적으로 그 구레나루를 깎고 나온 모습을 보여줘요. 그게 바로 배신의 상징이었다는 거죠.
글쎄, 구레나루 깎는 게 배신인가?
아니, 참, 그 때 메넴은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재벌이며 외국자본 회사의  회장하고 같이 TV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 회장을 경제장관으로 임명하죠. 그리고 둘이서 경제개혁을 위한 긴급조치들을 발표해요.
아이구, 갑자기 머리 아파지려 하는데, 그래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제가 하도 충격을 받아서, 이 새끼들 두고 보자 하면서 이를 악물고, 며칠 동안 정신없이 아르헨티나 문제를 다룬 글들을 찾아 읽었다니까요? 그 중에 이성형이 쓴 논문 ‘민선정부 하의 경제정책; 알폰신 정부의 아우스트랄 계획에서 메넴 정부의 경제개혁에 이르기까지’가 가장 잘 된 거 같아요. 관심 있으면 교수님도 한번 읽어 보세요.
이 나이에, 그걸 읽으란 말인가? 이 선생이 요령껏 알려 주구려.
글쎄요? 제가 이 분야에는 천박해서. 그래도 핵심은 짐작가는 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여튼, 그래요. 즉 , 뭐라 할까? 음....그 새끼가 나쁜 놈이라는 거죠.
그니까 그 새끼가, 민중의 기대를 업고 대통령으로 당선돼서 선포한 정책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거예요. 그거는 뭐냐 하면, 우선 외채를 국내 기업에 대한 투자 자본으로 전환시킨다는 거죠. 그리고 국내 기업을 팔아서 외국자본에 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돈으로 외채를 갚는 거죠. 근데 국내 기업을 아주 싼 값으로 팔아치우는데, 뭐 거의 10분의 1 수준이라나요.  그 나라 알짜 국영기업들이 모두 넘어갔는데, 가장 큰 게 석유회사하고 가스회사랍니다. 그리고 통신, 항공기 등등 공익을 위한 국영회사까지 싸그리 팔아 넘겼다더군요.
여기에 정치가가 엄청난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거죠. 그게 대부분 메넴과 그 주변 지지자들, 심지어 그를 노조지도자들 손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이미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 되었는데, 표면상은 민중주의의 지도자이고, 노조지도자이어서, 그 새끼들 때문에 민중주의와 노조가 욕먹는다는 게예요, 에 나쁜 새끼들
물론 여기에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는 거대한 대농장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고리대 자본을 관리하는 은행들 역시 외국계 자본과 외국계 은행과 더불어 이런 민영화 정책에서 한 몫 챙겼다는 거죠.
근데 주요한 거는 그 걸로도 외채를 다 못 갚아서, 부채는 더욱 늘어만 간다는 거예요. 이젠 외채를 빌려서 그 이자를 갚아도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나라 망하는게 하루 아침이예요. 그 놈들 모여가지고 나라를 베껴 먹는 거 보면, 정말 몸서리치겠다니까요. 남의 나라 얘기 같지 않아요.
음, 근데 그 나라의 외채는 왜 그렇게 많아?
이번 영화에서 감독 솔라나스는 그 외채란 외국계 기업이 진 것인데, 그걸 국가가 인수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적으로 말한다면, 그 외국계 자본의 모 회사가 그 부채를 인수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제가 조사해 보니까 83년 까지 군사정부 시절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군요.
거 참 잘 이해 안 되는 군. 그냥 파산시키면 되지 않았나?
글쎄요? 그렇게 되면 은행이 무너져서, 경제혼란에 이를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 정확한 이유를 몰라서 제가 공부 좀 했다 하잖았어요.
근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하여튼 그 나라 정치와 경제를 연구해 보니까 아주 재미있었어요.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더라니 까요.
그러니까 원래 이 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대 농장주가 지배하는 사회예요. 그리고 스페인계 이주 농업노동자가 그들을 뒷받침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죠. 그런데 대 농장주는 곡식과 고기를 해외에 내다 팔았는데, 그 수출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은행에 집어넣고 국가에 빌려줘서 국가를 뜯어 먹었다는군요. 당시는 주요 생필품을 국내에서 생산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나요. 그냥 외국에서 싼 값으로 사서 살았대요. 정치는 군 귀족과 이들 농장주의 과두적 정치였대요.
그런데 1943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죠. 이 쿠데타를 주도한 장교들은 군 내에서는 하급에 속하는 대령급이랍니다. 여기에 페론도 가담하는데, 그들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이런 식민지적 농산물 수출경제 체제에 대신해서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한답니다. 그래서 주요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생산하는데, 여기서 많은 노동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대요.
이때 페론 등은  곡물 수출세를 부과해서, 이 돈으로 산업과 노동자를 동시에 보호해 주었다 해요. 이런 정책은 농장주에겐 불리한 정책이지만 산업 부르주아지와 민중에겐 아주 인기있었다 하죠.  바로 이걸 페론주의라 한답니다.
이런 페론주의는 50년대 군부 독재 시절  다시 후퇴했다가, 50년대 중반 부활되어서 70년대까지 지속되었답니다. 바로 이때 아르헨티나는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선진국 문턱까지 이르렀다는 거예요.
어 그런가? 그런데 사람들은 남미의 페론주의 같은 민중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사실은 군부독재자들과 외국자본 및 대 농장주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해요. 근데 교수님 이 얘기 너무 길죠? 다음에 또 할까요?
그러구랴. 난 긴거 싫어. 그럼 다음에 또 보세.

 

2. 외채 자동 제조 기술

 

이 선생, 지난 번에 솔라나스 얘기하지 않았나? 그때 페론주의를 찬양한 거 같은데?
아니예요, 교수님, 제가 페론주의를 그 자체로서 찬양하는 건 아니예요. 페론주의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주장을 비판할 뿐이죠. 사실 아르헨티나의 근본 문제는 소수 농장주의 대농장 소유제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들?거기서 나온 이익을 해외에 빼돌리거나, 은행을 통해 국가나 산업에 고리대 놀이를 하면서  부를 증식하니까. 그걸 몰수해야 해요. 그런 근본 문제를 내버려 둔 어떤 시도도 구멍 뚫린 독에 물 붙기와 같죠. 그건 페론주의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예요. 그데 오직 페론주의에 책임을 전가하는 거는 웃긴단 말이죠.
하여튼 페론주의의 결과  기업은 정부의 보조를 얻어서 성장했지만 국내 시장에 바탕을 둔 이런 산업이 일정한 한계에 부딪히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원래 재정적자는 기업의 확장과 일자리 증가에 의해 세금이 추가로 걷히면서 해결되는 건데, 기업의 성장이 멈추게 되니까, 고스란히 적자로 남게 되죠. 정부의 재정적자가 점차 심각해졌어요. 하는 수 없이 통화를 증발했고, 거기서 인플레이션이 출현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게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 많았던 거는 아니었답니다.  그니까 페론의 민중주의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거는 잘못 알려진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정부가 민중을 지원하는 정책만 내 놓으면 팝퓰러리즘이다 해서 비난하는데, 전 막연히 그렇게만 알았는데, 이번에 솔라나스 감독의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의 영화는 저한테는 정말 많은 깨달음을 준 영화였어요. 영화의 힘을 느끼겠다니까요. 그의 영하는 주로 몽타쥬 기법을 이용해서, 대조를 통해 사물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했죠. 더구나 카메라를 현장으로 끌고 들어가 현장 속의 인간을 클로즈업 했어요. 우리나라엔 왜 이런 영화가 없을까요?
자네가 만들어 보게나.
하여튼 교수님, 진짜 나라를 망하게 한 놈들은 누군지 아세요? 그건 바로 7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이른바 지배층 연합이었다니까요. 그 놈들이  페론주의의 팝퓰러리즘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악쓰고 다닌 거예요. 진짜는 자기들인데 말이예요.
어, 그래? 왜 그런가?
76부터 83년까지 군부독재가 들어섰어요. 군사정부는 페론주의가 추진한 수입대체 산업을 통한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자, 외국자본의 직접 투자를 허용하기 시작했답니다. 수출산업화 하려는 거였죠.  이런 수출산업화는 우리나라에서 박정희가 시도했던 거와 같아요. 근데 실패로 돌아갔어요. 정부는 노동운동을 탄압해서 이들 외국 자본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경쟁에서는 버티기 어려웠단 거지요. 그보다 싼 값으로 승부를 던지는 한국 등 아시아 자본 등이 있었기 때문이예요.
결과적으로 이런 외국 직접 투자회사는 부실로 빠지게 되었고, 이들에게 투자한 외국계 은행 역시 부실화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결과 군사정부는 외국은행 및 외국자본의 압력 때문에 부실회사의 외채를 인수했다는 거죠. 그걸 외채의 국유라 한데요. 웃기죠?  외채의 국유화라니? 외채 문제의 진정한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대요. 그게 바로 솔라나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 같아요. 영화에서 솔라나스는 국제 경쟁에서의 패배 못지않게 외국자본에 의해 세워진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의 책임을 묻고 있어요. 모회사에 이익은 빼돌리고 부채는 자회사에 남겨 놓을 수 있잖아요?
음, 외국자본이 제3 세계의 외채 문제를 만든다, 거참 신기하네. 거 뭐랄까 외채 제조 자동기계라 하겠네
그래요, 교수님, 이렇게 외채가 만들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IMF를 중심으로하는 홀딱 벗기기 게임이 시작된 거죠. 근데 웃기는 거는 이 나라는 엄청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였다는 거죠. 난 그것도 몰랐어요. 이 석유 수입에다, 기왕의 곡물과 고기 수출로 번 돈이면 그 많은 외채를 지금이라도 간단하게 갚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돈들은 이제 모두 소수의 대농장주와 외국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어서, 모두 해외로 빼돌려 진다는 거죠. 그리고 그 모든 외채는 국가가 갚아야 하는데, 결국 국가는 국내의 기업과 민중을 우려내어서 그걸 갚는다는 거죠.
메넴 정부는 민영화 정책뿐만 아니라 태환법을 실시했대요. 군부독재 시절 국내 산업이 무너지게 되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것이 외환위기와 겹쳐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거죠. 이걸 막으려고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통화인 페소화를 달러로 자동으로 교환해주는 건데,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페소화를 고평가했다는군요. 인플레이션은 막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페소화를 가진 국민들에게 당장은 큰 이익이죠. 또 외국에서 값싼 물건들이 마구 들어오니까, 국민들은 신났어요. 흥청망청 써 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메넴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지지했다나요.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죠. 그나만 남아있던 내수산업은 완전히 도산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흥청망청 쓰던 거도 한철이었어요. 곧 국내 산업이 이제 공동화되니까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게 되고, 빈곤과 절망이 나라를 휩쓸게 되죠.
결국 1997년의 선거에서 중도연합에서 승리하는데, 중도연합이란 대농장주의 정당이예요. 특히 蓚耽〉?및 중산층의 세력이 메넴 정부에 대해 이반한 거죠.
음, 그렇게 되었군.
그런데 그럼 냄비를 두드리던 시위는 언제 일어난 거야? 메넴 정부시절이었나?
교수님, 웃기는 거는 메넴 정부의 속성에 대해 민중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고, 그래서 그의 배반을 몰랐다는 거예요. 전 이거 생각하면 너무 걱정돼요. 혹 우리가 지금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말이예요.
시위는 오히려 중도연합 정부에서 예금인출 제한조치를 취하자 일어났어요. 산업 공동화로 인플레이션이 증가되고, 외환 위기가 이를 더욱 강화하고, 결국 정부도 더 이상 태환제를 고집하기 어려웠어요. 그러자 그동안 달러로 저축해 두었던 중산층 시민(연금 및 봉급생활자)은 예금을 인출해서 달러로 바꾸려 했죠. 그러니까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제한한 거예요. 결국 정부는 희생을 중산층 시민에 전가하려 했던 거죠. 바로 이 때문에 중산층 시민이 들고 일어났고, 여기에 일자리 없는 민중, 정부의 긴축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가담해서 혁명이 일어난거죠.
이성형의 논문은 메넴의 개혁(? 항상 어느 시대나 보수주의자조차 자기를 개혁이라 이름붙인다) 당시 쓰여 진 건데, 그는 그것의 결과를 예측하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면, 그가 예측한 대로 되었어요.
음,근데 사회과학이 거 정말 어렵구나.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렇죠. 저도 한때 공부했는데, 그래도 아무래도 전고이 아니라서 설명을 잘 못하겠군요.
근데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아르헨티나를 언급한 거는 이게 우리나라 현 처지와 같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래요. 우리나라에도 외국계 은행에 외국계 자본이 지금 설치잖아요. 이 놈들이 서로 짜고 우리나라를 벗겨먹을 궁리하는 거 아닐까요? 그 방법은 간단하거든요. 외국계 자본이 외국계 은행에 돈을 꾸어서 이익은 모회사로 손해는 자회사로 정리해 두면 되거든요. 국가는 울겨 겨자 먹기로 그런 기업의 외채를 인수해야 해요.
글쎄, 내가 어찌 알겠나. 근데 난 그게 걱정이 아니라, 난 우리나라 대자본이 지금 외국에 가서 그 나라 벳겨 먹으려 궁리하는 게 아닐까? 그건 괜찮은 걸까? 남한테 뺏기면 몰라도 뺏아 오는 건 잘 하는 거 아닌가?
교수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아시죠? 거기서 북을 두드리면서 다가오는 파시즘을 경고하는데, 이번에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냄비를 두드리면서 국제자본의 벗겨먹기를 경고하던 거 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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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10-1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저도 보고 싶어지는데요?
어제 TV에서는 체게바라의 남미여행을 찍은 영화소개를 해 주더군요. 그새 제목은 까먹고 개봉하면 꼭 봐야지, 생각만 했습니다.

balmas 2004-10-1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그렇죠, 보고싶으시죠?

릴케 현상 2004-10-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글을 재밌게 쓰시네요 추천한 줄 모르고 또 추천하려 했넹
 
 전출처 : 릴케 현상 >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

한겨레

2004. 10. 16. 토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

 

 이제 강남은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이 되었다.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로 강남 외의 대한민국 모든 지역의 학생들은 강남으로 이사 가지 못하는 부모의 경제적 무능력을 한탄하게 되었다. 홍길동은 근본천생의 처지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의적이 되었지만, 고교등급제를 바라보는 오늘의 학생들은 ‘사는 곳이 지위를 말해주는’ 이 현대판 신분제 아래서 장차 어떤 한을 품고 살아가게 될까?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의 차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자는 주장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강남 고교에 입학하여 결국 수시모집에 탈락한 부모와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도 결과의 차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수시모집에서 탈락한 비강남 지역의 학생이 만약 합격하더라도 대학 4년 동안 합격한 학생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곧, 현재의 차이가 기회의 제한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능력에 의한 것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기관의 임무는 현재는 좀 모자라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발굴하여 특유의 교육방법을 통해 인재를 만들어 내는 데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이미 만들어진’ 성적에만 집착할 뿐, 어떻게 기를 것인지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수능성적이 사실상 대학 서열인 현재 한국의 실정이 바로 ‘대학 경쟁력’을 저하시킨 주범인데도 여전히 ‘일류대학’들은 교육보다는 입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물론 대학이 사회적 불평등까지 고려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명 대학의 입시는 모든 학부모, 나아가 온 나라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신호체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변별력 없는 제도 때문에 ‘좋은 학생’ 못 뽑는 몇 대학의 손해는 그들의 이기적 행동으로 인한 국민적 혼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좋은 대학’ 가는 것이 계층 상승의 관문이며, 대학입시가 초등학교 이후 모든 교육을 지배하는 한국에서 ‘내신 부풀리기’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오히려 대학은 나름의 기준으로 ‘성적 부풀리는’ 고교와 교사들에게 벌을 줌으로써 교육 정상화에 기여해야 할 책무가 있다.

 하기야 일각의 주장대로 본고사를 부활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입시를 둘러싼 골치 아픈 논란에는 마침표를 찍겠지만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대안이다. 고대반, 연대반의 간판을 단 사설학원과 과외의 창궐만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학교교육을 완전히 입시교육으로 일색화하고 학생을 완벽한 시험기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본고사 부활론은 입시의 편의만 고려될 뿐 교육에 대한 비전과 철학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제도가 문제가 많음을 인정할 수 있고, 우수한 학생 뽑겠다는 대학의 욕심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우수함’의 기준이 여전히 점수로 환산될 수 있고 표준화될 수 있는 ‘성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이들의 요구는 선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 식민지와 개발독재 시절의 것이고 따라서 그 시절에 ‘공부 잘했던’ 사람들의 향수가 오늘 이 시점 경쟁의 이름 아래 평준화 폐지, 본고사 부활론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이 문제 해결에 마지못해 나서는 교육부의 철학 부재를 한탄한다. 고교등급제 불가피론을 내세우는 오늘 한국사회의 엘리트 집단의 머릿속에 과연 ‘일류대학’을 못 가는 95%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있을까? 아니, 진정으로 21세기에 필요한 우수한 인재, 그들 말대로 ‘국가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인재에 대한 상이 있는 것일까? 우수학생을 독점하고 싶은 ‘일류대학’ 당국에 묻는다. 입학 후 4년 동안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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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주노동자 '반한활동' 기준 뭔가

[경향신문 2004-10-15 22:21]

 

[사설] 이주노동자 ‘반한활동’ 기준 뭔가

얼마전 국내에서 반한(反韓) 이슬람 단체가 적발됐다는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파병 이후 이슬람 과격단체의 한국인 테러 경보가 여러차례 울렸던 상황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 안에 테러리스트를 품고 있었으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감과 경각심이 불쑥 솟아난다.

 

국가정보원·법무부, ‘반한 단체’ 를 공개한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 이를 부풀린 일부언론은 의도했던 안했던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녀사냥이나 다름없다.

방글라데시인 모임이 왜 반한 단체인지, 한국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비자를 달라고 호소하는 게 왜 반한 활동인지, 이슬람사원에서 만난 사람끼리 모금해 모국의 정당에 송금한 게 왜 그렇게 큰 잘못인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반한 단체 핵심조직원 3명 검거, 나머지 조직원 잠적’으로 요약된 채 세상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불법이주자라고 추방반대시위를 ‘반한 활동’으로 규정, 범죄자 취급해서는 안된다. 최근 한 중국인 노동자는 체임을 요구하다 사장의 고발로 추방될 운명에 처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그도 반한 인사인가. 불법 체류자를 마녀로 만들면 그들을 추방하는 일이 조금 수월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이 땅을 찾아온 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법적 지위가 불법일 수 있어도 그들의 인생은 불법이 아니다. 누구도 그들의 인생, 그들의 행복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정부당국이 그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차별과 멸시가 횡행하는 이런 대한민국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그런 한국이라면 정말 우리 모두가 나서 ‘반한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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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P? 우린 '국민총행복'을 믿는다

작은 왕국 부탄의 의미있는 정책, 그리고 자존심

 

지오리포트 <georeport@georeport.net>
          
GNP 몇 만 달러, 국가경쟁력 세계 몇 위,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 세계가 각종 지표와 산술로 국가간 서열을 매기기에 분주한 사이,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당신들은 행복한가요?"
최근 러시아 언론 <엔떼베(NTV)>는 '국민총생산을 국민총행복으로 바꾼 나라(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행복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번역기사)'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부탄이 '국민총행복'이란 지수를 토대로, 공동체의 '진정한 삶'을 꾸려가려는 의미있는 '실험'을 다루고 있다. 부탄은 왜 GNP란 지수를 버렸을까? 기사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편집자>



▲ 부탄 어린이들의 해맑은 미소.
출처 www.newsru.com  
아시아의 한 작은 왕국, 부탄은 GNP(Gross National Product,국민총생산)라는 지수를 쓰지 않는다.

국민총생산보다 이 나라에 더 적합한 지수를 부탄은 도입했다. 바로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 총 행복)'이다.

5년전 타쉬 반기얄씨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캐임브리지 대학 철학 석사학위, 예쁜 여자 친구, 런던 컨설팅 회사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그러나 반기얄은 세상과 동떨어진 부탄에서 120달러를 받는 직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반기얄씨의 대학 동기들, 특히 외국에서 고소득의 직장을 찾는 것이 꿈인 인도나 네팔 친구들은 이 부탄 친구의 결정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다른 부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행복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그럴수록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반기얄씨는 말한다.

부탄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지만 해외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 거의 전부가 고국으로 되돌아 온다. 이유는 한가지다. 부탄의 정부는 국민보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쓸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부탄의 정부는 '일반적인 발전'의 지표가 되는 국민총생산을 새로운 모델인 '국민총행복'으로 대체해 전 세계의 경제 연구소, 연구자들로부터 이목을 끌었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규정하기는 물론 어렵지만 부탄에서는 자연자원의 보호부터 민족문화의 선전, 민주적 행정 체제까지 국민 행복에 밑받침이 되는 모든 것들을 '국민총행복'에 포함시키고 있다.

"부탄은 행복을 국가의 발전 전략으로 세우는 매우 드문 나라입니다. 어쩌면 유일한 나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탄 사람들은 장기간의 사회적 건강을 위해서 눈앞의 이익을 희생합니다."
삶의 질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애틀랜틱 GPI의 회장인 론 콜먼씨의 말이다.

물론 포괄적인 충족감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복리만으로 '복지'를 평가하는 것에 의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부탄만은 아니다.

국제 사회과학자 그룹 '세계 가치 조사'는 지난해 세계 각국을 행복의 순위로 매긴 바있다. 여러 가치와 믿음이 한 나라의 정치, 사회에 반영되는 정도를 여러 질문을 통해서 분석한 이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나라 1위로 나이지리아가 꼽혔다. 미국은 16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일리노이대의 애드 다이너 심리학 교수에게 국민 복지 지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텔레비전의 한 구석에서 다우 존스의 지수와 함께 보여질 수 있는 지수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행복과 복지의 관계를 연구해 온 다이너 교수는 사회가 일정 정도의 복지 수준에 도달하면 수입은 더 이상 삶의 만족감을 주는 지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신 건강은 통장 잔고 등보다는 인간 관계, 작업의 만족도, 끊임없이 할 일이 있다는 것, 인권, 민주적인 제도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신적 복지는 부탄의 국왕 드룩 기얄로 지그메 싱기예 왕축이 1972년 왕위에 오른 이후 신민들을 위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다이너 교수와 마찬가지로 국왕은 국민총생산의 대체 지수를 오랫동안 탐색해 왔다.

국왕은 국내총생산이 한나라의 진정한 부와 큰 관계가 없으며, 진정한 지도자란 물질적 복지뿐 아니라 정신적 만족감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이 부탄에서 공식적으로 다듬어진 것은 지난 1998년의 일이다. 그때 국왕은 국무총리인 리온포 쥐그미 틴리에게 '행복의 네 기둥' 이라는 정부의 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네 기둥이란 안정적인 경제 발전, 자연 환경의 보호, 민족 문화의 증진과 좋은 통치를 일컫는다. 틴리 총리는 이 네 기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성공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우선 총 인구수가 828,000명인 작은 왕국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이 개혁의 구도에 의하면 보건, 교육, 사회 경제 분야의 서비스가 다른 분야보다 우선시된다. 이 목적에 따라 국가 예산의 25퍼센트 이상이 병원과 학교에 배분되었다.

두번째 기둥인 자연 환경의 보호 역시 국가 성장 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탄은 외국 자본에 문을 활짝 열거나 천연 광물들을 팔아 넘기지 않는다. 비가공 원목의 수출을 금하고 입국 관광객 수를 연 6천 명으로 제한함으로써 투자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지만 자연 환경은 천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다.

세번째 기둥인 문화 지원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 국민이 종교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 이 계획의 하나다.

마지막 기둥은 좋은 통치이다. 1998년 국왕은 민주주의를 가속화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권한을 제한했다. 현재 국무회의는 선거로 선출되며 국왕은 행정부의 권력을 각 부처에 안배했다.

국왕은 틴리 총리에게 행복 창조의 전략 뿐 아니라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다른 국가들에도 널리 알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리에게는 버거운 주문이었다.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도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대체 이 개념을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라고 틴리 총리는 회상한다.

그러나 전 세계는 행복에 굶주려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틴리 총리는 1998년 서울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의 발언을 비롯, 전 세계를 향하여 국민총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탄이 유토피아 인것만은 아니다. 5년전 부탄에는 최초의 정신과 의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첸초 도르쥐씨는 "신경 불안 증세를 보이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한다. 꾸준한 일자리 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 상태의 개선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요.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와 첨단 기술들도 최근 들어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은 1998년 처음 시청이 가능하게 됐고 작년에는 이동 통신 전화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가 물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됐습니다"라고 도르쥐씨는 말한다.

스트레스와 알코올 중독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부탄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부탄 사람들이 정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하냐고. 대답은 한가지, '그렇다' 이다.

종교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텔레비전과 이동전화 등 세속적인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탄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교리를 듣기 위해 불교 사원을 찾는 사람들은 전에 없이 늘어나고 있다.

부탄이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덫은 있다. 세계 은행의 한 관리 엔리케 판토야 씨는 "한 국가로서 부탄의 성장은 부탄의 정체성에 기반합니다. 만약 부탄에서와 같이 진지한 철학, 성장에 대한 확고한 생각들이 없다면 다른 나라들이 부탄과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라고 주장한다.

반기얄씨의 월급은 정부 관리의 평균 월급과 맞먹는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기쁜 이유는 그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무부 분석가인 반기얄씨는 좋은 통치, 정치 개혁, 무상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부탄은 어린 아이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는 사실이다. 소꿉친구 데첸 방모씨와 결혼한 반기얄씨는 세살 된 딸을 두고 있으며 직장에 오래 있으면 집 생각이 자꾸 난다고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경력을 쌓느라 바쁘죠. 부탄에서는 공동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도와줍니다."

부탄에서도 부족한 것은 있다. 해외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자동차를 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반기얄씨의 자산 중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은 300달러짜리 산악 자전거이다. 그는 매일 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또 한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다.

"여기는 스타벅스 커피가 없어요, 정말 마시고 싶어요." <번역 이혜승>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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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1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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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김광수 <afrikaans@netsgo.com>
          
▲ 나무 아래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프리카인. 그에게는 시간도 정지돼 있는 듯하다.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에서 현지인들과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약속을 하면 제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만난 외국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인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특히 시골지역으로 가면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아프리카인들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보다는 ‘해시계’와 ‘달시계’를 신뢰한다. 그리고 토막 난 시간들보다 ‘동 트고, 해 지는’ 하루라는 '묶음'을 더 중요시한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정말 시간개념이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약속시간 도대체 언제인데!", "빨리 하자!"라며 따지고 재촉하면,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웃음 짓는다.

그러고는 점잖게 한마디를 던진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haina baraka).”

‘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귀가 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민 상대방에게 오히려 한 수 가르친다. ‘오늘 못한 일이 있으면, 내일 하면 되지’...‘인생을 왜 그리 팍팍하게 살아가느냐‘며.

그 말 뒤에 흔히 덧붙이는 또 한마디. “폴레 폴레 은디오 무웬도(Pole Pole ndio mwendo).” ‘천천히 해도 결국은 간다’는 말이다.

되레 측은하게 바라보며 던지는 그 말 앞에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묘한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때론 아프리카어를 아는 외국인이 단어 하나를 살짝 바꿔 반박할 때가 있다.
“하라카 하라카 ‘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ina baraka, 서두름 속에 축복이 있다)”라고. 그럴라치면, 아프리카인의 눈동자에는 또 다시 ‘연민’이 스친다. ‘거참, 딱한 사람이로고...’

서구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 사람도 말도 한가롭게 보이는 풍경.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에는 서구사회의 시계와 전통사회의 시계가 혼재한다. 정확한 시간 개념을 추구하기 보다는 상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늦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가기는 간다’라는 말에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이 함축돼있다.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늦다’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외국인이라면, 우선 그 사고방식부터 존중하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화만 내고 다닐테니까.

물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고 공공기관 그리고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비교적 시간이 잘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인관계 속에서는 시간과 약속에 대해 관대한 정서가 큰 흐름이다.

이 같은 정서에 대한 외국인의 거부감은 자칫 인종차별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함께 어우러질 사람’으로 인식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훌륭한 비즈니스를 하고자 한다면 공식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비공식적 관계도 그에 못지않다. 특히 공동체의식과, 개인이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비공식적 관계가 일을 아주 쉽게 풀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방법은 그리 힘든 게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인들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단선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낯설다.

서구적 시각에서 시간은 생산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24시간의 시간은 생산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쪼개고 또 쪼개서 효율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늘 어떤 목적을 갖게 된다. 그러기에 '시간의 노예'라는 자조마저 나오지 않던가. 하지만 아프리카인에게 시간은 고무줄과도 같다. 자신의 주관으로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는 것이다.

24시간, 그리고 시, 분, 초는 그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시간은 ‘인위적 변화’와 ‘목적 달성’을 위한 준거 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누군가와 어울려, ‘그냥’ 보낸 시간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서구인들이, 또는 현대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동 트면 아침을 맞아들이고, 해 지면 저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그가 있는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다. 딱히 ‘몇 시까지’랄 것 없이.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은 자연현상을 중시하고, ‘사람’을 모든 활동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철학적 종교적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거스르고 거부하며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의 대척점에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을 대하는 입장이 어떤 게 온당한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때때로 떠올려 봄 직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삶 속에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우리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것일까?

200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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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릴 땐 우리도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를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했잖나요? 그런 거 보면 우리는 참 모범생들이에요^^

balmas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시간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요?

로드무비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

urblue 2004-10-1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 시간 지키지 않는 친구들에게 무진장 화를 내곤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엔가, 그럴 것 까지 또 뭐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가끔, 어린 시절 지나치게 잘(!) 교육받은게 문제라고 느낍니다.

chika 2004-10-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시계가 없는 나라'라는 책 소개를 보고 그 책 읽어볼까, 싶었는데 말이지요. ^^

balmas 2004-10-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모두 아프리카인들에 감명받으신 듯.^^

딸기 2004-11-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결국 세계관의 반영인가봅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이라크전쟁 말입니다. 그 전쟁과 관련된 저의 사적인 어떤 경험 때문에, 저는 미국의 가장 큰 폭력은 이라크인들에게 자신들의 시간관념을 박아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분명 다르죠. 어느 한 쪽을 칭찬하고픈 마음은 없고, 저는 아프리카인들을 동경하지도 않고, 그들의 시간에 특별히 감명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다이내믹함, 냄비근성, 저는 이런 걸 아주아주 좋아하거든요. 즐겁고 재밌자나요.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이 행복을 갉아먹을 수도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시간이 더 살만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들의 문화에서 이어져내려온 시간 개념을 지키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200년 카우보이들이 7000년 이라크 문명에 자기네식 시간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이라크인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 못잖은 폭력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