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

한겨레

2004. 10. 16. 토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

 

 이제 강남은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이 되었다. 강남에 살지 못하는 죄로 강남 외의 대한민국 모든 지역의 학생들은 강남으로 이사 가지 못하는 부모의 경제적 무능력을 한탄하게 되었다. 홍길동은 근본천생의 처지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의적이 되었지만, 고교등급제를 바라보는 오늘의 학생들은 ‘사는 곳이 지위를 말해주는’ 이 현대판 신분제 아래서 장차 어떤 한을 품고 살아가게 될까?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의 차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자는 주장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강남 고교에 입학하여 결국 수시모집에 탈락한 부모와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도 결과의 차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수시모집에서 탈락한 비강남 지역의 학생이 만약 합격하더라도 대학 4년 동안 합격한 학생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곧, 현재의 차이가 기회의 제한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능력에 의한 것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기관의 임무는 현재는 좀 모자라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발굴하여 특유의 교육방법을 통해 인재를 만들어 내는 데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이미 만들어진’ 성적에만 집착할 뿐, 어떻게 기를 것인지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수능성적이 사실상 대학 서열인 현재 한국의 실정이 바로 ‘대학 경쟁력’을 저하시킨 주범인데도 여전히 ‘일류대학’들은 교육보다는 입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물론 대학이 사회적 불평등까지 고려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명 대학의 입시는 모든 학부모, 나아가 온 나라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신호체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변별력 없는 제도 때문에 ‘좋은 학생’ 못 뽑는 몇 대학의 손해는 그들의 이기적 행동으로 인한 국민적 혼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좋은 대학’ 가는 것이 계층 상승의 관문이며, 대학입시가 초등학교 이후 모든 교육을 지배하는 한국에서 ‘내신 부풀리기’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오히려 대학은 나름의 기준으로 ‘성적 부풀리는’ 고교와 교사들에게 벌을 줌으로써 교육 정상화에 기여해야 할 책무가 있다.

 하기야 일각의 주장대로 본고사를 부활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입시를 둘러싼 골치 아픈 논란에는 마침표를 찍겠지만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대안이다. 고대반, 연대반의 간판을 단 사설학원과 과외의 창궐만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학교교육을 완전히 입시교육으로 일색화하고 학생을 완벽한 시험기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본고사 부활론은 입시의 편의만 고려될 뿐 교육에 대한 비전과 철학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제도가 문제가 많음을 인정할 수 있고, 우수한 학생 뽑겠다는 대학의 욕심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우수함’의 기준이 여전히 점수로 환산될 수 있고 표준화될 수 있는 ‘성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이들의 요구는 선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 식민지와 개발독재 시절의 것이고 따라서 그 시절에 ‘공부 잘했던’ 사람들의 향수가 오늘 이 시점 경쟁의 이름 아래 평준화 폐지, 본고사 부활론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이 문제 해결에 마지못해 나서는 교육부의 철학 부재를 한탄한다. 고교등급제 불가피론을 내세우는 오늘 한국사회의 엘리트 집단의 머릿속에 과연 ‘일류대학’을 못 가는 95%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있을까? 아니, 진정으로 21세기에 필요한 우수한 인재, 그들 말대로 ‘국가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인재에 대한 상이 있는 것일까? 우수학생을 독점하고 싶은 ‘일류대학’ 당국에 묻는다. 입학 후 4년 동안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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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주노동자 '반한활동' 기준 뭔가

[경향신문 2004-10-15 22:21]

 

[사설] 이주노동자 ‘반한활동’ 기준 뭔가

얼마전 국내에서 반한(反韓) 이슬람 단체가 적발됐다는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파병 이후 이슬람 과격단체의 한국인 테러 경보가 여러차례 울렸던 상황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 안에 테러리스트를 품고 있었으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감과 경각심이 불쑥 솟아난다.

 

국가정보원·법무부, ‘반한 단체’ 를 공개한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 이를 부풀린 일부언론은 의도했던 안했던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녀사냥이나 다름없다.

방글라데시인 모임이 왜 반한 단체인지, 한국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비자를 달라고 호소하는 게 왜 반한 활동인지, 이슬람사원에서 만난 사람끼리 모금해 모국의 정당에 송금한 게 왜 그렇게 큰 잘못인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반한 단체 핵심조직원 3명 검거, 나머지 조직원 잠적’으로 요약된 채 세상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불법이주자라고 추방반대시위를 ‘반한 활동’으로 규정, 범죄자 취급해서는 안된다. 최근 한 중국인 노동자는 체임을 요구하다 사장의 고발로 추방될 운명에 처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그도 반한 인사인가. 불법 체류자를 마녀로 만들면 그들을 추방하는 일이 조금 수월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이 땅을 찾아온 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법적 지위가 불법일 수 있어도 그들의 인생은 불법이 아니다. 누구도 그들의 인생, 그들의 행복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정부당국이 그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차별과 멸시가 횡행하는 이런 대한민국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그런 한국이라면 정말 우리 모두가 나서 ‘반한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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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P? 우린 '국민총행복'을 믿는다

작은 왕국 부탄의 의미있는 정책, 그리고 자존심

 

지오리포트 <georeport@georeport.net>
          
GNP 몇 만 달러, 국가경쟁력 세계 몇 위,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 세계가 각종 지표와 산술로 국가간 서열을 매기기에 분주한 사이,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당신들은 행복한가요?"
최근 러시아 언론 <엔떼베(NTV)>는 '국민총생산을 국민총행복으로 바꾼 나라(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행복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번역기사)'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부탄이 '국민총행복'이란 지수를 토대로, 공동체의 '진정한 삶'을 꾸려가려는 의미있는 '실험'을 다루고 있다. 부탄은 왜 GNP란 지수를 버렸을까? 기사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편집자>



▲ 부탄 어린이들의 해맑은 미소.
출처 www.newsru.com  
아시아의 한 작은 왕국, 부탄은 GNP(Gross National Product,국민총생산)라는 지수를 쓰지 않는다.

국민총생산보다 이 나라에 더 적합한 지수를 부탄은 도입했다. 바로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 총 행복)'이다.

5년전 타쉬 반기얄씨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캐임브리지 대학 철학 석사학위, 예쁜 여자 친구, 런던 컨설팅 회사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그러나 반기얄은 세상과 동떨어진 부탄에서 120달러를 받는 직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반기얄씨의 대학 동기들, 특히 외국에서 고소득의 직장을 찾는 것이 꿈인 인도나 네팔 친구들은 이 부탄 친구의 결정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다른 부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행복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그럴수록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반기얄씨는 말한다.

부탄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지만 해외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 거의 전부가 고국으로 되돌아 온다. 이유는 한가지다. 부탄의 정부는 국민보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쓸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부탄의 정부는 '일반적인 발전'의 지표가 되는 국민총생산을 새로운 모델인 '국민총행복'으로 대체해 전 세계의 경제 연구소, 연구자들로부터 이목을 끌었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규정하기는 물론 어렵지만 부탄에서는 자연자원의 보호부터 민족문화의 선전, 민주적 행정 체제까지 국민 행복에 밑받침이 되는 모든 것들을 '국민총행복'에 포함시키고 있다.

"부탄은 행복을 국가의 발전 전략으로 세우는 매우 드문 나라입니다. 어쩌면 유일한 나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탄 사람들은 장기간의 사회적 건강을 위해서 눈앞의 이익을 희생합니다."
삶의 질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애틀랜틱 GPI의 회장인 론 콜먼씨의 말이다.

물론 포괄적인 충족감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복리만으로 '복지'를 평가하는 것에 의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부탄만은 아니다.

국제 사회과학자 그룹 '세계 가치 조사'는 지난해 세계 각국을 행복의 순위로 매긴 바있다. 여러 가치와 믿음이 한 나라의 정치, 사회에 반영되는 정도를 여러 질문을 통해서 분석한 이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나라 1위로 나이지리아가 꼽혔다. 미국은 16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일리노이대의 애드 다이너 심리학 교수에게 국민 복지 지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텔레비전의 한 구석에서 다우 존스의 지수와 함께 보여질 수 있는 지수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행복과 복지의 관계를 연구해 온 다이너 교수는 사회가 일정 정도의 복지 수준에 도달하면 수입은 더 이상 삶의 만족감을 주는 지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신 건강은 통장 잔고 등보다는 인간 관계, 작업의 만족도, 끊임없이 할 일이 있다는 것, 인권, 민주적인 제도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신적 복지는 부탄의 국왕 드룩 기얄로 지그메 싱기예 왕축이 1972년 왕위에 오른 이후 신민들을 위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다이너 교수와 마찬가지로 국왕은 국민총생산의 대체 지수를 오랫동안 탐색해 왔다.

국왕은 국내총생산이 한나라의 진정한 부와 큰 관계가 없으며, 진정한 지도자란 물질적 복지뿐 아니라 정신적 만족감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이 부탄에서 공식적으로 다듬어진 것은 지난 1998년의 일이다. 그때 국왕은 국무총리인 리온포 쥐그미 틴리에게 '행복의 네 기둥' 이라는 정부의 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네 기둥이란 안정적인 경제 발전, 자연 환경의 보호, 민족 문화의 증진과 좋은 통치를 일컫는다. 틴리 총리는 이 네 기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성공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우선 총 인구수가 828,000명인 작은 왕국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이 개혁의 구도에 의하면 보건, 교육, 사회 경제 분야의 서비스가 다른 분야보다 우선시된다. 이 목적에 따라 국가 예산의 25퍼센트 이상이 병원과 학교에 배분되었다.

두번째 기둥인 자연 환경의 보호 역시 국가 성장 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탄은 외국 자본에 문을 활짝 열거나 천연 광물들을 팔아 넘기지 않는다. 비가공 원목의 수출을 금하고 입국 관광객 수를 연 6천 명으로 제한함으로써 투자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지만 자연 환경은 천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다.

세번째 기둥인 문화 지원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 국민이 종교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 이 계획의 하나다.

마지막 기둥은 좋은 통치이다. 1998년 국왕은 민주주의를 가속화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권한을 제한했다. 현재 국무회의는 선거로 선출되며 국왕은 행정부의 권력을 각 부처에 안배했다.

국왕은 틴리 총리에게 행복 창조의 전략 뿐 아니라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다른 국가들에도 널리 알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리에게는 버거운 주문이었다.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도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대체 이 개념을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라고 틴리 총리는 회상한다.

그러나 전 세계는 행복에 굶주려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틴리 총리는 1998년 서울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의 발언을 비롯, 전 세계를 향하여 국민총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탄이 유토피아 인것만은 아니다. 5년전 부탄에는 최초의 정신과 의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첸초 도르쥐씨는 "신경 불안 증세를 보이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한다. 꾸준한 일자리 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 상태의 개선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요.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와 첨단 기술들도 최근 들어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은 1998년 처음 시청이 가능하게 됐고 작년에는 이동 통신 전화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가 물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됐습니다"라고 도르쥐씨는 말한다.

스트레스와 알코올 중독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부탄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부탄 사람들이 정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하냐고. 대답은 한가지, '그렇다' 이다.

종교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텔레비전과 이동전화 등 세속적인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탄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교리를 듣기 위해 불교 사원을 찾는 사람들은 전에 없이 늘어나고 있다.

부탄이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덫은 있다. 세계 은행의 한 관리 엔리케 판토야 씨는 "한 국가로서 부탄의 성장은 부탄의 정체성에 기반합니다. 만약 부탄에서와 같이 진지한 철학, 성장에 대한 확고한 생각들이 없다면 다른 나라들이 부탄과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라고 주장한다.

반기얄씨의 월급은 정부 관리의 평균 월급과 맞먹는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기쁜 이유는 그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무부 분석가인 반기얄씨는 좋은 통치, 정치 개혁, 무상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부탄은 어린 아이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는 사실이다. 소꿉친구 데첸 방모씨와 결혼한 반기얄씨는 세살 된 딸을 두고 있으며 직장에 오래 있으면 집 생각이 자꾸 난다고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경력을 쌓느라 바쁘죠. 부탄에서는 공동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도와줍니다."

부탄에서도 부족한 것은 있다. 해외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자동차를 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반기얄씨의 자산 중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은 300달러짜리 산악 자전거이다. 그는 매일 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또 한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다.

"여기는 스타벅스 커피가 없어요, 정말 마시고 싶어요." <번역 이혜승>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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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1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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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김광수 <afrikaans@netsgo.com>
          
▲ 나무 아래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프리카인. 그에게는 시간도 정지돼 있는 듯하다.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에서 현지인들과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약속을 하면 제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만난 외국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인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특히 시골지역으로 가면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아프리카인들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보다는 ‘해시계’와 ‘달시계’를 신뢰한다. 그리고 토막 난 시간들보다 ‘동 트고, 해 지는’ 하루라는 '묶음'을 더 중요시한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정말 시간개념이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약속시간 도대체 언제인데!", "빨리 하자!"라며 따지고 재촉하면,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웃음 짓는다.

그러고는 점잖게 한마디를 던진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haina baraka).”

‘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귀가 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민 상대방에게 오히려 한 수 가르친다. ‘오늘 못한 일이 있으면, 내일 하면 되지’...‘인생을 왜 그리 팍팍하게 살아가느냐‘며.

그 말 뒤에 흔히 덧붙이는 또 한마디. “폴레 폴레 은디오 무웬도(Pole Pole ndio mwendo).” ‘천천히 해도 결국은 간다’는 말이다.

되레 측은하게 바라보며 던지는 그 말 앞에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묘한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때론 아프리카어를 아는 외국인이 단어 하나를 살짝 바꿔 반박할 때가 있다.
“하라카 하라카 ‘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ina baraka, 서두름 속에 축복이 있다)”라고. 그럴라치면, 아프리카인의 눈동자에는 또 다시 ‘연민’이 스친다. ‘거참, 딱한 사람이로고...’

서구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 사람도 말도 한가롭게 보이는 풍경.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에는 서구사회의 시계와 전통사회의 시계가 혼재한다. 정확한 시간 개념을 추구하기 보다는 상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늦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가기는 간다’라는 말에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이 함축돼있다.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늦다’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외국인이라면, 우선 그 사고방식부터 존중하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화만 내고 다닐테니까.

물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고 공공기관 그리고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비교적 시간이 잘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인관계 속에서는 시간과 약속에 대해 관대한 정서가 큰 흐름이다.

이 같은 정서에 대한 외국인의 거부감은 자칫 인종차별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함께 어우러질 사람’으로 인식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훌륭한 비즈니스를 하고자 한다면 공식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비공식적 관계도 그에 못지않다. 특히 공동체의식과, 개인이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비공식적 관계가 일을 아주 쉽게 풀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방법은 그리 힘든 게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인들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단선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낯설다.

서구적 시각에서 시간은 생산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24시간의 시간은 생산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쪼개고 또 쪼개서 효율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늘 어떤 목적을 갖게 된다. 그러기에 '시간의 노예'라는 자조마저 나오지 않던가. 하지만 아프리카인에게 시간은 고무줄과도 같다. 자신의 주관으로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는 것이다.

24시간, 그리고 시, 분, 초는 그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시간은 ‘인위적 변화’와 ‘목적 달성’을 위한 준거 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누군가와 어울려, ‘그냥’ 보낸 시간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서구인들이, 또는 현대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동 트면 아침을 맞아들이고, 해 지면 저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그가 있는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다. 딱히 ‘몇 시까지’랄 것 없이.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은 자연현상을 중시하고, ‘사람’을 모든 활동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철학적 종교적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거스르고 거부하며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의 대척점에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을 대하는 입장이 어떤 게 온당한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때때로 떠올려 봄 직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삶 속에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우리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것일까?

200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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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릴 땐 우리도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를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했잖나요? 그런 거 보면 우리는 참 모범생들이에요^^

balmas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시간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요?

로드무비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

urblue 2004-10-1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 시간 지키지 않는 친구들에게 무진장 화를 내곤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엔가, 그럴 것 까지 또 뭐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가끔, 어린 시절 지나치게 잘(!) 교육받은게 문제라고 느낍니다.

chika 2004-10-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시계가 없는 나라'라는 책 소개를 보고 그 책 읽어볼까, 싶었는데 말이지요. ^^

balmas 2004-10-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모두 아프리카인들에 감명받으신 듯.^^

딸기 2004-11-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결국 세계관의 반영인가봅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이라크전쟁 말입니다. 그 전쟁과 관련된 저의 사적인 어떤 경험 때문에, 저는 미국의 가장 큰 폭력은 이라크인들에게 자신들의 시간관념을 박아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분명 다르죠. 어느 한 쪽을 칭찬하고픈 마음은 없고, 저는 아프리카인들을 동경하지도 않고, 그들의 시간에 특별히 감명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다이내믹함, 냄비근성, 저는 이런 걸 아주아주 좋아하거든요. 즐겁고 재밌자나요.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이 행복을 갉아먹을 수도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시간이 더 살만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들의 문화에서 이어져내려온 시간 개념을 지키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200년 카우보이들이 7000년 이라크 문명에 자기네식 시간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이라크인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 못잖은 폭력이지요.
 

지난 10월 10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에 Jonathan Kandell이라는 자유기고가가 쓴 데리다 부고기사가 실렸습니다. [난해한 이론가 데리다, 74세로 사망 Jacques Derrida, Aastruse Theorist, Dies at 74]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공정한 정론지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뉴욕 타임즈]의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이 필자는 철학에 거의 문외한인 데다가 데리다를 싫어하는 미국 우파 지식인들의 편견을 공유하는 인물이어서,  글 전체가 비아냥과 조롱투의 문장들로 가득차 있더군요. 이런 글을 부고기사로 실은 신문도 문제거니와, 저명한 인물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방금 사망한 사람을 위한 기사에 그런 류의 내용을 실은 기고자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군요. 미국의 저명한 지식인들, 대학교수들, 작가들, 영화제작자들, 대학원생들이 이 부고기사에 반대하여 항의 사이트를 만들고, [뉴욕 타임즈]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에서도 테리 이글턴이 [가디언]에 데리다 사망 이후 촉발된 영국의 일부 지식인들의 "속물적이고" "얼빠진" 반응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군요.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시면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원래의 부고기사와 이 기사에 항의하는 사이트 및 항의 서명자들 명단, 테리 이글턴의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즈] 부고기사

http://www.nytimes.com/2004/10/10/obituaries/10derrida.html?ex=1098072000&en=185f90b5481cdce6&ei=5006&partner=ALTAVISTA1

항의 사이트

http://www.humanities.uci.edu/remembering_jd/

 

테리 이글턴의 기사

http://education.guardian.co.uk/higher/artsandhumanities/story/0,12241,1327932,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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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딸기 2004-11-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네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는 굉장히 수준이 높은데, 유독 데리다의 부고에서 그런 일이 빚어졌다니요. 저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를 예전에 꼼꼼히 봤었는데, 뉴욕타임스는 다른 것도 다 수준 높지만 과학기사하고 부고기사가 특히 빛났었거든요. 우째 저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