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글: 로쟈,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까,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한 대학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데리다의 [불량배들] 번역에 관한 서평을 읽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면서, 국내 철학서들의 오역 문제에 관해 이런저런 걸 묻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말해서 역자와 출판사의 명예에 피해를 입힌 것 같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런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할 경우 독자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해봤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도 역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출판사도 이 책을 개역할 생각을 하지 않는 마당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문제를 처리했을 경우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겠느냐고요. 그리고 오역으로 점철된 책을 비싼 돈주고 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지적 능력만 한탄할 독자들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주느냐고요.
그 기자는 정말 그렇겠다고 수긍을 했지만, 정말 문제를 제대로 인식해서 수긍을 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고, 또 그 기자에게 그런 식의 "점잖은 해결 방안"을 제안했던 사람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 어떤 역자나 출판사가 그런 식으로 책을 출판했을 경우, 그 역자나 출판사가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것과, 번역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역에 대한, 독자들에 대한 역자나 출판사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다른 연구자들이나 신문, 잡지들이나 모두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를, 굳이 애써서 파헤치고 밝혀내어, 아까운 시간과 정력 소비하고 덤으로 모진 놈 소리까지 듣는, 로쟈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peeker님의 고언은 그런 우스꽝스러워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러쿵저러쿵 덕담이나 해가면서 점잖게 살 수 없는 팔자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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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03(월) 21:12

 

시민의 사법참여 어떻게


△ 한인섭·서울대 법대 부학장, 봉욱·대검찰청 검찰연구관(왼쪽부터)

배심제·참심제 도입 논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시민의 사법참여’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사법개혁위원회는 사법개혁이라는 큰 틀 아래 시민의 사법참여의 구체적인 안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는 참·배심제 도입을 두고 뜨거운 논쟁 중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부학장과 봉욱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 지난달 27일 서울대에서 만나 시민의 사법참여와 참·배심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인섭 교수는 “‘국민을 위한 사법’을 위해서는 ‘국민에 의한 사법’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며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적극적인 사법참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봉욱 검사는 “검찰도 폐쇄적·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노력이 검찰에서도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인섭=시민의 사법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책을 보면 자신이 배심·참심제 도입을 주장해왔지만 ‘황야의 외침’이고 ‘사막의 절규’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상황이었죠. 2000년까지 학술논문을 보면 그냥 외국의 제도만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2001년부터는 학계와 실무 쪽에서도 논문이 급속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아 행정부를 만들고 국회의원을 뽑지만,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해서 사법부가 정당성을 갖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한걸음 물러난 정당성이죠. 법관을 뽑는데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가 보장돼야 하고, 재판 내용에서도 시민적 관점과 변화하는 가치관이 적시에 투입돼야 하는데 우리나라 법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관생활만 하고 상당히 법조, 법원의 폐쇄성에 갇혀서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시민의 정의와 법원의 정의는 시차가 있는 듯 한 거죠. 이로 인한 불만은 국민들의 사법불신으로 쌓이게 됩니다. 변화하는 가치관이 사법 결정과정에서 바로바로 투입되고, 직업 법관과 일반시민의 교류를 통한 질높은 판단, 그래서 쉽게 수용될 수 있는 판단이 행해질 때가 됐습니다.

봉욱=사법부도 그렇지만 검찰도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고, 운용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국민이 요구하는 공무원 수준과 참여요구 등을 우리도 상당히 깊이있게 느끼고 있습니다. 검찰만 해도 최근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국민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국민의 눈 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표는 안됐지만,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고심사회 제도라고 해서 항고심사를 할 때 외부인사들, 교수, 변호사 등이 참여해서 같이 결정하도록 하는 획기적 제도를 시범 제도로 하고 있고, 시민 옴부즈만 제도도 시범 운영하고 있습니다. 큰 드라이브인 특별수사 등의 경우 예전에 검사들끼리 결정했다면 요즘은 특별수사 모니터링 제도라해서 일반 시민 등을 위촉해서 실제 의견을 종합해 절차화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검찰도 개방적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시민 참여를 바라보려는 입장들이 있습니다.

한=현재의 형사재판 수사의 구조로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제대로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제도적 문제부터 건드려야 합니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하다고 보고 있지만, 저는 검사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 변호사의 참여가 보장이 안되죠. 99년에 경찰이 변호인 참여를 보장한다고 문을 먼저 열었고, 법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열었죠. 하지만 실적을 보면 몇백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봉/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
영미법·대륙법 계통의 차이에서 발생

봉=변호사가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여건이기 때문에 그렇죠.

한=미국은 변호사가 수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엔 현재 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실질적인 조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없죠. 미국 판사는 이를 두고 변호인 참여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봉=영미식과 대륙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형사재판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불만은 피의자 단계에서부터 검사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증거에 있어서도 피의자 심문조서의 영향력이 80~90% 되는 것 아닙니까. 형사재판에서 실제로 판사들이 편견없이 임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검사가 수사해왔던 것을 대체로 존중하는 경우가 많죠. 무죄 판결의 비율이 낮은 통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 미국은 그걸로 끝인데, 한국은 검찰이 거의 반사적으로 항소를 하고 있습니다.

봉=항소율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한=피의자와 피고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구조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봉=무죄율에 대해서는 말이죠, 미국의 학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독일은 어떻게 그렇게 무죄율이 낮을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무죄율은 0.73% 입니다. 미국은 10~20% 정도 되죠. 대륙법 체제는 재판에 넘기기 전에 진실 여부를 한번 가리고, 유죄가 틀림없다 하는 부분만 재판하도록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사건이 100%라면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하는 비율이 43.6% 거든요. 영미법 체계에서는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재판정에서 이 문제를 가리자는 쪽입니다. 그래서 무죄율이 더 높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점을 비판하죠. 무죄 나올 사안은 아예 재판정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 제대로 수사를 안해서 변호사 비용 등의 부담까지도 국민한테 지우는 것은 형사사법의 실패 아니냐는 비판이 크거든요. 사법개혁위원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입장에서 사법제도를 고칠 부분은 첫번째가 폐쇄적인 재판제도, 둘째가 비싼 변호사 수임료, 세번째가 부실한 사법서비스이고 다음이 전관예우 등 법조비리 등 입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실제 국민이 불안한 것은 재판이 폐쇄적이고 나의 재판결과가 어떻게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것이 거든요. 기준의 불명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실무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가 구속될지, 구속되면 석방될지 안될지, 재판 과정에서는 실형이 선고 될지 감옥에 가게 될지 어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변호사를 사서 유무죄를 다투지만, 우리는 오히려, 실제 전관예우는 대개 선처를 요구할 때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의 사법참여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할 부분은, 이런 기준을 정하는데 국민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피고인들이 수사단계에서 자기 자신의 진술로서 만들어진 증거와 또 재판과정에서 각각의 증거를 효율적으로 판별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변호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데 형사사법에서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요, 폐쇄적 재판도 법관과 검사가 많은 역할을 하게 됨으로 그렇게 된 것이죠. 재판 결과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높은 상고율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의 근원적 치료 방법이 시민의 사법참여라고 생각합니다.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하면 폐쇄적 재판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재판관인 배심인, 참심인으로 인해 검사와 변호인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법조인들끼리의 암묵적 존중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거죠.

봉 검사는 배심이 도입될 경우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비용과 시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제도 적용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한국식 배심제를 도입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봉=배심이 도입되더라도 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연간 1천여건에서 많이 잡아 3천여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폐쇄성이 극복되는데, 나머지 230만건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교수들은 배심재판에 소요되는 인력과 비용이 커서 나머지 사건에서는 오히려 더 상황이 열악해진다고 비판합니다. 배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간이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사법시스템이 운영되지 않거든요. 1%의 배심사건은 그나마 폐쇄성을 극복하게 되겠지만 나머지 99%는 어떻게 될까요 일반국민들의 사건은 사각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한=미국도 2~3%의 사건만 배심으로 이뤄집니다. 그 2~3%의 사건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진실규명의 필요성이 아주 큰 사건이며, 결과의 신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배심에 회부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비배심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배심은 민·형사 사건에서 시민의 일부가 시민재판관으로 뽑혀, 사실판단과 유·무죄에 필요한 사실판단을 하는 것인데요. 단순사실 판단과 유죄냐 무죄냐의 최종판단을 배심원이 한다는 것이죠.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 등을 청취하고 직업재판관인 재판장의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설시와 지도를 받으면서 하게 됩니다. 유죄가 되면 양형은 직업법관에 다시 맡기고요. 배심제는 영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꽃피우고 세계 50개국 내외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참심제는 독일이 대표적이죠.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을 모두 시민재판원이 직업재판관과 함께 합니다. 양형판단과 손해배상 액수 결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재판원이 직업법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봉/미국식 배심제가 성공하려면
관련 제도들 함께 도입돼야
한/몽땅 고쳐야 한다고 생각 안해
밈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

봉=영미식 배심제와 독일식 참심제 외에도 조금씩 변형들이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미국식 배심을 도입하면 수사·재판과 관련된 여러 다른 제도도 함께 다 들여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수사단계보다 재판단계에서 모든 것이 가려지거든요. 문제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실을 가린다는 게 어렵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에서의 위증이나 수사기관에서의 거짓진술도 사법방해죄로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개 장소인 재판정에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주요 재판이나 청문회에 증인 등이 나오지 않아 공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배심제를 하려면 법정에서 변호사의 역할도 실제 재판을 이끄는 당사자로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국가변호사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증인보호제도와 내부고발제도 뿐 아니라 법관 선발방식도 포괄해서 들여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게 됩니다. 일괄해서 도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독일식은 아니더라도, 미국식과 독일식을 절충해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국식 배심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현재 우리 제도 중에서 익숙한 부분을 몽땅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중심리 등 구두변론을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도입해야겠죠. 변호인 조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배심제를 안 해도 해야할 것입니다. 미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요. 두 가지의 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한국형 배심제인데요. 직업법관이 재판공판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고요, 배심원 숫자를 9명으로 하고 12명까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명 전원일치 평결로 하고, 정 합의가 안될 때는 8대1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일본이 최근 도입키로 한 재판원제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과반수로 평결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결정은 과반수로 할 수 있지만 사법적 결정은 거의 절대적 진실 추구에 가까우므로 개개인의 특수한 체험은 9명 중 한두명 밖에 안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배심의 최대 장점은 치열한 평의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최대치가 드러나게 되고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참심제가 도입될 경우 전문법관 2명과 시민재판원 7명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보다는 한국형 배심이 더 낫다고 봅니다.

봉/일본이 1928년 배심제 도입했는데
15년뒤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편입
장점 발휘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봉=배심제든 참심제든 장점은 도입해야 하나 단점은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수들의 주장은 주로 재판이 쇼처럼 진행된다는 것이고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을 맡았던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는 “가장 훌륭한 변호사는 모든 적법수단을 이용해 총체적 진실을 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용과 시간도 문제입니다. 제가 미국 연수를 갔을 때 실제로 배심재판에 관여했는데 한 사건에 보통 2주가 걸리고 한달에 2건, 많아야 3건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재판부에서 사건 처리 건수가 월 90건 정도이고, 2심은 12건 정도거든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론적으로 진실이 밝혀지느냐에서 효용은 낮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배심원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은 사건이 전문화돼, 중요 경제부패사건의 경우 직업법관도 실체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피고인의 권익 부분은 존중하나 피해자 인권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도 배심제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으나, 80년대 이후 피해자 인권옹호 운동을 계기로 문제의식이 커져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배심제를 그대로 도입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식 참심제로 갔을 때는, 절충형으로 2+7 혹은 3+9 방식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주로 관심가지는 것은 유무죄가 가려진 이후에 양형부분이고 변호사 선임이유도 유무죄 주장보다는 유리한 양형을 받으려는 것인데 미국식 배심에서는 양형의 투명성이 제고되지 않아 문제가 있습니다. 배심재판이 이뤄지려면 1~2주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죠. 재판 이전에 진실을 가리는 절차가 짧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는 배심재판에서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항소가 불가능한 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또한 초기 수사단계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기능이 약화돼, 미국처럼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 국민의 소박한 법감정으로는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서면 안되거든요. 배심재판이 배심원 구성 등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1928년에 일본이 배심제를 도입해 15년간 운영했는데, 첫해에는 143건이 있었지만, 점점 줄어 10년 뒤에는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일본의 배심제가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 수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은 전시체제로 국민인권이 억압되던 때죠. 배심제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정치상황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과 돈있는 사람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 비용과 시간의 문제 등이 중요한 논점인 듯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배심원을 상대로 쇼처럼 하는데 배심이 각계각층에서 나올 수 있다면 변호사가 쇼할 때 진실을 감추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등 저항감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쇼에 현혹된다기보다 증거에 의해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법관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의 경우,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전원일치의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변호인 쪽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검사 쪽이 극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또 많은 수의 유능한 변호인들을 선임해서 진실에 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들 말하는데, 진실은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퍼즐을 모아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변호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검사의 전제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다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변호사가 최대로 투입된 사건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면, 변호사 없는 피고인은 얼마나 불리한 판결이 나오겠습니까.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배심제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간, 비용과 관련해서도 국민이 배심원이 되는 경우는 평생 1~2번에 불과할 것입니다. 재판관이 되는 체험을 선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많고 군 복무 등의 체험을 통한 국가 의무에도 익숙해 삶의 보람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많죠.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1~2주 사이에 끝날 것이고 1년씩 가는 일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한 교수는 일본의 배심제가 실패한 것은 정치적 상황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 검사는 배심원 구성 등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 폐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 배심제를 주장하는 한 교수와 참심과 배심의 절충형이 옳다는 봉 검사는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했다.

봉=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있기 때문에 배심제 도입여부를 떠나 일반사건의 양형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원으로 뽑히면 우리 국방의 의무처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 다루는 사건이 살인 사건 등 강력 사건이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여론조사에서는 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조직폭력 사건이 있어 피고인 앞에 있는 상황에서라면 그 부담이라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절충형 참심은 법관과 부담을 나누지만 배심제는 100% 배심원들이 부담을 다 안게 돼있습니다. 신변 안전의 부담, 실제 생업의 부담까지 고려한다면 절충형으로 가는 게 적합할 듯 합니다.

한=판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도 배심원들이 누가 봐도 무죄인데 유죄로 결정할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알쏭달쏭한 경우 판사만 판단하면 되느냐의 문제인데, 판사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복잡다단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 시민들의 지식·경험·상식을 보충받아야 됩니다. 얼마전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검사가 사전에 억압적인 분위기를 동원해 자백을 받아내고 심문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소파에 따라 미국식으로 해야 됐었죠.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법정에 미군 병사를 내놓으면 피고인에게 훨씬 불리한 쪽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미국인 기준에서는 한국 재판이 반쯤은 유죄추정상태에서 되는 것 아니냐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원칙을 정하고 있음에도 실제 운영은 피고인에게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면 참심형으로는 어렵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봉/재판이 쇼처럼 진행되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한/현재도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 있어

봉=미국의 제도가 미국의 문화와 미국민의 법감정, 국민의식에 맞는 제도라면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도입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배심이 미국의 법감정에 맞지만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다고 할 때 바꾸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영미는 절차적 정의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대신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사필귀정의 뿌리 깊은 법감정도 존중하면서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한=피해자의 분노와 고통을 해결하려면 일단 검사가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입증해야죠. 피해자를 재판에 참여하게 한다거나 재산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소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흉악범이나 조직폭력 사건에 관여하는 부담은 판사나 검사도 큽니다. 알 카포네의 재판을 둘러싼 온갖 영화가 있는데요, 직업 법관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매수됐지만 배심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았거든요. 배심원 선정때 검사와 피고인 쪽이 한번 기피절차로 걸러내고,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배심원을 선정해 신원 노출을 방지하면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봉=배심원의 신분노출을 방지해야하는 것은 참심이나 배심에서 모두 마찬가지죠. 일본의 재판원제도에서도 배심원을 노출하면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판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이것이 여러 단계에서 걸러지는 게 좋다면 배심원을 통한 집중심리에서 한번보다는 수사단계에서도 미리 한차례 걸러주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의 인권보장은 실질적인 국선변호인 제도의 도입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배심제가 돼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피해자의 인권부분도 동시에 확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한=시민 개개인에게는 배심원으로 시민재판관으로 참여하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가 참여하지만 전체가 다 공유하겠죠. 전 국민이 잠재적 배심원이 되는 것인데, 시민이 항상 사법의 대상이고 객체이다가, 주체가 되면 법에 대한 지식이 자기의 것으로 되고, 법의 생활화가 이뤄지고 또 시민들이 법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준법정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를 통해 법 위반자가 줄어든다는 게 아니라, 전문관료들이 만들어갔던 기준들을 시민적 기준으로 바꾸어 나가고 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모세혈관에까지 침투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시민참여에 대해서는 저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50년 동안은 아버지 세대가 열심히 노력해 이끌어왔는데, 지금은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할 때입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법에 대한 존중과 법치주의, 또 하나는 앞선 글로벌 스탠더드 문화와 제도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배심제든 참심제든 절충형이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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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5-0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 씁니다. 최근 저도 '법철학'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힘'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인지요...
실은 이 얘기를 드리려 했던 건 아니고,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책들(혹은 이들에 대한 이차저작) 중에서 '책임'에 관해 상세히 다룬 글이 어떤 건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참, 그리고 저번에 '그라마톨로지' 번역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떤지요? 아마 말씀이 없으신 거 보면 신통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4-05-0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 힘]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는데, 출판사 얘기로는 마침 [문학과 사회] 편집, 출간 일정과 겹쳐서 지연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6월 초 쯤에는 출간이 되겠지요.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책들 중에서 <책임>에 관한 책들이 어떤 게 있는지 물었는데, [전체와 무한] 이후 레비나스의 저술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다 책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는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데리다가 레비나스에 관해 쓴 책에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Adieu to Emmanuel Levinas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는 레비나스의 윤리, 정치사상, 따라서 <환대>와 <책임>의 문제가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차 문헌 가운데 국역본 책으로는 [사랑의 지혜]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알랭 핑켈크로트라고, 프랑스에서 가장 방송을 많이 타고 인기있는 저술가 중 한 사람의 책인데, 제목만 봐서는 흔한 잠언류의 책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사실은 레비나스의 철학에 관한 매우 독창적이고 명쾌한 해설서입니다. 에세이 스타일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렵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사실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영어로 된 저술 중에서는, Richard Beardsworth, Derrida and the Political(1996)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이 책은 데리다의 정치철학, 법철학에 관한 제일 좋은 책 중 한 권이고,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과 데리다 철학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관련된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운데, 조만간 하루 날을 잡아서(^^) 구내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검토해볼 생각입니다.

aporia 2004-05-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큰 도움을 받습니다. 공부하면서 의문드는 점 있으면 종종 질문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이리가레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


        이는 정신의 생성에 필수적인 계기이며―하지만 헤겔은 이 이행 안에서/이행에 대해 거의 우울증적인 애석함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의 누이/누이 자체[역주: “그의 누이/누이 자체”의 원문은 “la/sa soeur”이다.]에 대한 (피들이) 뒤섞이지 않은(불순하지 않은, san mélange) 애착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다. 종과 성별(젠더, genre)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 통일체, 이 개인성, 아직 살아있는 이 피의 주체가 단순하게[곧 종이나 성별 없이―역자] 발생했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의 향수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차화된sexué 관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expose, 성적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이 욕망을 이행시키지는 않고 있다. 성적 욕망은 피의 주기 안에 통합되어 있는 조화를 깨뜨리게 될 텐데, 이러한 조화 안에서 오빠와 누이 사이의 구별은 피의 순환의 각 국면들phases, 곧 들숨/날숨, 유동적임/딱딱함,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역주: apprehension은 “파악”이나 “포착” 같은 의미 이외에도,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들은 “흡수résorption”와 달리, 바깥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로 번역했다.]/바깥의 흡수―이들이 아직 동물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국면들은 거의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그/녀)가 내쉴 때 타자는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그/녀가 붉은 피가 될 때 타자는 자신의/자신들의 정맥(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미 되돌아가고, 그/녀가 혈구(들)의 원자적 개체성으로 긍정될 때 타자는 림프로 남아 있고, 그/녀가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갈 때, 타자는 이제 겨우 휴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등등. 하지만 이들은 소화digestion 과정에서는 이미 치유할 수 없게 분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하나가 [남성적인] 하나 안에서 자신을 재인지reconnaître할 수 있을지 몰라도―따라서 이 경우 [남성적인] 하나는 [여성적인] 하나를 이미 동화시켰을 것이다―그 반대의 경우는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안티고네가, 이 외부, 그녀에게는 도시 바로 그것인 이 외부를 향해/외부에 맞서 자율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와 마음씨coeur[역주: 여기서 “coeur”는 “심장”, “마음”, “마음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리가레가 글의 서두에 제사로 인용한 헤겔의 『자연철학』에 나오는 “중추”를 뜻하기도 한다.], 분노를 입증해주고 있다면, 이는 바로 그녀가 남성적인 것을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한 순간은. 하지만 아마도 이는 그녀가 오빠를 애도할 때에만, [여성적인] 죽음la mort으로 인해 상실한 남성성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영혼에 다시 양분을 제공해주는, 그리고 그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d'en mourir 시간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이미 피의 균형은 와해되고 변질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 자신을 동요시키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불순함이 뒤섞이지 않은 [남성적] 행복le bonheur은 동등하게 분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살아있는 통일성 안에서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누이는, 오빠가 자기로 복귀하기 위해 동화시키는 이러한 실체―피―의 자기-표상적인 지주(支柱)가 될 수 있다. 아들이 그를 낳은 부부로부터 독립해서 대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보증(담보, gage)인 그녀는 살아 있는 거울, 곧 그녀의 반사를 통해 [오빠의] 자기[역주: 여기에서 “자기”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헤겔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원천이다. 붉은 피와 그것의 외관상 유사물이 서로 안에서 조화롭게 (혼)융되는 특권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혼)융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기를 비추기auto-spéculation에 관해 도시가 오빠와 누이 각각에게 부여한 상이한 재인지[인정]의 권리는 항상 이미 그들의 결합을 도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공개적인pubblique 재-표시를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여성[아내]-어머니는 양분을 전달하고 유동화하는[용해시키는] 림프쪽에 전념하게 되고, 주기적인 출혈로 인해 피를 상실함으로써 거의 백색에 가까워지며,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 및 기관들이 체화하여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중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남자(아버지)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체화를 진전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활력, 성마름, 활동성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체내에 타자를 흡수하는 순간에 특별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버지-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살아 있는) 교환의 단절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지양함으로써 반복한다. 법의 텍스트의 기록 속에서 피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그는 동시에 이 텍스트(자신)를 분신(으로서)―하지만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그의 부인 안에서 각각 상이하게―생산하며, 외관상 유사한 것들, 상이한 방식으로 피를 잃어버린 개별적 자아들의 원자들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함으로써 피의 색깔을 더욱 더 퇴색시킨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실체가 상실된다. 곧 자신을 살아 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함으로써 피가 상실된다.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역주: hypochondria와 melancholia는 둘 다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9)

***


         따라서 어떤 담론도 간단히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역주: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의 원어는 “re(n)fermée”이다. “renfermée”라면 “봉합하지”의 의미이고, “refermée”라면 “다시 메우지”의 의미이다.] 못할 상처를 낳는 이러한 타격, 가격이 불가피하게 가해지는 윤리적 계기로 되돌아가봐야 한다. 오빠와 누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소위) 평등한 인정[재인지] 안에, 두 본질들 사이의 비폭력적인 상호 삼투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인정과 상호 삼투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안에서 자신들의 보편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일치는, 아직 청춘들인 전자와 후자가 행위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집 안의 수호신들의 축복 속에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유년 시절이 마치 낙원처럼 계속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가적이고 오염되지 않은immaculées―또는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가적인―유아적 사랑은 어떤 시기 동안에만 존속될 수 있다 ... 그리고 각자는 곧바로, 동등한 자신의 맞짝 안에는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와 타자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공정하게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공동의 분유départage 속에서는 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양심, conscience)은 자신의 단순성 그대로, 의무에 대한 파토스라는 온전한 성격 그대로 재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양심]은 자신에게 드러난 윤리적 본질의 이 부분, 하나의 성에게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상응하는 부분에 따라 행위하도록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식[양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범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 편파적인 작용에 의해 공격을 받은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사후에야 비로소 의식[양심]에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다른 쪽이 대립물과 적대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범행이 이루어질 때 분출하는 어두운 잠재적 힘, 자기[의] 의식conscience de soi은 이러한 행동 속에서 이 힘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이러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식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살해된 공공의 적대자는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결혼한 여왕은 어머니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역주: 여기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힘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양심]”의 원어가 “la conscience éthique”라는 여성형 명사로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10)

***


        단 하나의 삼단논법이 이루는 경탄할 만한 악순환. 여기에서는 무의식이 계속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의식―의식은 무의식을 몰라도 무방하도록 허락받고 있다―의 법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으며, 이 법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더 억압받게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윤리적 법, 성적으로 다른 두 현존재를 아래층/위층으로 나누는 것―게다가 이는 오빠와 누이의 죽음 속에서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은 자기Soi에서 유래한다. 정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운동은 이러한 층화를 필연적이게 만들며, 타자가 구덩이로 더욱 깊이 매장될수록[우물 속으로 더 깊이 잠겨들수록] 더 쉽게 자신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처럼 [남성적] 하나는 타자로부터 새로운 힘, 새로운 형태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 타자와 결합하는(성교하는, copule) 반면, 타자는 아무런 독특성의 표시 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어떤 실체가 거주하는 땅 속으로 항상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성적] 타자에 대해 계속 자행되는 강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러한 [강간] 작용은 여성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납골당으로 자신을 밀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경우에는, 너무나 “다른” 본질이 생겨나서 이 본질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본질을 동일자로, (인간적인 법만을 의식하는 [남성적] 무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은) 어떤 무의식으로 환원시킨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범행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자행될 수 있고, [강간] 작용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항들 각자를 근본적으로 이중화하여, 하나의 변증법만으로는 이 항들의 결합을 표현하는(접합하는, articuler) 데 충분치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성격과 다른 성격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분할되고 각자가 스스로 이러한 대립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의식의 법들이 의식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고, 소위 신의 법들은 철학의 법들로, 여성성의 법들은 남성성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음 운동에서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로 이행하게 되는가? 또는 오히려 정신의 운동은 이 차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정신은 사후 효과effet d'après-coup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 차이에 관해 입법하고 차이의 생성을 언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차이를 해소하지만, 실은 이미 모종의 언표 과정(언표의 소송, procès d'énonciation)이 동일자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배제해버렸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남성적인 것은 자신의 담론 기획의 법칙이 전개된 과정을 되밟아갈 수 있지만,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자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의 법을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남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식적인 것은 오히려―또는 훨씬 일찍부터?[역주: 불어에서 “plutôt”는 “오히려”, “차라리”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와 발음이 같은 “plus tôt”는, “plus”가 “더 ~한”을 뜻하는 비교급 부사이고, “tôt”는 “일찍, 빨리”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훨씬 일찍부터”을 의미한다.]―남성쪽에 속하고, 무의식은, 모성적인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에 억압된 채로 여성쪽에 속하게 된다. 이는 남성성―남자쪽에 존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쪽에도 존재하는―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관계들 및 모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소속성을 변증법화할 수 있는 반면(여기에는 모든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부정 작용이 포함된다), 여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l'être라는 추상적 직접성이나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역주: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의 원문은 “un (comme) être”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고, 괄호를 함께 읽으면 “하나로서의 존재”, 곧 “존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는 한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에 대한 거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성 및 심지어 남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자기로서의 하나un comme soi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보편화될 수 있는 연계를 긍정하는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


          여자는, 그녀를 [그녀] 자신(과 같은 것)으로 정체화할―자기 자신으로 복귀할―수 있게 해주고, 그녀를 자연적인 거울 반영 과정에 대한 속박에서 떼어내고 [자연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사변화 과정에 대한 시각이나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역사Histoire의 생성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여전히 무차별적이고 불분명한 감각적 질료에 불과하며,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내지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역주: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즉자적 상태들이다.]의 지양을 위한 실체(의) 저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언표작용이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재 순간의 복제물redoublement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현재 순간에 자기 자신의 유사-주체성으로 도래할 때,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보편적인 현재 자체로 이행한 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 순간의 복제물은 [여자의] 자기 의식으로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나는 결코 나와 같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여자는 주인이 전유하는 이 독특한 의지에 불과하고, 동일자에 대한 주인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각적이고 저항적인 물질성의 잔여, 또는 달리 말하면 그의 대역 배우doublure에 불과하다. 여자는 그 자신만으로는 역사Histoire의 담론의 언표 과정을 성취하지 못하며, (동일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결여된 노예로 머물러 있다. 곧 자신의 주인에 대해 소외되어 있듯이 이러한 역사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타자, 곧 말하는 존재인 당신Toi[역주: 여기서 “Toi”는 한편으로는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신분이 높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어 표현인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당신”이라고 번역했다.]―또는 그분Il―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자아―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고유 의지는 이러한 주인에 대해 겪게 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의 부정성[쓸모없음]에 대한 내밀한 감정 속에서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타자, 이 대타자Autre를 위한 그녀의 노동은, 그녀 자신에게 종별적인 어떤 욕망의 비현실성(비실효성, ineffectivité)을 구성한다.
        하지만 여자가 욕망의 소유를 이처럼 포기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은 실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이 사물들의 형태는 어떠한 독특한 파토스, 어떠한 우연적 자의성에 의해서도 재-표시되지 않는 어떤 자기에 의해 규정되며, 이 사물들 속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 실재성으로 재-직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에게 제기되는 복종의 요구, 곧 여전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여자의] 자연 본성의 비본질적인 변덕스러움은 보편적인 의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궁극적 의미이다.
 

***

        여자는 피의 수호자이다. 하지만 피와 여자 모두가 피의 실체로부터 보편적 자기 의식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피와 여자는 핏기 없는 그림자들―무의식적 환상들―이라는 형태로 기저에서 영속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대지에 대해 무기력한 그녀는, 발현하는 정신이 자신의 어두운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길어내는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기―남성성, 공동체, 통치―의 확실성은, 망각의 물 속에 무의식적이고 침묵한 채 억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 실체 속에서 남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자신의 말과 서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대지의 품[자궁]으로 죽은 남자를 다시 안치하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사해주는 데 있음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que)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알고 있는 매개이며, 이를 통해, 묻혀 있는 있는 가장 독특한 생명체로부터 이러한 모든 [독특한] 자기이기를 그만 둔 어떤 현존재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매개적 계기를 기억함으로써, 적어도, 망각 속에 소실되어 버린 남자 및 공동체의 영혼을 보존해줄 수 있다. 그녀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기 의식의 기-억[내면-화][역주: “기-억/내면-화”의 원어는 “Er-innerung”이다. 이 독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기억”, “회상”을 뜻하는데, 이처럼 분철된 형태로는 “내면-화”를 의미한다.]를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의 세계,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여 적대적으로 변화된 이 세계가 솟구쳐올라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겠노라고, 뒤집어 엎겠노라고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을 양육하는 무의식적인 대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은 스스로 쾌락plaisir, 향락jouissance의 권리, 심지어 현실적인 능동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보편적 운명을 배반한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보편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나이든 시민을 조롱하고 미숙한 젊은 여자의 경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의 소유[속성]을 도착시킨다. 여성성은 나이든 시민에게 아들, 오빠, 젊은 남자의 젊음이 지닌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이렇게 하는데, 여성성은 이들에게서 정부의 권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인, 동등한 자, 연인을 인지하고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타락의 요소들이라고 억압함으로써만, 이러한 요구들에 맞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반항의 씨앗들은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시민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목적들로부터 분리된 것들로서 이미 무로 환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젊은 남자들―여자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쾌락을 얻는다―이 피흘리는 갈등 속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 힘들을 자신의 무기들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실체는 바로 이 힘들을 통해, 형식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에게 자신의 최후의 자원들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결코 친밀한 가족의 동굴[역주: 이는 '자궁'의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 다시 모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점들로 자신의 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뿌림으로써.    

***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역주: 원어는  “se/s'en relever”이다. ] 대표적인repré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적어도 절대적으로는―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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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번역해서 올립니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책의 일부인데, 이리가레의 텍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텍스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다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독해하는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리가레의 텍스트가 상당히 난해하고(또는 암시적이고) 매우 실험적인 문체(나쁘게 말하면 괴퍅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번역이 썩 신통치 못해서 더욱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리가레의 불어 문장은 주어와 접속사가 거의 없고, 분사 구문이 많은 데다, 중의적인 어휘 사용이 빈번하고, 의미 전달 방식 자체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번역이 정말 쉽지 않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불어 텍스트를 읽어볼 것을 권해 드립니다. 번역에는 영어 번역본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몇 가지 오역들도 있고 이리가레의 문장들을 너무 평범한 문장들로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내용 전달을 위해서는 얼마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글은 이번 학기에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주제로 제가 하고 있는 수업에서 학생들하고 같이 읽기 위해 번역한 글입니다. 소포클레스에서 헤겔,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상징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고찰인데, 이리가레의 논의를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텍스트하고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텍스트(이 두 글은 모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입니다)를 번역해서 한번 읽어보자고 말했는데, 막상 번역을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서 사실은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습니다(^^).

고학번 학생들이 꽤 많아서 한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교재로 선택하긴 했는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별로 재미 있지는 않겠지만, 재미 있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들이 있으면 지적도 해주시구요.

 

Luce Irigaray, “l'éternelle ironie de la communauté”, in Speculum de l'autre femme, Minuit, 1974, pp. 266-281.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


  수컷 안에 있는 자궁이 단순한 분비기관으로 퇴화되는 것처럼, 암컷 안에 있는 고환은 낭소 안에 갇혀 있으며, 대립물로 이행하지 못하고 대자적으로(자기 자신을 위해, pour soi) 능동적인 두뇌가 되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다. 그리고 클리토리스는 수동적인 감정 일반을 표상하고 있다. 반대로 남성 안에는 능동적인 감정, 부풀어오른 중추coeur가 존재하며, 비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 및 요도의 해면조직의 틈새들을 메우는 피가 존재한다. 남성 안에 있는 이러한 피의 분출에 상응하는 것이 여성의 월경에서 피의 상실이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보관용) 수용기로서의 자궁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에서는 생산적인 두뇌의 실체와 외부로 분출하는 중추로 분화된다. 이러한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반면, 여성은 수동적인 원리가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전개되지 못한 자신의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출물이 두 형태[형상] 또는 두 형태의 부분들의 재결합인 양, 산출을 [암컷의] 난소와 수컷의 정자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게 아니라 여성 안에는 물질적 요소가 존재하며, 남성 안에는 주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수태는 단순한 통일체 안으로, 자신의 대표 안으로 개체 전체가 농축되는 것이다. 씨앗[정자]은 이러한 단순한 대표 자체이다. 곧 이름으로서의 이고, 자신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자기인 것이다.

죄머링이 말하기를, “정맥은 눈에 이르러 가장 가느다란 혈관, 붉은 피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혈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 [자연철학]

 

***

         혈족parent par le sang[역주: 이 글에서 “sang”, 영어로는 “blood”는 매우 다양한 의미(“피”, “혈연”, “핏줄”, “혈족”, “가문” 등)를 지니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살리기 위해 모두 “피”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피”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약간씩달라지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gue)를 돌보는 것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내생적 의무는 죽음mort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정신적 행위로 전환시킴으로써 죽은 이(죽은 남자, le mort)[역주: 불어에서 “la mort”는 “죽음”을 뜻하며, 정관사 la가 붙는 여성 명사이다. 그런데 이리가레는 “le mort”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이는 원래는 “시체”, “죽은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가레는 le mort의 경우 “죽음”과는 달리 여성 명사가 아니라 남성 명사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단어를 단순히 “시체”나 “죽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죽은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의 묘지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처럼 단순한 보편성의 평화로 고양된 남성을, 우연적인 생명 및 분산되어 있는 그 현존재의 계승의 불안함에서 벗어나서 완수된 남성의 형상화figuration 속으로 맞이하는 일이 피[혈통]의 장소의 수호자인 여성성에게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은 그녀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되는 일체의 악조건을 무릅쓰고서, 이 시신, 자신의 순수 존재의 상태로 존재하는 남성인 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1) 남성은 분명 아직도 (자연적)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독특한 개인에게 돌발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자연적 죽음이라는] 우연적 사고accident, 자신의 자연적 성격 때문에 의식을 의식 자신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의식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기 의식이 되지 못하도록 의식과 자기 복귀를 절단시키는 이러한 우연적 사고를 정신의 운동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virilité이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예컨대 전쟁에서) 이러한 부정성을 윤리적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면, 여성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파괴의 작업opération을 감행함으로써―이는 정신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일이다―죽은 남자를 그 자신과 화해시켜 주는 효과적이고 외재적인 매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죽은 존재―분명히 보편적이지만, 독특하게도 힘을 박탈당하여 비워진 채 수동적으로 타인에게 내맡겨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중에 그를 그녀 자신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모든 저속한 비합리적 개체성으로부터,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해진 추상적 물질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로부터 무의식적 욕망들의 불명예스러운 작업들 및 자연적 부정성을 떼어냄으로써―아마도 그를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그녀는 이 부모의 자식을 대지의 품[자궁]sein de la terre으로 되돌려보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불멸의 원소적인 개체성과 재통합시킨다. 또한 그를 하나의―종교적―공동체로 재결합시키는데, 이 공동체는 이 죽은 남성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결국 그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독특한 물질의 폭력들 및 하층의 생명운동을 통제한다.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2) 성원들에게 그들이 이 총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오직 이 총체 안에서/이 총체로부터만 자신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특수한 개별 목적들(부의 획득이든 향락의 추구든 간에)을 위해 설립된―가족을 포함하는―결사(結社, association)들은 개별 성원들의 친밀한 삶을 동요시키고, 독립된 그들의 삶을 뒤집어엎고, 그들의 독자적인 삶을 침해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전체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독특한 개별성의 질서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인, 곧 죽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곧 이들이 자연적인 현존재에 밀착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또는 의식적인 자기가 전유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결여하고 있는 몰아적인 피안으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의 숭배죽음의 문화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접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적어도 윤리적 차원으로 고양된다면―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이러한 관계는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들은 같은 핏줄이지만, 핏줄은 이들에게서 정지와 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ê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3)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어 각자가 타자로 이행하게 될 만큼 이들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서로 각자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길래 이들이 이처럼 서로간의 교환으로 이끌리는 것인가? [혈연]에 대한 인정인가? 같은 피[혈연]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공통의 헌신인가? 모권제 유형의 계보에 의해 좀더 순수하고, 좀더 보편적인 존재로 보증받는 피의 영속성 및 존립을 이들이 공모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문은 매우 모범적인데, 왜냐하면 남편의 어머니는 또한 부인이기도 하며, 이는 이들의 결합에서 나온 자식들―무엇보다 폴뤼네이케스와 안티고네―에서 핏줄의 연계를 재-표시[역주: “재-표시”의 원어는 “re-marque”이다. 불어의 remarque는 원래는 영어의 remark와 마찬가지로 “언급하다”, “지적하다”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이리가레는 데리다의 특수한 용법에 따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에게 “marque”는 기록(inscription이나 êcriture)의 흔적, 표시를 가리키며, “re-marque”는 로고스, 이성, 사유 등의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록의 작용이 계속 되풀이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곧 계속 기록 작용을 하지 않고서는 로고스나 사유, 정신 따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합의 흔적, 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re-marque”는 이러한 결합의 흔적이 그 자식들에게서 “다시-표시됨”, “다시-나타남”을 가리킨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외삼촌―어머니의 남자형제―은 여전히 부권적인 권력의 대표자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역주: “consanguité”에는 “혈족관계”와 “근친교배”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4) 하지만 사실은―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오긴 했지만―정자는 피와 결합되지 않고 오히려 난자와 결합되며, 만약 이러한 결합이 자신의 모든 “현실성”을 부여받았었다면, 이는 이미 정신과 인륜적 실체의 통일성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열시켰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합은 비순수하게 맺어진 남편과 아내의 결혼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빠와 누이의 화합accord은 같은 이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곧 이들이 같은 자궁[같은 모계 혈통][역주: “같은 자궁/같은 모계혈통”의 원어는 “co-utérine”이다. “utérine”은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를 가리키기도 하며, “모계혈통”을 뜻하기도 한다.]에 이끌리는 것은, 아버지의 성(姓)으로 대표(재현되는, représentée) 상징적 규칙들―이 규칙들은 핏줄의 위력을 이어받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 공동체를 도시에서 시행되는 법률의 유형으로 고양시킨다―에 대한 복종을 통해 벌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순간 오빠와 누이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곧 타자 안에서/타자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각자의 능력(권력, pouvoir)―붉은 피의 능력[권력] 및 이를 재흡수하는 능력[권력], 그리고 명명의 언어행위를 통한 이 능력[권력]의 지양―에서 기인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서로를 인지[역주: “인지”의 원어는 reconnaissance이다. 이는 “인정”, “재인지” 등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헤겔이 사용하는 독일어 Anerkennung(이는 “인정” 또는 “인지”의 의미는 갖고 있으나, “재-인지”라는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에 비해 의미론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하게 된다. 유사한 자(동류, semblant)를. 이는 모권제 및 부권제의 (인륜적) 실체가 상호 공존하면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평화, 욕망 없는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존립을 회복시켜 주는 이상적 분배이다. 여기서 성들간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순간은 신화적인 순간이며, 이러한 헤겔의 몽상은 이미 부권제의 담론에 의해 생산된 변증법의 효과이다. 위무해주는 환상이고, 불균등한 군대들이 벌이는 투쟁의 휴전이고, 이미 정신의 생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죄의식에 대한 부인이며, 각각의 성이 타자[다른 성]와 관계를 맺고 타자[다른 성]로 이행함으로써 각각의 성에 대해 보증되는 양성성의 미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성―남성 또는 여성―은 이미 각각의 성에 대해 상이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운명에 묶여 왔다. 비록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 강간, 살해, 침탈, 상해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중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역주: 이 문장의 의미는 좀 모호한데, 뒷부분에 나오는 “유년시기의 낙원”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곧 헤겔의 몽상은 아직 성적으로 발달된 주체들로 되기 이전의 오빠와 누이 관계, 따라서 비폭력적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동류의 관계를 성들 사이의 인륜적 관계의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헤겔 자신이, 누이에 대해 오빠는 인정의 가능성이지만 어머니이자 배우자로서의 누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누이와 오빠의 이러한 처지는 상호 교환 가능하지 않다[역주: 곧 오빠는 누이에 대해 누이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반면, 누이는 오빠에 대해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는 점을 긍정하면서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중지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오빠는 이미 누이에 대해 하나의 가치를 투여받고 있지만, 누이는 이러한 가치를 오빠에게 되돌려 베풀어줄 수 없으며,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에게 의례를 베풀어줌으로써만 겨우 이를 해낼 수 있을 뿐이다.   

***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소포클레스에서는 확실히 아직 사태가 그렇게 명료하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아직 어느 쪽이 더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피는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버지는, 적어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왕이었다. 이 시간 동안 왕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고 있고, 따라서 (부권제적인) 가장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비극은 피[혈연]에 대한 취향이 빚게 되는 징벌을 극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유한 이름[고유명사]의 특권은 아직 순수하지 않다. 곧 만약 아버지의 이름의 권능이 이미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면, 이는 오이디푸스가 살해와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이 형제들 각자, 자매들 각자가 여기서 이중화된다는 사실은 또한 그리고 아직 양 극단들―이는 나중에 또하나의 남성 또는 또하나의 여성(곧 에테오클레스와 이스메네)으로 드러날 것이다―이 거의 희화적인 것들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행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만약 이스메네가 안티고네와 같은 핏줄에 속하는 여동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폴뤼네이케스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오빠로 특징지어진다면, 에테오클레스는 같은 아버지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서 특징지어진다.
       또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언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메네는 그 연약함과 겁많음, 고분고분한 복종, 눈물, 광기, 히스테리로 인해 이론의 여지 없이 “여성”으로 보이며, 게다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왕으로부터 얕보이고 멸시를 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른 여자들, 곧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용기를 꺾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다른 여자들과 함께 궁 안에 유폐되는 처분을 받게 된다. 안티고네의 경우는 상황이 이처럼 간단치 않아서, 왕은 그녀가 죽음으로 오만방자함의 댓가를 치르지 않을 경우 자신의 남성다움이 그녀에게 찬탈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정말이지 이제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483행] 안티고네는 도시의 법, 도시의 주권자의 법, 가족의 가부장, 곧 크레온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핏줄의 유대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분신을 개와 맹금의 먹잇감으로 방치하여 끊임 없이 고통받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죽기를 선택할 것이다. 신의 법에 봉사하는 것을 포기하느니, 지하의 신들에 대한 소명을 저버리느니[지하의 신들에 대한 애정을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향락jouissance은 좀더 잘 인정받게 될 텐데, 왜냐하면 지하에 속함으로써 인간들의 고안물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데스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에 맞서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대한 정념passion 속에서 그녀는―적어도 왕의 말에 따른다면―사람들(남자들, hommes)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굴복하고 마는 이 비열한 범죄들과는 전혀 다른 도착적 행위들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이 일을 포기하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좋은doux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왕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드모스의 후예들, 식자alphabètes 후예들 중에서 이처럼 사고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적어도 공공연히 말하는(높은 목소리로 말하는, à haute voix)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를 통해 주인의 권위에 맞선 반역을 숨죽여 낮게, 은밀하게 웅얼거리고 있을 뿐인 백성들, 노예들의 동조를 끌어낸다. 친구들 없이, 배우자 없이, 눈물 없이 그녀는 이 망각된 길을 따라 산 채로 바위 틈의 구멍 안에 유폐되고 결코 태양빛을 볼 수 없게 된다. 권력을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납골당, 감옥, 태내(胎內)에 혼자 갇힌 그녀에게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먹을 것을 주어 부패된 그녀의 더러움, 수치가 도시를 훼손시키지 않게 하려고 한다. 그녀가 숭배하는 지하의 신들과 혼자서만 대면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녀가 과연 이 고독한 의식(儀式)에서 살아남게 될지―다시 한번―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é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ève) 수 없다.(5) 그녀는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기 어머니의 저 불행한 결혼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저 끔찍한 포옹들(교미들, étreintes)에서 태어난 죄를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저주받은 그녀는, 정말 부당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불가피한 고통을 감내하기로 마음먹는다.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ê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6) 권력이 자신에게 내린 처형 명령을 선취한 것인가? 이를 복제(배가, redoublant)함으로써? 이미 순응함으로써? 아니면 반항함으로써?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하지만 피는 흘리지 않은―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녀가 도시의 법과 현재 어떤 논쟁을 벌이고 있든 간에, 또다른 법은 그녀가 걸어가게 될 길로 이미 그녀를 인도해 왔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역주: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는 “sa/la mère”의 번역이다. 원문에서 “sa mère”는 안티고네의 어머니, 곧 이오카스테를 뜻하고, “la mère”는 이런저런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와의 동일시(정체화, identification)가 바로 그 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여자, femme),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한 어머니의 불행한 패러다임이 있는 데 말이다. 그리하여 누이는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멜 것이다. 그녀는 자기 오빠, 그녀의 어머니의 욕망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기 위해, (한) 무덤의 그림자로, 죽음(의) 밤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허리띠의 베일로 숨―말, 목소리, 호흡, 피, 생명―을 끊게 될 것이다. 결코 아내(여자, femme)가 되지 못한 채. 하지만 배타적으로 팔루스적 관점에만 중심을 두고 볼 때 생각할 수 있듯이, 그녀가 남성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여성적] 애정과 연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막혀 있는, 결코 뚫린 적이 없었던 어떤 욕망의 길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폴뤼네이케스, 두 형제 중 더 여성적인 폴뤼네이케스 안에서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가[재발견하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 더 젊은? 어쨌든 그는 더 연약한, [매장을] 거부당한 인물이다.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7) 한 여자, 결혼한 한 여자를 위한 사랑/그 여자의 사랑으로 무장을 한 그는, 이 낯선 결합(외국인과의 결혼, hymen étranger) 때문에[역주: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드라스토스의 딸 아이게이아와 결혼한다.] 그의 누이가 산 채로 매장되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적어도 피에 대한 자신의 정념 때문에 자기 형제―에테오클레스―의 통치의 권리를 소멸시키고, 자기 형제―이름상으로는 형인?―가 권력과 이성, 소유 및 부권의 계승과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생명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통치의 실행양식이 변화되지는 않았다. 또다른 남자, 곧 크레온이 통치권을 이어가기 위해 등장했다. 그 역시―안티고네처럼―고립무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법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모든 권력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한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어갔지만 그는 사랑 없이 왕좌에 다시 등극하며, 이 왕좌의 왕권sceptre은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죽음에 사로잡힌 그는, 하지만/그리고 통치권을 엄격하게(가혹하게, rigides) 집행한다. 전혀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서. 냉혹하게 이성적으로. 부수기 쉬운 만큼 부서지기도 쉬운 그 연약한 강함은 그로 하여금 쾌락에 지배당하는 것, 하나 또는 여러 여자들에 지배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기 아들이 대표하는 젊음의 열정, 백성들의 연합, 노예들의 반란, 심지어 욕망에 굴복한 끝에 서로 갈라진 신들, 그리고 따라서 신성한 것들 및 “원로들”에 조심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말과 진리, 지성과 이성, 곧 소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들에 대한 유일한 보호자로서의 특권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예컨대, 여성 및 신성과의 관계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문의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서―이스메네는 황금 감옥, 주권의 변화로 인해 평범한 사적 주거지로 변모될 위험에 처한 황금 감옥에 격리되었다―, 이 전반적인 피의 분출 속에서 그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불행을 자초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그는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로서[역주: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는 “homme en trop”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en trop”는 “과도한”이라는 의미와 “여분의”라는 의미, “쓸모 없는”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신에 대해 무모하게 도전하는 남자”와 함께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또 “혹독한 불행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하고 쓸모없는 남자”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견딜 수 없는 운명에 무겁게 짓눌려 있으며, 이제 그에게 각각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우연적인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과, 내용(혈통의 실체) 없는 대자적 존재의 엄격한 주권성, 자기 자신에게 낯선(이질적인, étrangère) 엄격한 주권성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으며, 독특한 개인들 사이의 (피의) 유대를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해소시킨 어떤 법을 집행함으로써만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곧이어, 유사한 외관semblant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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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lljoy >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어느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 팀은 손전등을 비추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곳곳에 마치 사막에 버려진 양떼처럼 무리 지어 죽어 가는 난민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콜레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볼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러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사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먹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UN에서 인도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말 호세인 박사가 2000년 여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10년 동안을 계속에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 .

불법 이민자로 가득 찬 자볼 근처의 한 난민촌에 갔을 때였다. 그곳은 난민촌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기아를 피해서 혹은 탈레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친 아프간 인은 다 수용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 같았다. 어떠한 이유는 불법 입국자로 입국이 거부당한 사람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거기서 영화에 등장할 엑스트라를 골랐다. 난민촌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 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한 달 된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 어머니의 품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기절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울면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당국은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예산이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난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자신의 자연, 역사, 경제, 정치 그리고 이웃의 몰인정에 의해 파괴된 한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된 한 아프간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다하르] 삼인 200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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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5-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