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rim > [임재석] 악몽은 릴레이될 수 없다 - 한겨레 21

이라크 오무전기 차량 피격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임재석씨, 그가 청와대 1인시위 벌인 사연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그에게 지난해 겨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계절이다. 이런 그에게 당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잔인한 짓이었다. 입술을 떨며 한마디 한마디 이어가던 그는, 끝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다섯달 동안 병실에서 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관심과 외로움이었다.


△ 지난 6월9일부터 나흘간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 임재석씨.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에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사진/ 류우종 기자)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외로움

임재석(32)씨는 지난해 겨울,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라크 한국인 피격사건’의 당사자다. 당시 오무전기의 노동자로 이라크에 파견된 지 하루 만에 그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동료 2명을 잃었다.

귀국한 뒤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조용히’ 치료를 받던 그가 지난 6월9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나흘간 1인시위를 벌였다. 허벅지와 무릎에 박힌 총탄 파편 탓에 목발을 짚고도 다리는 연신 후들거렸지만, 임씨는 ‘파병 철회’와 ‘산업재해 인정’이라고 쓰인 피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까지 올라온 까닭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9일, 임씨는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의 하나인 송전탑 건설을 위해 이라크를 찾았다. 당시 오무전기는 미국 워싱턴그룹의 하청을 받아 50여명이 넘는 노동자를 이라크에 파견한 상태였다. 입국 다음날인 30일, 송전탑 점검을 위해 티그리트의 현장사무소를 나섰다. 흔히 ‘알리바바’라고 불리는 이라크 좀도둑들이 송전탑을 세워놓는 족족 바로 뜯어가는 바람에 송전탑을 매일 점검하는 일은 현장 노동자들의 필수 업무였다.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송전탑의 점검을 차례로 끝낸 뒤, 길을 묻기 위해 이라크 민간인의 집을 찾았다. 건장한 사내는 경계의 눈초리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이라크인 운전사가 “코리아”라고 답했다. 그 집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주유소에 들렀을 때도 누군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고, 운전사는 다시 “코리아”라고 답했다. 주유소를 떠난 지 몇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뒷자리에서 창 밖을 보던 임씨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때, 운전사는 가슴팍에 피를 흘리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승용차 한대가 임씨 일행이 탄 차를 바짝 뒤따르자, 임씨가 탄 차가 2차선으로 비켜난 순간이었다. 승용차에 탄 이라크인들은 급정거하는 차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위험을 무릅쓴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 참여는 결국 화를 불렀다. 이라크 게릴라들에게 피격당한 오무전기 직원들의 차량.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또다시 총알이 퍼붓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밑으로 숨었지만, 허벅지와 무릎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상원씨는 임씨 위로 쓰러졌고. 머릿속이 하얘질 때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씨는 신음하는 이상원씨에게 “우릴 죽이려고 오나봐요. 숨쉬지 마시오” 하고 속삭였다. 2명이 다가와 각각 창문 양쪽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다. 잠시 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임씨와 이씨는 차 밖으로 기어나왔다. 이라크인 운전사와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만수씨, 운전석 뒷자리의 곽경해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10여분 뒤 지나가던 미군에게 구조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이라크 병원에 후송된 뒤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과 대포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초저녁에 모든 불은 꺼졌고, 담배를 피러 밖에 나가려 해도 “불빛이 보이면 표적이 된다”며 병원 관계자가 말렸다. 낮에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경계심를 늦추지 않는 미군의 행렬과 이라크 민간인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선명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한달 가까이 머무른 독일의 미군 병원에서는 많은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잃거나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 군인들은 너무나 흔했다.

부상당한 지 39일 만인 지난 1월 초,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임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형편은 ‘당연히’ 크게 기울었다. 오무전기쪽에 직접적인 보상책임이 있지만, 워낙 영세한 업체라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라크에 가기 전에는 한달에 500만원의 수입을 올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부인과 아이 셋이 처갓집에 의지하고 있다. 결국 이달 초, 기초생활보장법 수급권자가 되었다. 사고 당시 “치료와 보상 등 일체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 정부는 임씨를 외면하고 있다. 지난 3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 신문고와 외교통상부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그러나 “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회사와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니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가라”는 차가운 답변이 전부였다.

임씨는 “당시 이라크 현지조사단이 ‘이라크는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좀 꺼림칙했지만 정부 말을 믿고 간 것”이라며 “이제 와서 정부가 발뺌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씨와 함께 부상당한 이상원씨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엉덩이와 다리에 총 세발을 맞아 하반신 신경이 손상된 이씨는, 애초에는 회복 기미가 보였지만 지금은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다. 역시 보상은 없다.


△ 이라크 티크리트주 인근의 작업현장에서 고압선을 연결하기 위해 송전탑으로 올라가는 오무전기 직원.(사진/ 연합)

누군가 총을 들고 쫓아오는 꿈…

임씨는 특히 숨진 김만수씨 가족을 볼 면목이 없다. 이라크에 가기 전부터 가족끼리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돌아온 뒤에는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형님은 죽었는데 나만 살아왔으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거죠, 뭐.” 김씨의 가족은 회사에서 3억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빚잔치를 하고 나서는 여전히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임씨가 전했다.

임씨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을 될 수 있으면 잊고 싶어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관자놀이와 목에 총을 맞고 죽어간 김만수씨 등 동료들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결국 같이 방을 쓰던 환자들이 방을 바꿔달라고 병원에 요구하는 바람에, 임씨가 3인실에서 2인실로 옮겨가야만 했다. “요즘에도 낮에 이라크에 있었던 얘기를 하면, 밤에는 누가 총을 들고 막 쫓아오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도망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 거예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이 꿈에 그대로 나타나기도 해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와 1인시위에 나선 임씨의 바람은 ‘소박’하다. 임씨가 본 이라크는 너무나 참혹했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파병 문제는 국민들이 함께 다시 생각하고 다시 검토하고, 또 정말 합당한지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라크인들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파병은 막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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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일놈 잡종' 저주받은 아이들, 입 열다: [프랑스 화제 신간] 피카페가 담은 전쟁 기록 <저주받은 아이들>

박영신 기자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이 지난 6월 6일 오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자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필두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참했던 연합국은 물론, 패전국인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등 16 개국 지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시라크 대통령은 여기서 '화해의 시대'를 역설했지만 그러나 끝내 침묵했던 이야기가 있다. 지금까지 애써 덮어왔던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 그 사이 다가온 불-독의 화해 분위기마저 이들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정치인들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저주받은 아이들> 입을 열다

▲ 피카페의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 독일과 영국에서도 곧 출판 예정
ⓒ2004 Syrtes
나치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난 1944년의 여름, 해방된 파리에서는 해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를 박박 깎인 여성들이 거리로 내몰려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던 것.

거리에 모여든 시민들은 민머리를 한 이 여성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거나 침을 뱉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령 프랑스에서 독일인 병사를 사랑한 이 여성들은 해방 조국에서 '국가의 수치'로 내몰렸으며 그래서 간단히 '더러운 창녀'로 치부됐다.

해방과 동시에 꼴라보(collabo, 대독협력자)들조차 너나 없이 레지스탕스(resistance)로 둔갑하는 마당에 어디서도,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여인들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방의 기쁨과 '배신자' 처벌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군중은 이렇게 가장 나약한 자부터 응징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끄러운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던 그 때, 독일인이 '독일놈'이었던 바로 그 시절, 프랑스인 어머니와 독일군 병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른바 '독일놈의 잡종(bâtards de boche)', '기생충(parasites)'으로 불리며 어머니의 업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했다.

독일 점령 시기, 젊은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군 병사의 금지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20만에 이른다. 이제는 58세에서 63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로 불리는 이들이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일간지 르피가로의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했고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장-폴 피카페(Jean-Paul Picaper)가 이들의 증언을 담아,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Enfants maudits)> 을 펴냈다.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는데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금기"라고 진단한 피카페는 저서에서 60년 동안 이들이 '두터운 침묵 속에 버려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전후 정체불명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가 됐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벌을 받아야 했던 것. 어머니에게 내린 징벌만으로 아이들까지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했으므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혈통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 모두가 오랜 기간, 수치와 죄의식의 나날을 보냈으며 딸의 잘못을 속죄하는 가족들도 학대를 견뎌야 했다. 또 몇몇 아이들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남의 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다.

피카페의 붓끝으로 쓰여진 충격적이고 한편 비극적인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독일놈 잡종' 손자, 닭장에 가두고 자물쇠 채우기도

1950년대 초,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메그리에서는 매주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나면 시청 서기관이 마을 광장에 주민들을 모으곤 했다. 어느날 서기관은 10살난 소년을 불러 제 옆에 세우고는 주민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독일놈과 제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서기관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제비는 프랑스에서 자기 새끼를 치면 떠날 때도 데려가지만, 독일놈은 새끼를 버려두고 가지요.'


이것은 당시,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만 흘리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던 10살난 소년 다니엘 룩셀의 회상이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구경거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금지시켰고 밤새 나를 닭장에 가두고는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나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독일군 병사와 프랑스 여성의 딸로 추정된 미셸은 1941년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다. 1945년, 연필조차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나이에 유모로 부터 '나는 독일놈의 딸이다'라고 공책에 쓰도록 강요받았다고 미셸은 회고한다.

현재 62세의 스페인어 교사가 된 미셸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애시당초 영원한 고통에 저당잡힌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독일놈의 잡종' 앙리에뜨의 기억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과 오락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이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독일인과 잔 것은 앙리에뜨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제게 하셨어야죠"라는 해명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죽어야 '독일놈 잡종'이라는 오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독일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앙리에뜨 어머니의 말은 그간의 고통을 잘 말해 준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던 까닭에 해방 후 뭇매를 맞고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독일인 연인을 돕고, 숨겨줬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은 다름아닌 친오빠였다.

이 책에는 13세가 돼서야 자신이 독일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쟈닌의 이야기도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쟈닌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이 그저 '독일인'이 아니라 '살인자의 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두 달 동안 벙어리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에 의해 수녀원에 맡겨진 쟈닌은 10살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몸무게는 18kg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유럽판 '이산가족', 이름만으로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

1945년 1월, 독일군은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 땅에서 대부분 쫓겨났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2차 대전 당시인 1943~1946년 즈음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혹은 프랑스 역사의 수치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며 숨겨졌다.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정체불명인 아버지의 이름만이라도 알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베를린에 있는 WASt라는 관청을 찾았다. WASt는 독일군 참전 및 전몰 용사 친족 전문 기관으로서 2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와 민간인의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 때문에 WASt에는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 국가를로부터 혈육을 찾고자 하는 편지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기관을 통해 가족을 찾은 몇몇은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관청이 주선한 단체 방문이 성사돼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애니 프리드 링스태드도 그녀의 나이 32세때 WASt를 통해 아버지를 찾은 경우다. 링스태드는 자신의 이야기로 'Knowing me, knowing you, that's the best we can do'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독일에 있는 가족을 찾고 있는 이들도 많으나, 만난다 하더라도 오랜 이별 기간의 공백을 단번에 메꾸기란 역부족. 간혹 의붓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80이 넘은 아버지들은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유산을 노리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다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녀들을 부정하는 일도 있다고.

<저주받은 아이들>, 전쟁의 고통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본격 첫 보고서

피카페에게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알린 사람은 바로 WASt의 자료 담당 직원 루드비히 노즈였다. 노즈와 함께 써내려간 피카페의 저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1993년 마르탱 브로사는 여성의 삭발식을 가리켜 '야비한 카니발'이라는 책을 써서 항의한 바 있고, 2000년 파브리스 비르질리는 '씩씩한 프랑스, 해방으로 삭발된 여성들'이라는 책에서 역설적으로 못난 프랑스를 조롱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의 민영 TV < TF1 >이 다니엘 룩셀의 일기를 담은 '아이들'이라는 첫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후, 2003년 3월에 프랑스3 TV가 '독일놈 잡종'이라는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 방송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며 집단 따돌림과 비극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본격 보고서는 피카페의 <저주받은 아이들>이 처음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독일인 병사들이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차 대전 동안 수백만의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했지만 1942~1943년까지 독일군 병사들과 점령국 민간인들의 관계는 차라리 친숙하기까지 했는데,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종종 징병된 군인이었으며 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간이나 약탈 등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엄격히 처벌됐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여 점령군과 그 아래에 있는 국가의 젊은 여성들의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프랑스인 연인의 가정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테러와 포로 숙청 등으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거주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 집단수용소에서의 죽음 등으로 표면화됐다.

이런 가운데, 당시에는 피임이라는 것이 부재했고 아이가 생기면 출산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도덕으로 볼 때 사생아는 '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치욕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많은 수가 버려졌다.

이 아이들은 이른바 '매국'의 열매인 '저주받은 출생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1945년 5~6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여성 집단 강간으로 태어난 '러시아군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상황이었다 하니 '러시아군 아이들'의 경우는 상상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오늘의 독일은 전쟁의 포화 뒤에 죽음과 끔찍한 기억만을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고 쓰고 있는 피카페의 이 저서는 머지않아 독일과 영국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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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몇 가지 의문...(2)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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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연금개혁이 우리의 모델(?)

-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국민연금 기사를 보고

 

강동진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이 광화문 촛불 시위로 이어지고, 연금폐지론, 기초연금도입 주장 등 연일 연금관련 논쟁이 불을 붙는 가운데에 '관점이 있는 뉴스'를 지향하는 인터넷 신문 6월 9일자 '프레시안'에 국민연금 관련기사가 실렸다. 내용의 핵심은 멕시코에서 공적연금 적자의 누적으로 파산위기에 몰리자 '칠레형 민간연금'으로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칠레형 모델은 '세계 최고의 모델'로서 영국 등 공적연금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모범 모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기사 말미에 '자신이 납부한 보험료 원금과 기금의 운용 이자에 따라 결정될 뿐 아니라 세금 혜택이 주어지므로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동기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하경제를 제도권 경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도 거두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칠레의 연금제도는 기사에서 소개하는 바대로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이다. 1974년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하고 등장한 군사독재정권인 피노체트 정부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시장경제체제 도입, 민영화, 자유화 조치 시행을 통한 국제 금융시장에의 접근을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198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강타한 외채 위기에서 칠레도 예외가 아니었고, 위기 극복을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연금개혁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81년 신연금법을 제정하여 정부가 관리하던 연금제도를 민간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유치, 운용하는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외채 위기 극복의 방안이라는 등의 사적연금을 찬양하는 각종 논리가 동원된 것은 물론이고, 세제혜택 등 사적연금으로 유인하기 위한 동기도 정부 차원에서 제공되었다. 그 결과 신연금법 발표 이후 8개월 만에 전체 노동자의 80%가 사적 연금으로 전환하였고, 1994년에는 기존의 확정급여형 공적연금을 완전히 대체하여 민간이 운영하는 강제방식의 확정기여형 연금저축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칠례의 사적 연금 개혁은 결코 외채위기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지 않았으며, 칠레의 연금시장에 진출하려는 외국자본은 자유화와 탈규제를 요구했고 'IMF 구조조정협약'을 이행할 것을 강제했다. 그리고 이렇게 적립된 자금은 금융시장을 통해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은퇴 이후 받는 연금액수도 매우 불안정하다. 민영화된 연금체계에서 은퇴시기에 받는 연금의 액수는 개인이 기여한 것에 투자수익률을 더한 액수이다. 물론 여기서 관리회사에 지급하는 수수료가 빠져야한다. 그리고 투자가 언제나 플러스 수익률을 내지는 않을 수 있으므로, 투자에서의 손실분은 개인이 감내해야한다. 대다수의 저소득층은 기여할 수 있는 여유소득이 없기 때문에 연금의 혜택에서 제외되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사적연금의 극성 속에서 아무런 조치조차 취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관리회사들의 수수료는 계속해서 증가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규제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기사에서 언급하는 '자발적으로 참여할 동기'란 다름 아닌 퇴직 이후 '노후의 생존'을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극심한 경쟁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길 밖에 없다'는 상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정부는 6월 중으로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율은 낮추는 연금법개정안과 주식투자 비중을 자유롭게 하는 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태세이다. 아울러 이와 동시에 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한다는 명목하에 '기초연금'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시민단체와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는 퇴직금제도를 없애고 기업연금을 도입하는 주장마저 나온다. 그리고 현 제도에 대한 불신을 빌미로 '사회적 연대'를 해치는 주장마저 스스럼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국민연금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비판의 기능을 제공하기 보다, 특정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선전하는 수단과 무기로서 기능한 지가 오래이고, 또한 그것이 속성임을 요즘 들어서 더욱 자주 드러내고 있다. 특히나 국민연금관련 논란과 보도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이슈'에 끼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부 '여론제기 집단'이 기본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 없이 '설 익은 주장'을 함부로 내놓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연금개혁'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의 출발에는 세계은행과 OECD의 '연금개혁 권고안'이 자리잡고 있다. 그 권고안의 목적은 노동자의 소득(임금소득이든, 노후소득이든)을 주식·금융시장의 체계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국민연금 논란의 해법은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글은 보건복지민중연대·사회진보연대가 공동으로 펴낸 '연기금 금융화저지 자료집 - 국민연금개악·기업연금도입 반대투쟁을 위하여'를 참고하였습니다)
2004년06월09일 21:53:08

*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 퍼왔습니다.

http://cast.jinbo.net/news/view.php?board=new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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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보도 속보 경쟁보다 ‘질’ 택해야

 

'질’ 좋은 서평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지한 독자라면 내용을 줄줄이 축약해 주기보다는 책의 장단점을 명확히 밝혀주는 서평, 서평자의 시각이 분명한 서평을 좋은 ‘질’의 서평으로 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책의 됨됨이를 따진다’는 서평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기도 하거니와, 요새 같은 정보홍수의 시대에는 바로 그런 서평만이 경쟁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용만을 요약할 거라면 아까운 지면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 서점,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에 넘쳐나는 게 그런 자료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요새는 웬만한 출판사들도 다 홈페이지를 갖추고 있다. 그저 간추린 내용만 궁금한 사람이라면 출판사 홈페이지의 자료실에 들어가 신간 보도자료만 봐도 자기가 원하는 내용은 다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의 ‘책과 사람’은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내 직업 경험상 그 책이 신간이고 서평자가 기자라면 거의 90%, 서평자가 외부 필자라면 50% 정도가 출판사 보도자료를 참조해 책의 내용을 단순 요약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로 베낀다는 말은 아니다. 기자들도 머리말, 결말, 옮긴이 후기(그리고 개인적으로 흥미 있거나 더 필요한 부분) 정도는 읽은 다음, 보도자료의 구성도 바꾸고 살도 더 붙일 테니까. 물론 달라질 것은 없다. 내용만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한겨레〉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지 모두의 문제이다. 그리고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여러 문제 중 ‘시간’ 문제만을 예로 들어보자.

〈한겨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일간지들은 토요일에 서평란을 싣는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늦어도 월요일 오전까지는 신간을 배포하는데, 그 수많은 신간들을 하루 반나절 만에 거른다고 해도 원고마감이 금요일 오전일 테니 기자들이 책을 읽고 기사를 쓸 시간은 3일 반나절 정도밖에 없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2003년 출판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나온 책들의 평균 두께는 251쪽. 서평 전문기자가 별로 없는 국내 일간지 사정으로 보건대, 3일 반나절 안에 이만큼의 분량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한 뒤 원고지 5~10장 분량의 글 하나를 쓰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일례로 6월5일치 ‘책과 사람’을 보라. 한 기자가 〈마틴 루터 킹〉(443쪽), 〈야만의 시대〉(304쪽), 〈독립신문, 다시 읽기〉(467쪽), 〈선물〉(135쪽) 총 4권의 서평을 썼다. 마지막 책은 신간이 아니니 제외하더라도 총 1214쪽 분량이다. 상황이 이런데 하물며 됨됨이를 따진다니!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출판사들이 신간과 함께 보내주는 보도자료는 기자들에게 가뭄의 단비다. 출판사들도 좀 귀찮긴 하지만 손해볼 일은 없다. 약간의 수정이야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책이 소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하든 부자든 출판사들로서야 일간지 서평란이 알아서 광고판이 되어주니 금상첨화다. 그러나 서평란도 광고판이기보다는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어야 더 재미도 있고 멋도 있지 않을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서평란을 타블로이드판(24면)으로 낸 지 한 달이 더 넘어간다. 개인적으로야 〈한겨레〉도 서평란을 증면했으면 좋겠으나, 꼭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굳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지금의 형태로 ‘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만약 시간이 문제라면, 시험삼아 서평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보는 것은 어떨까 정말 소개할 만한 책이라면 서평까지 ‘속보 경쟁’의 희생물로 만들지 말고, 한 주 늦게 소개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정말로 ‘신속성’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신간을 ‘잠깐독서’ 형식으로 9권(지금은 3권이다)까지 소개한 뒤, 이 중 한두 권만을 골라 다음주에 심층적으로 다루든가. 아니면 ‘왜냐면’의 형식을 빌려와 ‘책과 사람’ 지면을 부분적으로 혁신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어떤 형태가 됐든지 간에, 주어진 한계 속에서도 ‘책과 사람’을 바꿔볼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동안 ‘책과 사람’을 사랑해온 독자들을 배신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이재원 <도서출판 이후> 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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