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가면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정한 외 옮김 / 이후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알튀세르의 외전(外傳)의 핵심을 이루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을 집약해놓은 책이다. 사후에 유고집(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Stock/IMEC, 1995)에 미간행 원고 상태로 발표되었지만, 알튀세르 자신은 생전에 이를 하나의 저서로 출간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고, 알튀세르 특유의 섬세한 글쓰기와 사고를 담고 있다.

문제는 국역본에 이런 섬세함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국역본이 영역본을 대상으로 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책의 역자들이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그의 유고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60년대 말-70년년대 초의 알튀세르의 복잡다단한 사상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다.

한 마디로 이 번역본은 숱한 오역과 알튀세르의 개념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을 담고 있어, 국내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의 진수 중 한 부분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 예컨대 번역본 26쪽의 '그것은 그에 앞서서는 다른 어떤 것이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것[시작하는 것] 이전에 이와 다른 것이 존재했지만, 이것과 관련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로 번역되어야 의미가 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7쪽의 '나에게는 사물을 현실적 진리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가상적으로 표상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진다'는 문장은 '내가 보기에는 사물에 대한 상상보다는 사물의 실제 진리로 나아가는 게 더 적합하다'로 번역되어야 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알튀세르가 '이 정식은 사물의 실제 진리, 따라서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표상을 대립시키고 있다'고 논평하는지 이해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저작권이 국내 출판계의 상업성을 한층 더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좌파 서적 전문 출판사가 알튀세르의 중요한 저서를 이런 식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은 단지 학문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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