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갯모

이조판서의 벼슬을 지낸 서유구가 지은 책으로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임원십육지'에 베개의 종류가 나와 있다. 그 책에 나온 베개를 들어보면 등나무 껍질로 짠 등침, 양털이나 말털로 베갯속을 하여 작은 방석처럼 여섯 개나 네 개를 만들어서 그것을 서로 이어서 폈다 접었다 하며 높이를 달리하여 쓰는 습첩침, 용반초로 채화무늬나 완자무늬, 수복무늬를 놓아 속에 짚을 채워 가장자리는 검은 녹피로 선을 두른 완침, 나무로 만든 퇴침, 대를 가늘게 다듬어서 곱게 짜 만든 죽점침, 전복 껍질로 여러 무늬를 놓고 옻칠을 해서 만든 나전침, 쇠가죽으로 만든 우피침 들이 있다........

베겟모 베개이름들이 한결같이 베겟모의 재료에 따라서 나누어지고 있다. 이는 곧 베게에서 베겟모가 차지하는 무게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되겠다. 쌍학을 수놓은 수베겟모, '수', '복' 자와 같은 길상문자를 새겨 복을 빈 나전베겟모

베개는 남자 베개와 여자 베개와 어린이 베개로 구분하여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가 있으며, 그밖에도 부부가 함께 베는 베개인 봉침이 있다.

나전베겟모 원앙침, 구봉침, 두둥베게라고도 불린 봉침에 쓰인 나전 베겟모

봉침은 구봉침이라고도 하고 달리 원앙침으로 부르기도 하며 속말로는 두둥베개라고 하기도 한다. 한 쌍의 봉황이 일곱 마리나 아홉 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있고 그 뒤에는 탐스런 모란이 서로 마주보고 피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무지갯빛 바위가 우뚝 서 있고 가장자리에는 아자무늬나 뇌문으로 난간을 둘렀다. 봉황은 부부 사이의 금슬이 좋기를 바람이고 일곱 마리의 새끼봉은 슬하에 아들과 딸들이 많기를 바람이며, 모란은 집안에 부귀가 함께 깃들 것을 염원함이고 바위는 생명이 돌과 같이 오래 갈 것을 빎이다.

대체로 배겟모에 새겨지는 무늭들은 이처럼 수와 부귀와 자손이 많음과 편안함과 부부의 금슬이 한결같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복을 비는 뜻과, 그런 것들을 해치려 하는 사악한 잡귀신을 물리치려는 벽사의 뜻이 간직되어 있으니 볼품의 아름다움만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베개의 베갯모에서 볼 수 있는 색과 무늬와 거기에 고인 정성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베개들에서 볼 수 있는 어줍잖은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또 주름이나 잡고 펑퍼짐하게 말아버린 서양의 베개들과도 바탕부터가 다르다.

사람에게 잠자리가 지니는 뜻은 깊고도 무겁다. 누군가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다던가? 그렇게 치면 베개도 역사의 한 몫을 차지하는 셈이겠고, 그 가운데서도 베갯모의 몫은 더 크다고 우길 수도 있는 일이겠다. 아닌게 아니라 그래서 예로부터 베갯머리송사를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그 딴에 까닭이 있는 셈이다.

혼인침이라고도 불리는 두둥베개를 베고 누워 밤을 지새며 하룻밤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가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 어느 날에는 등을 돌리고 남남이 되고 말기도 한다. 또 외방 나들이가 잦아진 낭군을 기다리며 첫닭이 울기까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혼자 설움에 겨워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베갯모의 아홉 마리 봉이 눈물의 강을 헤엄치게 되는 처지도 있다. 지극히 드물게는 첫날밤에 그 두둥베개를 베고 맺은 금슬이 10년이 하루 같아서 아들딸 낳아 시집 장가 잘 보내고 회갑을 맞고 희수를 치르고 그리고 회혼례를 맞을 때까지 평생을 한 베개로 지내다가 오누이처럼 이승을 마치는 다복한 삶도 있기는 있다.

베갯모는 그날그날의 삶이 좋았거나 궂었거나 역겨웠거나 자랑스러웠거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의 반려로 아무 말이 없이 오직 화사한 아름다움과 애틋한 기원을 담고 잠자리를 감싸준다.

베갯모가 떨어져나간, 시체 같은 베개를 베고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난질이 잦고 생이별과 이혼이 흔한 현대의 사회현상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는 것인지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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