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주머니는 몸에 지녀야 할 여러 가지의 자잘한 물건들을 갊아서 허리띠에 차는 것으로서, 흔히 겹헝겊으로 네모 모양이나 반달 모양으로 짓고 윗무리에 주름을 잡아서 끈을 꿰어 여닫도록 되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누구나 다 주머니를 지니게 마련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구분도 없이 함부로 찼던 것은 아니다. 곧 주머니는 차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저마다 달랐으니, 그것을 크게 나누면 궁주머니와 여염주머니가 있었다. 귀주머니의 경우에 아가리에 육모 주름이 잡힌 것이 궁주머니요 세모 주름이 잡혔으면 여염주머니였다. 대체로 궁주머니는 부금 곧 금박을 올리고 수를 놓고 매듭과 천이 호화로웠으며, 여염주머니는 간소하고 단아하였다.

평소에 황색 천은 아무나 쓸 수가 없어도 장가가는 날 하루는 신랑에게 그 천으로 된 주머니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비록 벼슬을 하지 못했다 해도 장가가는 사람만은 벼슬아치 옷차림인 사모와 관대와 관복을 입게 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신분에 따라 주머니에 구분이 있듯이 성별 곧 남녀에 따른 구분도 있었다. 여자의 것은 빛깔이 화려한 천을 썼으나 남자의 것은 단색이고, 수도 여자의 것은 복잡하고 아름다우나 남자의 것은 없거나 있어도 소박한 것이 예사였다.........

주머니 조선조 순조의 3녀 덕온공주의 손녀로부터 기증받은 남자의 귀주머니(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관 소장)

주머니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쓰임새를 위해서 정성껏 한 바늘 한 바늘 만들어졌던 것이지만 생활에 쓰이는 것만이 그 구실의 모두는 아니었다. 쓰임새에 곁들여 아름답게 몸치장을 하고자 했던 마음씨도 고여있고, 이에 더하여 사(邪)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빌고자했던 어여쁘고 애틋한 소망도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머니는 유교적인 덕목과 범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왕가에서도 그러하였거니와 여염에서도 돌잔치나 혼인잔치나 회갑잔치에는 주머니를 선물로 삼는 것이 거를 수 없는 인사였다. 특히 신부가 첫 근친에서 시가로 돌아갈 때에는 시댁 어른들에게 주머니를 지어 올리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으니, 이 주머니를 효도 주머니라 일렀다........

수 오방낭자 홍, 청, 흑, 백, 황의 오방색 비단에 십장생을 수놓고 오색 다회로 주머니 끈을 꿰어 도래매듭, 국화매듭을 맺고 색동 봉술을 드리워 장식한 주머니

밝은 빛이 따사롭게 비치는 호젓한 규방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 수틀을 잡고 무심히 한 바늘 한 바늘 수를 놓으며, 머지않아 배필로 나타날 낭군의 모습을 그려보며 혼자 볼언저리를 붉히는 처녀의 마음씨처럼 우리 주머니의 무늬는 아름답다.

그리고 대갓집 마나님이 청나라 비단을 필로 들여놓고 침선비들에게 사갓댁에 바칠 주머니들을 죽으로 마련하여 혼자 세상을 만난 듯 기쁨에 날뛰던 내력이나, 명절날 귀여운 어린 딸에게 빨간 비단 두루주머니 하나를 사주지 못해 가슴이 미어졌을 가난한 아버지의 사연이나, 한량들로부터 엽전을 걷어들이느라고 손때가 묻어 가죽처럼 번들거리던 주막집 주모의 무명주머니의 사연들이 이제는 아득히 저버려진 지난날의 얘기가 돼버렸다.
이런 저버림과 함께 주머니를 노래불렀던 민요들마저도 두루두루 잊혀져가고 있다.

남산 밑의 남도령아
서산 밑의 서도령아
하늘가에 올라가서
뿌리 없는 나물을 캐어
별당 안에 심어놓고
한 가지에 해가 열고
한 가지에 달이 열고
한 가지에 별도 열고
해를 따라 겉을 대고
달을 따라 안을 대고
금낭 하나 지어놓고
중별 따라 중침 놓고
상별 따라 상침 놓고
외무지개 선 두르고
쌍무지개 끈을 달아
임 줄라고 지은 염낭
임을 보고 염랑 보니
임 줄 뜻이 전혀 없네
(경북 의성 지방의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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