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장사
우리에게도 우리의 환경과 미의식에 맞는 화장문화의 전통이 있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인 평남 용강군의 수산리와 쌍영총의 인물도에서 화장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다. 수산리고분의 경우는 귀부인, 시녀 모두 연지 곤지를 바르고 눈썹을 다듬은 모습이며, 쌍영총여인도는 요즘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개성있는 두발형에다 오렌지색 눈화장까지 하고 있다. 여기의 연지, 곤지, 눈썹화장은 모두 색조화장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미 기초화장을 전제로한 이야기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6세기 백제의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師 )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7세기초 고구려 승려 담장이 채색, 종이 등을 전했고, 7세기말에는 신라 승려 권성(勸成)이 연분(鉛粉)을 제조하여 큰 상을 받고 있다. 이는 고시대 삼국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타문물과 함께 화장문화도 전수해 주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들이할 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화장한 여인과 남자 무용수들의 경우 화장한 모습을 볼수 있는 삼국 시대에 이어 당시 선진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통일신라의 화려함은 극에 달했던 듯하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잡지(색복(色服)) 신라조>에 보면 흥덕왕 9년(843)에 '복식금령,을 내릴 정도로 사치의 정도가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를 이은 고려 역시 문화적으로 우수했던 시기였으므로 전대를 능가하는 생활문화가 있었다. 거창의 둔마리 벽화고분의 '여인도'는 도교에서 나타나는 옥녀(玉女)의 모습이지만, 당시 지방호족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눈여겨 볼 수 있으며, 중앙문화는 짐작할 사료가 적어 불화에서 나타난 장엄장식으로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고려도경>에 단편적인 생활상이 기록되어 당시의 화장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인의 시각인데다 그림부분이 상실되어 안타깝다. 이후 고려말 몽고 침입 이후 복식 및 화장에 원나라의 영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초기에 신진사대부에 의해 국사가 근검한 방향으로 정해짐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고려말의 사치에 대한 강한 반발이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진한 화장을 풍기문란의 원인으로 본 듯 사대부가의 여인에게 화장은 금기처럼 여겨졌다. 유고의 영향으로 복식 또한 단정함이 우선으로 되어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창피(猖披)'라는 말은 옷섶이 흐트러져서 체면이 손상됨을 말하던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반가(班家)'와 '기방'의 여인이 구분되어, 화장을 하던 기방 여인은 '분대(粉黛)'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색조화장은 혼례날에나 허락한 듯 조선시대 풍속화나 인물화를 보면 기방 여인의 경우에도 백분 바르고 눈썹 다듬고 입술연지를 칠한 정도이다. 그러나 머리 단장에는 각별하여 검고 숱이 많아야 좋다고 했고 특히 반가(班家)의 여인은 가리마를 곧게 타야 했다. 늘 머리 중앙에 가리마를 타면 가리마 부분이 그을리므로 희고 곧은 흰 살색 선을 연출하기 위해서 백분을 살짝 얹은 실을 가르마선 위에 살짝 퉁겨 정숙한 하얀 선을 나타내기도 했다니 대단한 정성이라 할 수 있겠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머리뀌는 품, 눈썹화장 십미명과 입술연지, 곤지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다. 숙종 연간의 작자 미상의 의인체 소설<여용국전>에 등장하는 15개의 화장도구(거울, 연지, 칫솔, 세수대야, 수건, 물수건, 비누, 향료, 곤지, 분첩, 납기름, 족집게, 비녀, 참빗, 빗치개)도 모두 기초화장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색조화장에 대한 규제는 당연히 기초화장에 대한 강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