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장기


 화장의 시작과 함께 화장용기 및 화장도구가 있었다.
원시시대 사람들이 몸을 화장하는 도구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지혜가 발달됨에 따라 각종의 화장도구가 발달되었을 것이다.
출토된 또는 세전되는 화장용기 및 도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의 예쁘고 작은 토기합 중에는 화장기로 생각되는 것들이 있고 나전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빗도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토기 유병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의 청자유병에까지 이어진다. 또 청동기시대부터 사용하던 동경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에는 상당히 드물게 발견된다.




 

 

 

 

 

                                                                     -유병

고려시대의 화장도구들은 유병, 분합, 분접시, 동경, 대야, 경가, 빗 등 다양하게 전해져 당시의 화장문화를 고증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청자상감모자합은 큰 합 속에 다시 작은 합을 여러 개 담게 한 종합적인 용기로 마치 오늘날 여행용 세트같은 재미있는 형태이다. 금동이나 은입사로 장식한 경가(거울걸이)와 여러가지 형태의 다양한 동경은 그 당시의 호사스런 몸치장을 짐작케 한다.

                                 -청자상감모자합


조선시대 역시 백자, 백자청화로 만든 화장기들이 있는데 특히 청화 안료로 예쁘게 무늬를 그린 분접시, 분물그릇, 분항아리, 유병이 있고 간혹 대리석제나 목제의 화장기도 전해온다. 조선시대는 목공예의 발달로 많은 빗접이 있었고, 후기에 와서는 유리거울을 부착한 경대가 제작되었는데 나전수법이나 화각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이 있었다.

 

 

 

 



 

 

 

 

 

 

                                                                                                      -청화백자 분항아리

화각은 참빗에도 장식하였는데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화장도구에 주저하지 않음은 화장도구 자체가 아름다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화장기의 특징으로 보면 앙증맞게 작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 대가족 중심의 사회 편제가 된 이후 조선시대 역시 가족단위의 생활문화가 중요시되었으므로 화장품이 지역이나 가문마다 그 재료와 사용법에 다소 차이를 두고 있으며, 천연원료를 주로 사용하여 수요량만큼만 수시로 제조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크지 않은 용기가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화장기가 더욱 작아졌는데 이는 유교의 영향으로 근검을 숭상한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여인들은 타인 앞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결국 작은 경대 설합에 넣어두기 충분한 크기가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유병과 분합은 시대에 따른 형태 변화와 함께 꾸준히 만들어졌는데 이는 화장기라는 실용성 때문에 타 미술품보다 극진한 사랑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형태나 재료에 있어서 특별한 용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일반 서민들의 화장기는 실생활 용기와 병용되기도 했음이 구전되고 있다. 이들 화장기들은 모두 각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당시 문화의 일단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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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장사


우리에게도 우리의 환경과 미의식에 맞는 화장문화의 전통이 있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인 평남 용강군의 수산리와 쌍영총의 인물도에서 화장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다. 수산리고분의 경우는 귀부인, 시녀 모두 연지 곤지를 바르고 눈썹을 다듬은 모습이며, 쌍영총여인도는 요즘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개성있는 두발형에다 오렌지색 눈화장까지 하고 있다. 여기의 연지, 곤지, 눈썹화장은 모두 색조화장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미 기초화장을 전제로한 이야기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6세기 백제의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師 )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7세기초 고구려 승려 담장이 채색, 종이 등을 전했고, 7세기말에는 신라 승려 권성(勸成)이 연분(鉛粉)을 제조하여 큰 상을 받고 있다. 이는 고시대 삼국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타문물과 함께 화장문화도 전수해 주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들이할 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화장한 여인과 남자 무용수들의 경우 화장한 모습을 볼수 있는 삼국 시대에 이어 당시 선진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통일신라의 화려함은 극에 달했던 듯하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잡지(색복(色服)) 신라조>에 보면 흥덕왕 9년(843)에 '복식금령,을 내릴 정도로 사치의 정도가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를 이은 고려 역시 문화적으로 우수했던 시기였으므로 전대를 능가하는 생활문화가 있었다. 거창의 둔마리 벽화고분의 '여인도'는 도교에서 나타나는 옥녀(玉女)의 모습이지만, 당시 지방호족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눈여겨 볼 수 있으며, 중앙문화는 짐작할 사료가 적어 불화에서 나타난 장엄장식으로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고려도경>에 단편적인 생활상이 기록되어 당시의 화장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인의 시각인데다 그림부분이 상실되어 안타깝다. 이후 고려말 몽고 침입 이후 복식 및 화장에 원나라의 영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초기에 신진사대부에 의해 국사가 근검한 방향으로 정해짐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고려말의 사치에 대한 강한 반발이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진한 화장을 풍기문란의 원인으로 본 듯 사대부가의 여인에게 화장은 금기처럼 여겨졌다. 유고의 영향으로 복식 또한 단정함이 우선으로 되어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창피(猖披)'라는 말은 옷섶이 흐트러져서 체면이 손상됨을 말하던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반가(班家)'와 '기방'의 여인이 구분되어, 화장을 하던 기방 여인은 '분대(粉黛)'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색조화장은 혼례날에나 허락한 듯 조선시대 풍속화나 인물화를 보면 기방 여인의 경우에도 백분 바르고 눈썹 다듬고 입술연지를 칠한 정도이다. 그러나 머리 단장에는 각별하여 검고 숱이 많아야 좋다고 했고 특히 반가(班家)의 여인은 가리마를 곧게 타야 했다. 늘 머리 중앙에 가리마를 타면 가리마 부분이 그을리므로 희고 곧은 흰 살색 선을 연출하기 위해서 백분을 살짝 얹은 실을 가르마선 위에 살짝 퉁겨 정숙한 하얀 선을 나타내기도 했다니 대단한 정성이라 할 수 있겠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머리뀌는 품, 눈썹화장 십미명과 입술연지, 곤지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다. 숙종 연간의 작자 미상의 의인체 소설<여용국전>에 등장하는 15개의 화장도구(거울, 연지, 칫솔, 세수대야, 수건, 물수건, 비누, 향료, 곤지, 분첩, 납기름, 족집게, 비녀, 참빗, 빗치개)도 모두 기초화장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색조화장에 대한 규제는 당연히 기초화장에 대한 강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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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1. 서 론


화장은 오늘날 생활문화에서 폭 넓게 그리고 깊이있게 정착하고 있다. 그러나 화장의 기원을 정확히 알기는 문화사의 뿌리 모두가 그렇듯이 쉽지않다.
화장의 어원은 서양의 경우 Cosmetic은 그리스어 Cosmet-ikos에서 유래한다. 현재 우리의 '화장'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1세기 전에는 '화장'대신 '단장'이라고 했다. 실제 지금 7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께서는 '단장'이라는 말을 아주 반갑게 기억하고 계신다. 이분들의 말씀을 정리 종합해 보면 분단장(粉丹粧)은 페이스 메이크업에 해당하고 칠보단장(七寶丹粧)은 몸전체를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보면 '단장'이란 요즈음의 이야기로 토탈메이크업이 아닌가?
어느정도 막연하지만 화장의 기원은 인류문화가 시작되었던 고시대부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다. 처음 원시시대 미개한 문화권으로부터 화장의 역사는 시작되고 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얼굴에 강렬한 색깔을 칠함으로써 적을 쫓는다거나 또는 주술적인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던 점이 오늘날과 차이가 있겠다. 또 이집트 문명에서 눈꺼풀과 아이라인에 안티몬파우다를 바른 것은 나일강 안질의 예방이었고, 아랍사막의 건조한 기후는 모발균열이 심할 수 밖에 없었기에 구리를 함유한 광석이나 피마자유등을 이러한 피부질환의 치료 및 예방약제로 사용하게 되엇다. 이와같이 화장품의 개발은 각각의 기후 풍토에 따른 피부질환이나 안질 등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일부 의약학의 발달에도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다양한 연출로 자신들을 장식해 왔다. 적을 놀라게 하기 위해,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 종교의식의 분장으로.....등등.
그러나 미의식이란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 아닐까? 자신의 용모를 수정 보완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돋보이고 싶고 늙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 한대의 고분에서 화장품상자가 발굴되었고 중국의 '시경'에서도 이미 미인의 용모를 '진수아미( 首蛾眉)'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화장의 관점이 지금처럼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개성미에 있었는지, 또는 분장한 연극인처럼 신분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인지, 또 그 구분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다.
결국 미개한 문화권의 화장은 주술적인 수단으로서 강렬한 분장을 하게 되었고, 고대 문명권의 화장은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각기 환경에 맞고, 독자적인 미의식에 의거하였음은 틀림이 없겠다.
우리의 화장문화 또한 유구한 역사 속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리의 화장사와 화장기 그리고 화장용 원료를 조사하여 전통화장의 미의식과 함께 현대 화장품으로 이어지는 맥을 연결하여 앞으로의 방향 제시에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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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11월 화장품전문점 "朴박家가粉분" (http://www.bakgabun.co.kr 인터넷 쇼핑몰)을 연 이래 화장품 소매업을 해오면서 "박가분"의 기업문화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꽃피우는데 열중해 오고 있습니다.  살펴보건데, 우리의 한국적 아름다움은 유구한 역사속에서 멋과 슬기를 담아 아름답게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특히 우리의 화장문화는 알면 알수록 단순히 보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와 미의식에 바탕을 둔 화장문화를 바르고 옳게 되짚어 보고 알리기에는 능력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여러 자료의 숲을 더듬어 우리네 화장 관련 문화에서 인연하여 제반 여성문화를 조금이라도 소개하며, 새롭게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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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어]-이진수

빙어, 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그 물고기를 안다 직접 잡아 보기도 했고 그걸 안주로 소주잔을 비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누가 빙어라고 말하면 그게 살아 있는 물고기라기보다는 느닷없는 빙하기에 얼음이 되어 버린, 그러니까 그 맑은 내장기까지가 얼음이 되어서 내가 죽을 때까지 좀처럼 녹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물고기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처럼 나는 또 남자, 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여자 하나를 사랑한 적이 있다 얼마 후에는 그 여자 나를 떠나 멀리 흘러갔는데

지금도 누가 빙어, 하면 내 몸에선 한밤내 얼음 어는 소리가 들리고 깊고 푸른 그 얼음 속에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 빙어가 산다


......................................................................................................
*빙어, 한 마리
품어 간직할 가슴없이 사는 삶 얼마나 쓸쓸하랴.
내 고등학교 2학년 까까머리 시절
같은 써클의 긴머리 치렁치렁한 어여쁜 선배 하나
그리고 나는 차마 할 말이 진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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