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장신구의 발달이 세분화되어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장신구 제작과 착용에 있어서 체계적인 계통이 서게 되었고, 신분제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금속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 금속재료의 채취가 문제시되고 이에 따라 야금술이 발달되어 한층 장신구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고분에서 출토된 투각초화문(透刻草花紋) 금동관과 투각용봉관 금동관형 장식과 금동 귀고리등이 있다. 상당한 세공으로 놀랄만한 장신구의 시원양식을 나타내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한층 다양한 장신구를 발견할 수 있다. 나주의 금동관과 송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은제품인 버들잎꼴의 장식은 관모에 꽂았던 장식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것이 관식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무녕왕릉의 발굴에서이다. 즉 왕관. 왕비관에 꽂았던 관식이 발견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백제의 장신구의 발달이 한층 고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환식 귀고리와 비녀가 출토되었고, 무녕왕릉에서는 머리 뒤에 꽂는 뒤꽂이가 출토되었다.
옥 종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옥이 출토되어 장신구의 발달을 얘기해 준다.
신라시대는 우리나라 장신구 발달의 황금기라고 할수 있다. 고분을 중심으로 발달된 장신구는 거의 순금제품이며 기교성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것이 많다.
귀고리는 고리가 굵은 태환식(太環式)과 고리가 가는 세환식(細環式)이 나타났으며, 그 장식의 복잡한 양식과 풍부한 종류는 가장 화려하다.

1)머리장식품
빗은 신라 고분인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천마총등에서 출토되었는데 모두 검은색 칠을 한 나무빗으로 산모양이며 빗살은 가늘고 긴편 이다.
비녀는 신라의 은령총과 백제의 부여 성양리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있는데 백제의 것은 금제오판화장식(金製五瓣花裝飾)을 한 은비녀이다. 또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뒤꽂이는 금판을 잘라서 만들었는데, 전체 모양은 나는 새의 모양과 같으며, 삼각형의 머리부분은 두 날개를 펼친 모양을 하고 있고, 세 가닥의 다리부분은 새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그림 1)

2)귀걸이


귀걸이는 다른 시대에 비하여 특히 삼국시대때 남녀의 구별없이 널리 쓰이고 애용되었다. 형태는 3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고리 1개로만 된 소환식(素環式)이고, 다음은 금제 세환에 작은고리를 1개를 연결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주환에 중간식이 연결되고 중간식에 다시 수하식이 이어진다
귀걸이를 구성한 각 부분을 보면 주환은 굵은 태환과 가느다란 세환이 있고, 중간식에는 아주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만든 화롱형구체(花籠形球體)의 것, 반구체를 위아래로 연결한 것, 작은 영락이 돌출된 것, 원통형의 것, 주산알 모양의 것을 연결한 것 등이 있다.
또, 수하식에는 세로로 긴 심엽형 1매의 것, 비취제 곡옥 1개의 것, 금모를 씌운 곡옥의 것, 초실형(草實形), 연주형(蓮珠形) 등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경주 보문리 부부총에서 출토된 태환식 귀걸이는 태환에 귀갑문을 새겼는데, 매우 정교하다. 대체로 신라 귀걸이의 수하식은 심염형이 주류를 이루고, 가야의 것은 초실형이 많다.
이러한 구걸이에 쓰인 재료로는 금, 은, 금동 등이 있었지만 그중에 금으로 만든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3)목걸이
목걸이에는 1줄인 것, 2줄 또는 3줄인 것, 4줄 아니면 6줄인 것 등이 있다. 목걸이에 사용된 재료는 금줄로 된 것, 금제 중공옥으로 된 것, 옥류를 연결한 것, 금옥과 각종 옥으로 이루어진 것등이 있다. 옥에는 곡옥, 환옥, 대추형 옥, 다면옥, 관옥 등이 있고, 그 재료로는 비취, 유리, 수정, 마노, 진주 등이 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푸른색의 유리옥을 꿰어서 1줄 또는 2 3줄로 하고 중심주, 즉 가슴의 중심에 닿는 위치에 1개의 곡옥을 단 것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왕비의 목걸이가 2개 나왔는데 하나는 금줄토막의 양쪽 끝을 꼬아서 만든 금제 9절 목걸이이고, 다른 하나는 금제 7절 목걸이다.(그림 3)
경주시 노서동 고분에서는 공모양에 작은 금장식을 매달아 옥 77개를 연결한 화려한 목걸이가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모양의 옥을 연결한 목걸이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목걸이에 있어 삼국시대에는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것들을 사용하였다.



4)팔지
삼국시대에는 귀걸이, 반지 등과 함께 팔찌도 유행한 장식품 중의 하나로 이 시기의 고분에서는 여러개의 팔찌가 나오고 있다. 팔찌의 재료로는 목걸이와 유사한 옥, 유리, 금속제 등이 사용되었다.
여러 가지 옥을 연결하여 만든 옥팔찌로는 신라의 금령총에서 나온 유리옥 28개를 연결한 것과 주황색, 청색등의 유리옥을 여러개 연결하여 만든 것이 있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유품으로는 표면 안쪽 둘레에 톱니모양을 하고 표면 중앙둘레에는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였으며, 안쪽면에는 경자년(庚子年) 2월에 다리(多利)가 만들었다는 음각명이 있는데 명이 새겨진 팔찌로는 유일한 것이다.
신라의 금령총에서 출토된 것은 표면 측면에 40개의 꽃모양을 만들고 유리옥을 박아 장식한 팔찌가 있다.

5)반지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풍습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는 크게 유행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청동, 은, 금반지 등이 있다.
청동반지는 고구려의 안학궁지에서 청동쇠줄을 타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것이 나왔고, 은반지는 여러개가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의 평양에서 나온 것은 굵은 은쇠줄을 휘어만든 소박한 것이고, 신라의 은반지는 윗부분의 중앙이 마름모꼴을 한 넓은 형태이다.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것은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든 것이다. 신라의 금반지는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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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사시대의 장신구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장신구는 삼국시대에 비하여 다양하고 화려하지는 못하나 소박하면서도 간단한 재료로 만들어 몸의 각 부분을 치장하고 있다.
씨족사회에서는 전투를 벌일 때 각자의 토템이 표시된 관모를 머리에 썼으며, 머리털로 만든 요대를 두르면 재해를 막는다고 믿었다. 씨족원들은 태양, 바람, 비 등의 위대한 우주의 신비력을 숭배하고 식물, 동물 등도 숭배의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상징하는 기물을 머리에나 몸에 장식하였다.
석기시대의 혈거 주거지가 춘천 교동 봉의산 동쪽 경사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일괄유물 24점 가운데 관옥(管玉) 한 개와 수정편(水晶片), 그리고 백마노편(白瑪瑙片) 등은 장신용(裝身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골각기 사용 시대에는 수골(獸骨), 수각(獸角)등과 조개로 된 것이 있는데 그 종류에는 골촉, 골검, 골부, 골침, 패기(貝器)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어금니로 만든 것도 있었다.
골각 또는 조개껍질, 아류(牙類)등으로 장식품을 만든 것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금니류로 만든 목걸이, 사슴뿔로 만든 허리에 차는 물건, 그리고 팔찌, 귀고리 같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금속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기법이 현저하게 발달되어 본을 뜨는 주범(鑄範) 즉, 용범(鎔范)등이 발견되었다. 세형 동검 등은 상당히 발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과(銅戈), 동모(銅 ), 동부(銅斧) 등이 매우 발달된 양식을 보였으며 더욱 거마구(車馬具)같은 것은 세부적으로 매우 섬세한 것을 만들었다.
동물형 대구, 짐승 모양의 패식품(貝飾品), 구리로 만든 팔찌가 발견되어 큰 화제를 일으켰다. 또한 금제교구(金製敎具)는 누금세공기법을 말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그 종류를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머리장식품
(1)비녀:신석기 시대의 유적인 농포동 패총에서는 사슴의 뿔로 만든 비녀 2점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15cm 굵기 1.5cm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13cm 굵기 2.5cm이다.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인 태성리 제 4호 움무덤에서는 물소의 뿔로 만든 비녀가 출토되었는데, 단면은 능형이고, 길이는 9cm 너비 8.5mm 두께 6mm이며 끝은 둥글게 다듬어졌다. 이 비녀는 기법이 매우 치밀하며 정교하고, 표면은 대단히 고르고 곱다.
(2)빗:빗은 마산 성산패총에서 2점이 발견되었는데, 쓰인 재료나 구조 형태는 거의 같다. 하나는 작은 것으로 5개의 빗살 중 중앙의 하나만 남아있고 다른 것은 모두 부러졌다. 다른하나도 생김새나 구조는 거의 같고 8개의 빗살이 있는데 그 중 길게 남아 있는 것은 중앙의 3개 뿐이다.

2)귀걸이
귀걸이가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북창 대평리유적(大平理遺跡)의 제 1호 석관묘에서 2개의 부정형 곡옥(不定形曲玉)이 출토되었고, 또 제 4호 석관묘에서 각각 1개씩의 곡옥이 출토되었다. 이 곡옥들은 아래턱뼈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귀걸이임이 틀림없다.
초기 철기 시대에 속하는 운성리유적(雲城理遺跡)의 제 6호 움무덤에서 남색 유리로 만든 귀걸이가 출토되었는데, 모양이 긴북(長鼓)과 유사하다.

3)목걸이
선사시대 목걸이에 쓰인 수식품은 여러개가 발견되었는데, 연결된 끈이 남아있지 않아 전체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서포항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짐승이빨로 만든 것이며, 궁산유적에서는 감람색을 띈 옥석으로 만든 납작한 도끼모양이다. 춘천 교동유적의 유품은 백마노제로 통형관옥이다. 청동기 시대 목걸이의 재료로는 유리, 수정, 마노, 호박, 활석, 백토 등이 쓰였다.

4)팔찌
손목에 팔찌를 끼는 습속은 아주 이른 옛날부터 있었다. 신석기 시대의 서포항 유적, 웅기 송평동 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등에서는 조가비의 복판 부분을 깬 다음에 갈아서 만든 조가비 팔찌가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옥제 팔찌와 청동제 팔찌가 쓰였는데 창효리의 움무덤에서는 너비 1cm정도의 청동판을 감아서 만든 팔찌가 출토되었다. 또 회령 연대봉유적의 제 4호 움무덤에서는 유백색(乳白色) 반투명의 마노팔찌가 출토되었는데 그 바깥지름은 5.78cm이다.
그리고 초기 철기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팔찌는 모두 청동제이다. 무산 호곡유적의 제 17호 집자리에서 드러난 것은 청동을 단순히 감아서 만든 팔찌이고, 마산 성산패총에서 드러난 것은 안지름이 7.5cm이다.
이밖에 영천 어은동유적에서는 청동팔지 8개가 발견되었다.

5)반지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나진 초도유적의 움무덤에서 출토된 청동판을 감아서 만든 청동반지가 있다. 태성리 유적의 제 4호 목관움무덤에서는 은선을 가지고 한겹으로 만든 지름 2cm, 두께 1.5cm의 은반지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로 보아 반지끼는 습속도 오래된 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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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


장신구(裝身具)란 신체 일부에 직접 쓰거나 걸거나 또는 끼는 장식품과, 의복의 장식을 위해 붙이거나 매거나 또는 늘어뜨리는 소품을 지칭하며 그 외 모든 장식 목적에 필요한 소구까지를 포함한다. 그 종류에는 허리띠, 팔지, 반지, 귀고리, 목걸이, 노리개, 머리장식품 등이 있으며, 장신구의 기능은 인간의 원초적인 미적의식을 나타내주는 장식적(裝飾的) 기능과 함께 악령을 퇴치하는 주술적(呪術的)인 기능, 그리고 부와 권력의 표시수단인 신분적(身分的)기능이 있다.
장신구는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 의생활의 양상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천하고 발달하였다. 또한 제도가 바뀜에 따라 장신구의 규제로 인하여 양상을 달리하여 그 시대의 특질을 잘 나타내었다.
장신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는데 신석기 시대에는 옥석을 갈아 만든 관(管)모양의 옥이나 짐승뼈로 만든 목걸이의 장식을 사용하여 장식과 아울러 주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장식하는 특성이 강화되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귀고리, 반지, 팔지,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기본 의복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신구는 고려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儒敎思想)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부덕이 강조되었으므로 일반 부녀자의 몸치장에는 어느정도 제한이 있었다. 곧 이러한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일반 서민의 경우 혼례복(婚禮服)을 입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금과 은의 사용이 제한되어 삼국시대의 찬란한 금속 장신구 문화에 견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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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 론


우리의 화장문화는 자연과 친화력을 갖고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그리고 손수 공들여 만들어 쓰는 화장품의 대부분이 그린 화장품으로 특히 에스테틱과 헤어 케어에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현대 화장품을 살펴보면 국내외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바이오공법(Bio-Technology)이 소개되어 화장품이 '생명'의 차원에서 개발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편 세계의 관심이 동양의 신비로움에 모아지면서 인삼을 비롯하여 당귀, 영지, 의이인, 감초 등의 성분을 주조로 한 한방 화장품이 인기가 있었다. 한방 화장품은 잔주름 방지와 색소 침착 방지 효과에 효능을 보이면서 특히 중년층을 중심으로 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리고 금의 이온효과가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 하여 금이 포함된 화장품이 개발되었다.
이어서 천연허브를 중심으로 그린제품이 등장하여 좋은 향취를 맡으면 심신의 안정 및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다는 이론으로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효과등이 있었다.
이러한 동향은 90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화장품 개발의 소재면에서 천연원료로 해조류 등 자연 지향형이면서 유해산소로부터 피부보호나 피부노화방지, 피부트러블 방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에 계속 관심이 있으며 또 패션성이 높은 제품과 약품 성격의 화장품이 등장했다.
요즈음 천연 화장품이 유행이란다. 후기 산업사휘의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토탈 패션의 복고풍과 함께 천연 화장품이나 한방 화장품으로의 회기현상은 우리의 화장문화 전통 속에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尹蓮重(피어리스 아미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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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장품 원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 이래 벽화고분의 화장한 인물들, 출토된 화장용기와 도구들 그리고 조선시대의 풍속화와 미인도 등은 남아있는 기록들과 함께 우리의 화장문화를 고증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화장품의 내용물인 원료에 대한 사료가 빈약하므로 민가에서 구전되는 경험담 등을 참고로 하여 구한말 전후까지의 화장품 원료와 사용법을 그 유래와 함께 정리해 본다.

1)분화장(분백분, 색분)
분꽃씨, 쌀가루와 서속가루, 조개껍질을 태운 분말, 진주가루, 곱돌가루, 칡을 말린 가루등이 백분의 원료이다. 분꽃씨를 절구나 맷돌에 갈아 체에 쳐서 만든 분말을 분합에 담아두었다.


화장할 때 적당량을 분접시에 덜고 분수기(분물그릇)의 물로 개어 얼굴의 위에서 부터 아래로 바르고 누에고치집(퍼프)으로 펴 준다. 이 때 분수기의 물은 아침이슬을 받아서 사용했고 상류층은 겨울에 받아 둔 납설수(육각수)를 담아 썼다. 또 분 바르기 전에 명주실이나 무명실 두가닥을 사용하여 한쪽 끝은 발바닥으로 누르고 또 한쪽 끝은 양손으로 말아 쥐고서 얼굴에 대고 비비면 솜털이 제거되었다.
분세수란 덩어리 백분을 개어 바르고 세수하는 것으로 여자는 물론 성춘향가에서 보듯이 남자들도 하였다. 분세수를 하면 투명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옅은 화장을 할 때 했다. 연분은 납이 주원료이고 초를 첨가하여 화학반응을 한 것으로 백분에 비해 피부 부착력이 좋은 장점이 있다. 색분은 황토 또는 백합의 꽃술가루가 원료이다.
분은 <삼국사기>의 신라 화랑이 분 바르고 단장했다는 기록 외에도 중국의 <수서><고려도경>등을 보면 백분을 즐겨 바른 것을 알수 있다. 연분은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일본으로 제조기술을 전수하였다. 그러나 연분은 자꾸 바르면 연독피해가 있었다. 1916년부터 박승직 상점에서 판매한 유명한 박가분(朴家紛)도 연분이었다.

 
-최초의 근대적인 화장품 "박가분" , 공산품 1호
 

일본 강점기에는 박가분 외에도 서가분, 서울장분, 가정분, 미쓰와분, 사꾸라분 등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뿐 아니라 19세기 유럽 전역에 연분이나 수은연지, 수은분이 유행했으나 피해가 속출하자 곧 자취를 감추게 된다. 색분은 창백한 안색을 생기있게 보여 주므로 부분적으로 분에 섞어서 사용하기도 하고 쌍영총벽화의 여인처럼 오렌지색 아이섀도로 바를 뿐 중국이나 일본처럼 홍장(紅粧)은 유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조 말에는 백분을 바르는 기녀와 구분한 듯 민가에서는 복숭앗빛 색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2)눈썹화장
송연먹(관솔먹), 달개비 꽃잎 태운 재, 버드나무, 굴참나무, 밤나무의 목탄, 목화꽃 태운 재, 참깨 그을음 등이 눈썹먹의 재료이다. 원료에 따라서 검정색, 검푸른 색, 짙은 밤색, 회색, 자색 등 다양한 색이 만들어 졌다. 눈썹먹을 참기름에 개어서 그리거나 유연, 홍화, 금가루, 밀기름을 배합하여 가는 솔로 아미장(蛾眉粧)을 했다. 그러나 일반 빈농가에서는 아궁이 숯검댕이나 보리깜부기를 이용함이 많았는데 이것은 쉽게 지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옛 시절 화장한 사람을 분대(粉黛)라고 부른 것에서 눈썹먹이 분과 함께 꼭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썹은 얼굴의 균형미를 잡아줄 뿐만 아니라 관상학에서도 중요해서 였으리라. 고구려 벽화의 여인들은 눈썹이 반달 같거나 약간 찡그린 모습이다. 옛 미인의 눈썹을 아미(蛾眉)라 했다. 아미란 누에 나방의 더듬이 같은 형상으로 마치 초사흗날 달처럼 가늘게 휘어진 여성적인 눈썹을 말한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눈썹 그리는 법 십미명(十眉銘)이 있지만 열가지가 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것은 아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아황(鴉黃)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눈썹을 그리기 전에 눈썹라인 주변에 황색을 먼저 바르는 것으로 부드럽고 자연스런 모습이 되었다. 아황그리는 것이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 세련된 화장법으로 있었던 듯하다.

3)연 지
연지곤지의 주원료는 주사(단사) 또는 홍화(紅花)이다. 주사는 선홍색의 광물질로 난황과 명반을 섞은후 생초주머니에 넣고 중탕하여 만드는 빨간 색소이다. 색이 선명하고 윤기가 있으나 중독성이 있다. 홍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1년생 화초이다. 홍화는 7월경 개화한 꽃잎이 붉어지자 마자 새벽에 따서 절구에 찧고 베로 짜서 그늘진 곳에서 천천히 말리고 가루를 만들어 물 뿌리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체로 친후 환약처럼 만든다. 이것을 쓸때는 기름에 개어 솔로 그리거나 둥근 연지도장으로 찍었다. 빈농가의 경우에는 붉은 고추 말린 것 뒷면에 한지를 덧대고 둥글게 오린 후 양볼과 이마에 붙였다.


연지는 평상시에는 입술연지를 바르고 혼례 때는 볼연지와 이마곤지를 하는 풍습이 최근까지 전해 오고 있다. 고구려 안악 3호 벽화의 여주인공은 실제보다 축소된 입술화장을 하고 있어서 당시 앵두 같은 입술모습이 선호되었음을 짐작케한다. 수산리 벽화와 쌍영총 벽화에는 연지, 곤지한 여인이 있고 신라 미추왕릉 출토의 유리목걸이 속의 여인도 그렇다. 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남자 무용수들이 곤지를 찍었다 했고 일본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 담징은 일본에 연지를 전해 주었다. 한편 중국 당이나 일본 나라시대의 미인들은 화려한 문양의 꽃도장을 찍었지만 우리는 둥근 모양으로만 찍고 있어서 독자적인 미의식으로 여겨진다.

4)향 유
향유는 장미, 난, 해당화, 수선화 등 향기 좋은 식물의 화즙을 체취하여 기름에 개어 사용하고 말린 향나무(백단향 안식향) 분말을 보관했다가 옷에 뿌리거나 훈증하고 목욕물에 풀어 쓰기도 했다.

향로에 향을 피우면 방향제가 되었고 심지어는 난초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켜고 향을 복용한 동자를 곁에 두는 호사도 있었다. 향기 짙은 사향은 궁중이나 기방에서 지니고 있었다. 향갑노리개, 향낭, 선추에 매단 향은 한충향 등으로 동식물의 좋은 향을 합해서 제조하였다. 민가에서는 옥잠화 봉오리에 백분을 한지로 싸서 매달았다가 꽃향기가 스며들면 그 향기와 함께 바르기도 하였다.
향은 고대부터 오랜 역사가 있는 대표적인 화장품이다. 사람의 인품을 고상하게 하고 곽란 등에는 구급약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93년 12월 말에는 부여 능산리에서 아름다운 백제시대의 금동향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온달의 아내인 평강공주의 몸에서 꽃다운 귀한 향내가 났다 했고 신라 미녀 김정란은 국색으로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기록하고있으며 <삼국유사>에는 묵호자가 신라 왕녀를 위해 향을 피우고 축원했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면 당시에도 플로럴향, 머스크향 등 각종의 향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공장(工匠)의 내의원에는 분장과 향장이 있어서 분과 향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궁중에서는 여인은 물론 승지들까지도 향낭 패용이 의무적이었다.

5)화장수
박줄기즙, 수세미줄기즙, 수세미 삶은 물, 오이즙, 수박즙, 유자씨즙, 토마토즙 그리고 창포, 박하, 당귀, 홍화, 복숭아잎과 오말류, 느릅나무단풍 등을 우려낸 물은 스킨케어로 얼굴빛을 윤택하게 하는데, 이들을 계절에 따라서 구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납설수(臘雪水)는 미백효과와 기미제거에 좋아서 최상의 화장수였다.
또 계란과 살구씨 분말 섞은 것, 꿀과 마늘 섞은 것, 밀납을 기름에 용해한 것등은 미용 팩으로 보습효과가 뛰어난 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옅은 화장을 즐긴 우리의 옛 여인들이 피부미용에 정성을 드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집 주변의 화초와 야채류에서 화장수를 찾은 지혜는 매우 놀랍다. 특히 유교이념이 철저했던 조선조의 반가 여인들에게 색조화장은 터부시되어 더욱 청결 화장품과 기초 화장품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6)화장유
머릿기름 중 동백기름은 접착성이 강하고 윤택하고 쉽게 건조되지 않아서 애용되었다. 그러나 가격이 비싸서 일반인들은 쌀겨기름이나 아주까리씨, 수유씨, 목화씨, 살구씨, 순무씨, 배추씨, 붉은 차조기씨의 기름을 썼고 호도의 푸른 껍질 등으로 검고 윤이 나게 했다. 이때 기름은 풀솜에 적셔서 머리 밑에서 위로 발라 주었다. 또한 밀기름은 밀납에 기름을 섞어 끓인 것으로 접착성이 강했다. 살구씨, 봉숭아씨, 유채꽃씨, 참깨, 들깨, 쌀, 보리등의 기름은 눈썹먹과 연지의 용해제로도 쓰였던 에센스였다. 한편 돼지기름 같은 동물의 지방은 동상을 예방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서민들의 크림이었다.
화장유는 화장수와 함께 탄력 있고 윤택한 피부로 가꾸어 주기 때문에 노화방지를 위한 꾸준한 관심과 노력으로 피부관리약재로서도 오랜 역사가 있다.

7)비 누
팥, 녹두, 콩을 가루로 만들어 꿀로 반죽하여 말렸다가 세수비누로 썼다. 쌀뜨물에 세수하고 쌀겨주머니를 물에 풀어쓰거나 창포나 콩깍지 또는 보리 삶은 물로 세안하였다. 팥 등 콩과 식물에 있는 사포닌 성분에 클렌징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류층은 창포탕, 쑥탕, 난탕에서 목욕을 했다. 세탁할 때엔 짚잿물이나 묵은 오줌을 썼고, 어린아이 오줌으로는 세수도 했다. 또 5월 단오에는 창포물(창포뿌리를 달여서 우려낸 물)에 머리 감고 목욕하는 것을 남녀 모두 즐겼다. 그리고 창포 뿌리를 대칼로 얇게 저미고 찧어 가루로 만들어 두고두고 사용하기도 했다. 창포는 세척과 미용을 겸한 물비누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모든 제천의식에 목욕은 필수였으므로 또 깨끗한 몸을 위한 비누가 만들어졌다. 일본 평안시대에 한증탕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수입된 증기 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불교의 영향으로 목욕이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생활화되어 목욕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서적인 <온실경(溫室經)>에도 목욕에 필요한 물건 7가지 중에 팥비누가 있어서 비누 발달에 영향을 준 것을 알수 있다. 또 <고려도경>등을 보면 고려시대 개울에서 남녀가 목욕을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실내에서 부분욕을 자주한 듯 집안에 크고 작은 각종의 대야를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교의 영향이라지만 혜원의 풍속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름날 개울에서의 목욕은 옷으로 가리면서도 해 온 것이다. 개울가에는 반드시 창포 따위를 파는 방물장수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8)손톱화장
봉숭아 꽃잎을 절구에 빻아서 손톱에 매어 하룻밤 자고 나면 손톱에 고운 물이 들었다. 이때 매염제로 백반(명반)이나 소금등을 사용했다. 또 남원 윤씨의 내간(南原尹氏家內簡)을 보면 봉숭아꽃과 잎을 말려 부비어 경대 속에 두고 일년 내내 물들이기도 했다.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는 것은 아름다움 외에도 붉은색이 액을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어서 엄한 조선시대를 이어 오늘에 이른다.
이러한 원료들은 장독대 울타리 등 집 주변에서 흔히 구하여 자가제조 할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꽃은 밤에 피는 것이 많다는 것으로 분꽃, 박꽃, 달맞이꽃.....등은 달의 정기를 받아 밤에 피는 꽃으로 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대보름날 밤에 분을 바르면 버짐이 안 핀다는 속설이 있어서 강한 믿음을 갖고 널리 퍼지기도 했다. 구전되는 원료들은 중국의 <의심방><본초강목> 조선시대 <동의보감>등 한의서에 약재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다. 부작용이 예방되는 화장약재로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 화장품은 육의전(가발, 거울, 분, 연지, 장신구 등)과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사상들 그리고 방물장수들이 매매하기도 했다. 품질이 좋다고 소문난 것은 값이 비쌌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홍화를 이시(利市)라 했는데 비싼 값이어서 사고 팔기에 이가 남은 잇꽃이란 뜻이다. 또 납설수(臘雪水) 한 홉이 쌀 한말과 같은 값이었고 옛말에 "창포 한 됫박에 안 넘어갈 기생이 없다"고 했다. 한편 유명한 박가분은 일본 강점기의 허가 받은 근대 화장품의 효시였는데 대갑 1개에 3원이나 하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는 10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인들은 각자의 품위와 사정에 맞게 화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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