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가례(朱子家禮)의 혼속(婚俗)
한해 4계절중에서도 봄, 가을의 두 계절을 흔히 가절기(佳節期)로 친다. 전에는 흔히 이러한 가절을 맞이해서 해묵은 일들을 별러서 서두르게 되는데 지금도 흔하게 있는 일이긴 하다. 이 무렵이면 특히 인륜대사로 치던 그 중에도 경사이던 혼례식이 처처에서 실버들 움순트듯 해서 그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게 된다. 요지음에는 이를 흔히들 결혼 '시즌'이라는 편리한 말을 만들어 쓴다. 이러한 결혼'시즌'을 맞으면 시중에 숱하게 불어난 그 많은 예식장에는 인파로 술렁거려서 한 대목을 이루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이와 곁들여서 많은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으레건 따라붙게 되는 청첩(請牒)이 집집으로 송달되는 납입고지서처럼 어김없이 찾아서 날아드는 철이기도 하다. 일찍이 우리네의 혼속은 주자의 가례를 본을 받아서 행해졌었다.
그리고 혈통의 순결과 과부의 수절과 여인의 정조관은 예교(禮敎)의 본 고장보다도 더욱 떠 받들어서 굳게 지켜져 내려왔다. 부부일심동체라 해서 살을 대고 피를 섞어서 한몸이니 행여 헤어지거나 달리 갈라설 꿍심일랑 엄두조차 용서치 않았었다. 여기에 곁들여 남존여비의 사고는 딸자식을 시집 보내면 출가외인이라 해서 애초에 시집 귀신으로 몰았다. 삼종지덕(三從之德)은 부도(婦道)의 근본이요 지아비에게 버림받은 신세나 다름없는 소박떼기로 내몰려도 말없는 인종만을 부덕의 으뜸으로 치던 시절.
여성상위시대라는 새말이 나도는 요지음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아임에 틀림이 없다.
전에는 대개의 경우 중간에 사람(매파,媒婆)을 넣어서 통혼(通婚)의사를 비추어 보고 양가의 의견이 맞아서 피차간에 허혼(許婚)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에 신랑 집에서는 먼저 신랑의 사주단자(생년,생월,생일,생시)를 신부 집으로 보내게 된다. 신랑될 사람의 사주단자를 받게 되는 신부집에서는 으례건 딸자식의 사주와 견주어서 둘사이의 궁합을 맞추어 보게 되는데, 둘사이의 궁합이 합당하게 맞아 떨어져서야 길일을 가려서 혼인날짜를 며칠쯤 잡아가지고 신랑집에 통고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유의해서 볼것이 있다.
전처럼 남존여비의 사상이 절대적인 것이 혼례풍습이었건만 오직 한가지 택일단자(擇日單子)만은 신부측에게 우선권을 준 점이다. 혼기에 찬 처녀라면 누구나 있게 마련인 매월 손님으로 불리던 딸의 생리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으로 해서 이런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혼 초야(初夜)의 낭패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했다. 한편 혼인날을 받게되면 이에 앞서 신랑될 총각은 우선 관례(冠禮, 일종의 성년식)부터 치러야 했다.
지금처럼 예식장만 거쳐서 나오면 되는 그러 '인스턴트'식의 신랑(新郞)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신부(新婦)의 경우는 또 다르다. 혼례날 신방(新房)에서 신랑이 머리에 얹은 낭자 족두리를 벗겨줌으로써 관례(冠禮)치례가 된다. 남자의 관례는 총각시절에 길게 등 뒤로 땋아 내렸던 머리채를 머리위로 걷어 올려 상투를 틀고 관(冠, 草笠,초립)을 쓰게 된다.
이것은 남아(男兒)에서 성년(成年)이 되었다는 표시도 되는데, 이 때에 집안 어른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관례잔치를 베풀어 준다. 그래서 이 행사(行事)를 사당에 고하고 장유(長幼)의순(順)을 따라 가면서 인사를 드림으로 새 어른됨을 인정 받는 것이다.
이처럼 혼일날에 앞서서 관례가 끝나면 新郞 집에서는 초저녁 쯤 해서 新婦 집에 봉치함(函)을 보내게 된다. 開化되었다는, 요지음의 신식 결혼에서도 이 봉치함의 풍습만은 용케 견디어 내려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