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선보기

물론 전과 지금과는 봉치함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맣은 차이가 있다. 전에는 지금과는 달리 新郞측 집안과 가까운 연로(年老)한 부인중에 부부해로하고 자손이 외롭지 않은 유복자(有福者)를 골라서 함군과 등불잽이들을 인솔하게 된다. 그래서 전에는 봉치함 값의 홍정도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요 함군이나 등(燈)불잽이인 하대(下待)사람들의 노고자비(勞苦資費)로 해서 신부집에서는 알게 모르게 약간의 돈을 찔러 넣어주고 함에 두르던 멜빵천인 광목필도 그대로 내주었다.

그리고 음식과 술을 후하게 대접한다. 한편 봉치함을 받게되는 신부집에서는 시루떡을 쩌서 대청마루에 소반을 놓고 그 위에 시루떡을 시루째 올려 앉혀서 봉치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쯤되면 수다스러운 동리 아낙네들이 구경군으로 꼬여 들어서는 연방 '오늘 봉치함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을까'하면서 제일 처음 흥분들을 해서 수근덕 대면 입방아를 찧어댄다,

본래의 봉치에는 청단(靑緞).홍단(紅緞)을 갖추어 넣으면 그만인 것을 어느결에 군살이 붙고 덤이 끼어서 값진 물건으로 형세자랑을 하고 그런 악습을 낳게 된 것이다. 내 집에서는 이러한 봉치함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화 하나가 있다. 나의 선조중에 한분은 신랑될 당자의 인물됨이 비범하다 해서 안(부인)에서야 뭐라건 일방적으로 혼인을 정해서 딸자식을 출가시키기에 이르러 봉치함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신랑집의 문벌(門閥)은 괜찮은데 워낙이 살림 형세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상 봉치함을 받아서 뚜껑을 열고보니 이런 낭패가 있을까. 함 안에는 청(靑).사단( 緞) 만이 댕그러니 눈에 띄는데 그 나마도 자세히 보니 창호지에 물감을 드린 가짜 청.홍단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기막히고 창피한 일은 고사하고서라도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찌나 원통했던지 이내 집안은 눈물바다를 이룰 수 밖에..... 전에만 해도 바깥(남편)에서 하는 일을 부녀자로서 왈가왈부하며 대서고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안엔 때 아닌 먹장구름만 끼었는데 후일 그 봉치의 임자이던 신랑이 나라의 대신지위(大臣地位)에 오를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결혼에도 양가의 재력이 문벌(門閥)을 앞질러서 모든 척도의 가늠 구실을 가게 되지만, 전에는 문벌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한켠이 기울면 낙혼(落婚)이요 보다 웃길이면 앙혼(仰婚)이라고들 해서 희비쌍곡의 일화와 말썽도 적지아니 빚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연애 결혼은 전체 결혼에 대해 차지하는 비중이 그 과반수를 휠씬 상회하는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연애결혼이라는 것이 십중팔구는 두 사람의 눈에 맞아서 그제야 집안 어른을 찾아 뵙고 '우리 사이가 이쯤 되었으니 불가불 결혼해야 하게되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는 식이다.

이와는 달리 전에는 세상 구경도 못한 뱃속에 든 태아(胎兒)를 두고 양부모(兩父母)끼리 정혼(定婚)해 버리는 예가 없지 않았다.

흔히 가까운 집안이면 그 어른들끼리 뱃속에 든 자식을 가지고 미리부터 두아이(성별이 다른 경우)를 정혼시켜버리는 무모한 페습이 있어왔다.

또한 전날의 혼인은 대개의 경우가 중매를 해서 통혼(通婚)을 트되 우선 문벌을 따져서 막상막하여야만 별말없이 혼사가 이루어 졌었다. 또한 이처럼 혼인이 중매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하지만 당사자인 신랑 신부의 맞선은 그나마 개화 이후 훨씬 뒤의 일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보기도 양가(兩家)의 입장이 달랐다. 사위로 맞이할 신랑될 총각의 선은 빙장 어른될 사람, 즉 딸 자식을 출가시킬 신부 아버지가 직적 볼 수가 있었지만, 한편 자부(子婦)를 맞는 시아버지의 입장에 있던 신랑의 아버지는 며느리가 될 신부이건만 직접 대놓고 선을 보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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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朱子家禮)의 혼속(婚俗)

한해 4계절중에서도 봄, 가을의 두 계절을 흔히 가절기(佳節期)로 친다. 전에는 흔히 이러한 가절을 맞이해서 해묵은 일들을 별러서 서두르게 되는데 지금도 흔하게 있는 일이긴 하다. 이 무렵이면 특히 인륜대사로 치던 그 중에도 경사이던 혼례식이 처처에서 실버들 움순트듯 해서 그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게 된다. 요지음에는 이를 흔히들 결혼 '시즌'이라는 편리한 말을 만들어 쓴다. 이러한 결혼'시즌'을 맞으면 시중에 숱하게 불어난 그 많은 예식장에는 인파로 술렁거려서 한 대목을 이루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이와 곁들여서 많은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으레건 따라붙게 되는 청첩(請牒)이 집집으로 송달되는 납입고지서처럼 어김없이 찾아서 날아드는 철이기도 하다. 일찍이 우리네의 혼속은 주자의 가례를 본을 받아서 행해졌었다.

그리고 혈통의 순결과 과부의 수절과 여인의 정조관은 예교(禮敎)의 본 고장보다도 더욱 떠 받들어서 굳게 지켜져 내려왔다. 부부일심동체라 해서 살을 대고 피를 섞어서 한몸이니 행여 헤어지거나 달리 갈라설 꿍심일랑 엄두조차 용서치 않았었다. 여기에 곁들여 남존여비의 사고는 딸자식을 시집 보내면 출가외인이라 해서 애초에 시집 귀신으로 몰았다. 삼종지덕(三從之德)은 부도(婦道)의 근본이요 지아비에게 버림받은 신세나 다름없는 소박떼기로 내몰려도 말없는 인종만을 부덕의 으뜸으로 치던 시절.

여성상위시대라는 새말이 나도는 요지음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아임에 틀림이 없다.

전에는 대개의 경우 중간에 사람(매파,媒婆)을 넣어서 통혼(通婚)의사를 비추어 보고 양가의 의견이 맞아서 피차간에 허혼(許婚)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에 신랑 집에서는 먼저 신랑의 사주단자(생년,생월,생일,생시)를 신부 집으로 보내게 된다. 신랑될 사람의 사주단자를 받게 되는 신부집에서는 으례건 딸자식의 사주와 견주어서 둘사이의 궁합을 맞추어 보게 되는데, 둘사이의 궁합이 합당하게 맞아 떨어져서야 길일을 가려서 혼인날짜를 며칠쯤 잡아가지고 신랑집에 통고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유의해서 볼것이 있다.

전처럼 남존여비의 사상이 절대적인 것이 혼례풍습이었건만 오직 한가지 택일단자(擇日單子)만은 신부측에게 우선권을 준 점이다. 혼기에 찬 처녀라면 누구나 있게 마련인 매월 손님으로 불리던 딸의 생리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으로 해서 이런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혼 초야(初夜)의 낭패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했다. 한편 혼인날을 받게되면 이에 앞서 신랑될 총각은 우선 관례(冠禮, 일종의 성년식)부터 치러야 했다.

지금처럼 예식장만 거쳐서 나오면 되는 그러 '인스턴트'식의 신랑(新郞)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신부(新婦)의 경우는 또 다르다. 혼례날 신방(新房)에서 신랑이 머리에 얹은 낭자 족두리를 벗겨줌으로써 관례(冠禮)치례가 된다. 남자의 관례는 총각시절에 길게 등 뒤로 땋아 내렸던 머리채를 머리위로 걷어 올려 상투를 틀고 관(冠, 草笠,초립)을 쓰게 된다.

이것은 남아(男兒)에서 성년(成年)이 되었다는 표시도 되는데, 이 때에 집안 어른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관례잔치를 베풀어 준다. 그래서 이 행사(行事)를 사당에 고하고 장유(長幼)의순(順)을 따라 가면서 인사를 드림으로 새 어른됨을 인정 받는 것이다.

이처럼 혼일날에 앞서서 관례가 끝나면 新郞 집에서는 초저녁 쯤 해서 新婦 집에 봉치함(函)을 보내게 된다. 開化되었다는, 요지음의 신식 결혼에서도 이 봉치함의 풍습만은 용케 견디어 내려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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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빈녀(貧女)의 회소곡(會蘇曲)

추석(음력 팔월 보름날)을 한가위(한문으로 嘉俳)로도 흔히 병칭(竝稱)해서 부르게 되는데 특히 농경(農耕)을 본으로 삼던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수확되는 그해의 초수(初穗)를 조상의 영전에 바치는 풍속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해마다 추석때면 궁향하중(窮鄕下中)에 이르기까지 신곡(新穀)으로 술을 빚고 백과와 돼지, 닭을 잡아서 즐기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위날만 같아라'하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가위날이 즐거운 명절임에는 두 말할 나위도 없겠다. 본래 추석이 천신제(농공 추수감사제)로서도 그 의의가 큰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러한 천신제가 지방에 따라서는 그 사정을 약간씩 달리 하는 것을 엿보게 된다. 추석이 일반적으로 성행되기는 중남부지방이고 북부지방에서는 단오절을 보다 크게 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수도재배(水稻栽培)에서 오는 경작에 따른 기후조건과도 크게 관계가 있고 특히 경북지방의 서북부지역에서는 1년 수확기가 추석때 보다는 아무래도 늦어지게 마련이어서 조령(祖靈)에 천신(薦神)의 행제(行祭)를 중양절(음력 구월 구일)에 가서야 올리게 되므로 이날이 농공 추수감사제에 맞먹게 되어 명절답게 즐긴다고들 한다. 이러한 천신제와는 달리 일찍이 우리의 고속(古俗, 신라때)에는 여인들의 삼길삼(績麻)을 겨루던 경쟁적인 '게임'이 거행되던 것을 기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날이면 나라(신라)에서는 나라안의 여인들을 크게 두패로 나누어서 왕녀로 하여금 각기 한편의 편장(便長)으로 삼아서 편을 짰다고 한다. 그래서 백종날(음 칠월 보름날)부터 가위날까지의 만 한달동안을 아침에서 저녁이 늦도록 여인들은 삼길삼을 부지런히 서둘러서 가위날에 판가름을 내어서 승패를 가리게 된다고 한다.

이때에 패자는 승리자에게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대접을 하게끔 된다. 그로부터 사흘 밤낮을 진탕 노래와 춤으로 어울려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길삼 내기에 진 어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하나 덧붙이고 넘어가기로 하자.

하필이면'잔치날에 배탈 난다'는 격으로 가위날에 승패를 가리던 길삼 경기에서 어느 빈한한 여인이 진축에 끼어들게 되었다 한다. 말하자면 그녀의 가난한 살림 형편으로는 패자가 승자에 대해서 부담하게 되는 술과 음식을 도저히 마련할 도리가 없는 그런 딱한 사정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진 벌로 분담하게 된 그녀의 몫을 시치미 뗄 수만도 없는 것이 그날의 실정이었나 보다. 이런자에 궁여지책으로 노래를 하나 지어서 부름으로서 벌땜을 하게 되었는데 바 그 노래가 오늘까지도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라가곡중의 하나인 회소곡(會蘇曲)이라고도 전해진다.

이날에 여인이 부른 노래의 곡조와 사설이 어찌나 애절하였던지 만좌(滿座)한 회중(會衆)들의 심금을 뒤흔들어 이로부터 '회소 회소 구슬픈 회소' 하는 회소곡(이두체)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입에서 애창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러 세시기에서 보면 추석을 '연중최중지(年中最重之)한 명절로 떠 받들긴 하지만 농촌과는 달리 서울에서는 그다지 떠들법석한 명절축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어린시절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명절답기는 설날이나 파일날, 단오날이 명절답게 느껴지고 추석은 한식 때처럼 집에서 다례나 지내고 성묘나 가는 그런 날쯤으로 여겨졌었다.

서울에서 추석이 명절답게 느껴지기는 귀성객이 붐비면서 서울역의 경기가 그 절정에 이르던때 부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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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날에나 연지바르고

본래 할머니(媤祖母)와 손자 (孫子) 며느리간은 시어머니와 달리 그 사이가 애당초 다르게 이루어져 나간다. 손자며느리가 할머니 입장에서는 곧잘 할머니의 말벗이나 시중을 들어주는 없지 못할 존재요 손자며느리 켠에서도 매사에 엄하고 잔소리에 핀잔많은 시어머니와는 다른 할머니에게 등을 대고 정을 나누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이인지라 종종 재미나는 어리광대가 벌어지곤 한다. 어쩌다가 시할머니는 볼 일이라도 생겨서 나들이를 하는 경우가 없지않다.

그러면 그 시할머니는 제일 무관한 손자며느리에게 대고 '얘야 거 얼굴에 바르는 구루만가 뭔가하는 찍어 바르는 것좀 얻자꾸나'한다. 그러면 이 소리에 손자며느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시피 하면서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기 마련이다. '할머니두 구루마가 뭐예요. 그건 구루마가 아니고 구루무예요'하면서 제법 아는 체를 해서 대꾸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할머니도 하여 '

얘야 뭬면 어떠냐 쬐금 찍어 바르면돼'하면서 손을 벌려 온다. 이처럼 일산(日産)'크림'은 한때 우리네 가정 깊숙히까지 파고 들어서 여인의 손길에서 떠날줄을 몰랐었다. 어찌 한낱 우스개 이야기로만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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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낮도깨비 보게

그래서 멀쩡하게 고운 여인의 피부가 납중독으로 하루하루 썩어져 들어가는 결과를 자초한격이 되고만 셈이다.

그지음 여인들 간에도 이러한 피해를 전연 의식하지 못한 바는 아닌 듯 화장독이라고들 해서 곧잘 입에는 올랐지만 그래도 손을 못떼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렇게 되어 얼굴의 살갗은 나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특히 화류계 여성들인 경우 그 피해의 도는 더했다. 그녀들로는 하루에도 몇차례 몸치장이나 얼굴 화장을 거를 수 없는 처지에서 더욱 그랬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한차례 두차례 회를 거듭할수록 피부는 납중독으로 인해 시퍼렇게 변색되어 가고 이렇게 썩어만 가는 흉한 살갗을 감추려고 나중에는 좋든 궂든 분가루로 회(灰)바가지를 들쓰듯 해야 하는 딱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도 산 목숨이라 볼 일은 있게 마련이어서 화상(畵像)같은 짙은 화장 얼굴로 백주대로상에라도 나설양이면 '저거보게나, 저게 분명 사람은 아닐테고 낮 도깨빈가 본데 어이 무서워'하는 짓궂은 어느 패거리의 희악질쯤 각오를 해서 단단히 채비를 차려야 하리라.

차라리 생활에 쪼들려 그나마 차례도 못가는 여인네들의 형편이 이보다는 훨씬 낫다. 항용 그지음 가난한 여인들이 즐겨 바르던 분가루로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한다. 쌀가루 1홉반과 서속가루(기장,옥수수,조) 1홉의 비율로 섞어서 고운 가루를 내어 분으로 만들어 쓰인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분꽃의 열매와 칡뿌리를 말려서 이것들을 곱게 빻아서 가루낸 것을 얼굴에 바르므로 해서 피부색을 돋보이게 하던 그런 재래(在來)하던 화장품(化粧品)도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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