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도

우리는 예부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작은 칼을 지니기로 되어 있었다. 그 작은 칼을 두고 패도라고도 했고 장도라고도 불렀다. 이밖에 몸에 차거나 품지 않고 주머니 속에 간직하는 칼이 있었는데 그것은 낭도, 줌치칼 또는 주머니칼이라고 불렀다. 패도는 칼몸과 칼자루와 칼집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벙어리장도의 경우에는 칼몸이 없고 칼자루와 칼집만 있다. 패도로서 큰 것은 전체의 길이가 다섯 치이고 칼몸의 길이가 세치인데 몸체가 작은 것은 세 치에 한 치 닷 푼이며 줌치칼도 세 치에 한 치 닷 푼이다. 그러나 칼의 길고 짧음은 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또 패도는 꾸밈새에 따라서 갖은 장식과 맞배기의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패도 가운데서 가장 흔한 것은 먹감나무와 대추나무로 된 것이다. 이밖에도 나무 종류로는 배나무, 화류, 화양목과 같은 것을 쓰되 칠을 하는 법이 없고 거의가 고운 손때를 묻혀가면서 쓰기 마련이다.

장도류 겉치장이 아무리 정교하고 호화스러워도 패도의 생명은 칼에 있다. 칼에 쓰이는 편철은 너무 강해도 안되고 지나치게 물러도 못쓴다. 강하고 무른것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녀자들의 패도로는 금, 은, 산호, 상아, 무애, 대모, 호박, 밀화, 황옥, 백옥, 비취 들과 같은 귀금속이나 귀석으로 꾸민 것이 있다. 특히 은장도에는 양각, 음각 또는 고각으로 십장생, 소상팔경, 초화문, 길상문자 들을 치장하거나 오색이 아름다운 파란으로 입혀서 돋보이게 한 것이 있다. 또 칼자루는 백옥으로 하고 칼집은 비취로 받쳐 희고 푸른 빛을 은은히 어울리게 꾸미기도 했고, 백옥 자루에 호박이나 대모로 칼집을 만들어 소재의 이질감을 조화시키기도 했다.

이렇듯이 겉치장이 아무리 정교하고 호화스러워도 패도의 생명은 칼에 있다. 칼에 쓰이는 판철은 너무 강해도 안되고 지나치게 물러도 못쓴다. 강하고 무른 것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쇠의 성질이 너무 강하면 잘 들기는 하나 날의 이가 잘 빠지거나 쉬 부러지고 또 무른 것이 지나치면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강하고 무름을 겸하되 칼날은 강하고 그것을 감싸는 칼몸이나 칼등은 날에 비겨 물러야 한다. 그런 칼을 쳐내려면 풀무불에 쇳덩이를 달구어 망치로 치고, 식으면 또 담금질을 해서 치고 하기를 수없이 거듭해야 한다.........

대체로 한 자루의 패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천백 번의 손길이 미쳐야 하니, 패도의 명에서 보듯이 '일편심'없이는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그 공력은 천금의 값으로도 흡족하다 할 수가 없을 만큼 값진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이나 고려의 귀인들이 패도를 찬 모습은 유물이나 사서를 통해서 이리저리 상상의 나래를 펴볼 수 있어 좋으나, 막상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이 나라 여자들이 적의 사나운 손길에서 순결을 지키려고 패도를 빼어들고 스스로의 목숨을 잃은 사연에 이르러서는 암울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게 된다. 그와 같은 정황은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적을 해치기보다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지키려고 지녔던 패도는 일상생활에서도 긴한 구실을 하는 물건이었다. 서간지나 시전지나 축문이나 지방을 자르고 어린 손자의 팽이를 깎는 데에 쓰기도 했으며, 과일 껍질을 벗기고 손톱을 깎는 데에도 썼다. 또 때로는 봄날에 먼나들잇길을 떠났다가 호젓한 길섶에서 버드나무를 만나면 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다듬는 데에도 쓰였다. 이렇게 쓰는 사이에 날이 무디어지면 숫돌에 갈아서 쓰고쓰고 하여 마침내 칼이 송곳처럼 무지러질 때까지그대로 아껴 썼다.

예부터 패도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 그냥 주고받지 않았다. 반드시 돈으로 사고 팔기 마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나 친형제 사이라도 그렇게 했다. 이럴 때에는 제 값을 다 치르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엽전 한 닢이라도 주고받았다. 그것은 패도가 물건을 자르는 구실을 하는 것이니 만큼 서로의 정의가 끊길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겠고, 더 근원적으로는 패도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겠다......

--<민중의 유산>은 민속학자 예용해선생님께서 1976년 10월부터 1980년 7월까지 월간 "뿌리깊은 나무"에 연재한 43편의 글중에서 선별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선생의 글을 편집상 부득이하게 다 싣지 못하고 줄여서 게제한 점이 못내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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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흘리게 신랑

어린 마음에도 별일이다 싶게 생각되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할멈을 피하는가 싶게 여기긴 했지만, 다른 깊은 내력이 있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이런 저런 사연을 알기로는 그 후에 가서야 일이었다. 어쨋거나 그날의 일은 출가해서 채 1년도 못되어 홀몸이 된 딸자식이 천장에 들렸다가 대청마루 위에서 친정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 받다가 이런 사단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에 미쳐 몸을 감추지 못하여 새문 할멈으로 불리던 방물장수 눈에 띄게 되면 일이 번거롭게 되기 때문이다.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댁 과수가 젊고 얌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쪽 의향이야 어찌되었건 적당한 후처 자리를 찾아서 짝을 채우려는 것이 그녀들의 천성처럼 된 습성을 너무나 환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홀몸의 딸자식을 개가시킨다는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 변(變)처럼 여기던 때라 이런 일이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곁들여서 또 한가지 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한일합방(1910)무렵 해서 항간에는 한때 왜놈들이 조혼(早婚)을 못하게 금한다는 풍설이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그때 내 나이와 얼추 맞먹던 여닐곱살짜리 벌거숭이로부터 열두서너짜리 어린애에 이르기까지 때아닌 장가 시집 풍년이 들었던 일들이 기억 난다. 내 집안은 조금 개화한 축에 들어서 요행이 나는 이러한 혼인의 북새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무렵해서 세상에는 많은 코흘리개 신랑과 신부의 배출을 보았었다. 이처럼 풍설에 들떠서 자식가진 어버이들은 이 사품에 혼사를 서두르다 보니 제대로 혼수가 마련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마련없는 핑계는 말짱 시국(時局)탓으로 돌리고 어물쩡하게 넘겨서 치르던 혼례(婚禮)도 많아져서 이 무렵의 혼례잔치라면 태반이 작수성례(酌水成禮, 물만 떠놓고 혼례를 지낸다는 뜻))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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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 할멈 드는 뎁쇼

때로는 어려운 일을 하소연하는 단골집 마나님들의 시름에 한숨도 나누고 바깥 물정을 전하기도 하여 방(房)에 귀를 티어주면서 말동무도 되고 나중에는 큰 일에 의논 상대로까지 끼어들어 집집의 경사(慶事)를 주선하는 매파가 되어 통혼(通婚)길을 트는 명수가 된다. 그리해서 대소가(大小家)의 형세와 지체를 곧잘 끼워맞추면서 혼사를 성립시켜 놓는다. 하지만 그 무렵 이러한 매파역까지 겸하는 방물장수를 극력 피하는 집안이 없지 않았다. 개화바람으로 봉건의 벽이 무너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양가집의 규제로 부녀자의 개종(改宗)에 대해서는 냉엄하리만큼 비정 그대로였다. 그러한 형편에서 불행하게 초년과부(初年寡婦)의 홀몸 신세가 되면 자의건 타의건 불견이부(不見二夫) 라는 예교(禮敎)의 쇠살슬에 매여서 열녀절부(烈女節婦)의 귀감이 되는 숙명의 길을 걷게 된다.

한 때 여항(閭巷)에서는 이와 같은 폐습의 틈을 비집고 약과혼(掠寡婚)이라 해서 야반(夜半)에 수절과부집의 담을 넘어 들어가서 과수댁을 들쳐업고 멀리 도망을 쳐서 사는 이변을 별 문제 삼지 않고 모른척 내버려두던 때도 있었다. 국법에서는 오히려 의지없는 고독한 소년(少年) 과부에게 개가를 허용했었는데 ,다만 삼가(三嫁, 세번 팔자고침)만은 실행자녀(失行恣女)로 여겨서 이를 금하던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국법이요 가내(家內)의 명예와 체통만을 먼저 생각하던 선비들이 한 술을 더 떠서 개가는 부도(婦道)에 반(反)하는 짓이요, 집안을 욕되게 하는 실절(失節)이라 하여 그 문중에서까지 들썩거려서 쌍지팽이를 들고 말리는 판이었다. 이러한 그 무렵의 실상을 제대로 엿보자면 아무래도 방물장수를 끌어 들이는 것이 십상일성 싶다.

앞에서도 잠간 비쳣지만 매파를 겸한 방물장수를 극력 피하는 집안 일수록 가만히 보면 의례 그 집안에는 초년 과부가 있게 마련이다.

나의 가족들 질안에도 配를 당한 딸자식을 가진 친척집이 있었다.

나는 어릴적에 그 댁을 자주 놀러 가면서 목격하게 된 일인데, 어느 하루 그 댁에서 부리던 계집애가 뛰어 들면서 '마님 새문 함멈이 드는뎁쇼' 하자 이말에 감전된 사람처럼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면서 과부딸이 댓돌위에 벗어논 꽃신을 낚아채기가 무섭게 소리개가 병아리 채가듯이 그 딸의 등을 밀어 붙이면서 안방 다락으로 내 몰던 광경을 목도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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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장수의 규방 출입

전에는 나라 혼인(왕이나 東宮)이 있게 되면 우선 전국에 걸쳐서 금혼령(禁婚令)이 내려지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한때마다 적령기에 든 처자들의 혼인길을 막는다. 나라에서는 도별로 자격구전(資格具全)한 처자의 단자(單子)를 예조(禮曹)에 올리게 된다. 예조에서는 다시 이를 추려서 입계(入啓)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입계된 처자의 단자(單子)는 간택(揀擇, 初.再.三 )의 어려운 절차를 거치면서 최종으로 남는 처자가 곧 왕비로 책봉(冊封)되어 무상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날 국색(國色)을 뽑는 '미스코리아' 의 선발은 경염이 그 주가 되고 다음으로 그 인품을 치게 되지만 왕비간택은 국모(國母)로서 손색이 없어야 할 자질과 덕에 치우치게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가의 일이요, 좀 더 일반적인 사가에서 행해지던 구식으로 불리던 재래 혼인의 식절차(式節次)와 그 거행은 어떠 하였을까.

지금은 신부화장을 하면 미장원(美粧院)으로 곧장 달려가서 내 맏기면 그만이다.

전에도 이러한 새색씨의 얼굴단장(化粧)과 몸치장(衣裳)은 물론 혼례날에 행할 신부의 범절일체를 도맡아서 하나하나 살피고 거드는 수모(手母)라고 불리던 아낙네가 있어서 시종 그날 잔치의 연출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큰 잔치때면 이러한 수모를 거들어서 시중드는 곁시라고 불리는 계집이 따라 붙어서 수모의 조수(助手) 역할로 일을 거들게 된다. 식은 처음에 존안청(尊雁廳)에다 교배상(交拜床)을 가운데 놓아서 초례(醮禮)로 부터 시작된다.

이 때에 신랑 자리는 동편이요 신부는 그 맞은편인 서편에 벌여서서 마주 바라보고 서게 되는데 먼저 신부가 두 번(再拜) 절을 하면 신랑은 이를 받어서 한번 절(初拜)로 응수한다, 이것을 한번 더 되풀이 하게 되는데 신부의 입장에서는 줄잡아서 전후 두 번 절을 밑지는 폭이 된다. 여기에서도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여필종부(女必從夫)해야 하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모는 신부편에 서서 신랑을 보고 먼저 절을 하라는등, 아무리 색시 인물이 잘 났기로서니 저처럼 신랑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져 쓰겠느냐 등 존안청에서 웃으면 첫딸을 낳게 된다는 등 신랑을 얼리고 놀려대면서 딱딱하기 쉬운 분위기를 제법 부드럽게 풀어서 흩으러 놓는다. 이렇게 해서 교배(交拜)가 끝나면 두 사람(신랑.신부)사이에는 교배잔이 돌아가는데 이때에도 구변 좋은 수모는 이 교배잔을 벌여잡고 있다가 신랑 신부에게 마시라고 권하게 된다.

그러면 신랑은 별 어려움 없이 넙죽 받아 마시지만 신부의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 낌새를 앞짚어서 수모는 얼른 신부의 교배잔을 신부 입술에다 대는척 하다가 대신 호르륵 마셔 버린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서있던 잔치 구경군들은 이 대목에서 영낙없이 웃음보를 떠뜨리면서 떠들게 마련이다.

전에는 토방에 드나드는 생쥐처럼 집집의 문전을 빗질하듯 모조리 돌아다니던 방물장수라는 것이 있었다.

방물장수란 지금의 보따리 행상과 엇비슷한 것이긴 하지만, 본업인 장사 속셈보다는 때로 매파(媒婆)역할과 뚜쟁이까지 겸해서 한몫 재미를 보는 조금은 색다른 존재다. 본래 방물장수란 규방세계(閨房世界)까지 무상출입하면서 여인들의 소용품인 참빗,얼레빗, 색경(色鏡),댕기,바늘, 실,골무,화장품,패물에 이르기까지 얼추 갖추어 들고서 집집으로 다니며 단골을 트고 이집 저집의 집안 형세라든가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하는 그런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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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보다 나은 딸

다만 가까운 집안 부인중에 제법 사람됨됨을 볼 줄 안다는 여인을 내세워서 신부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고 몇 마디 말을 건네보아서 그녀의 판단만을 믿어서 가부(可否) 결정을 내리는 불합리한 속풍(俗風)에 얽매이던 때도 있었다. 하기야 이런저런 이야기도 흘러간 전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 신랑이라면 사모관대(紗帽冠帶) 에 태사혜(太史鞋, 남자의 마른 신의 한가지))를 받쳐신고 은안(銀鞍, 은으로 상감한 말안장) 백마(白馬)위에 걸터 앉아 여행길을 떠났고 신부 또한 칠보단장으로 꾸며서 안면(顔面)위를 면사포(面紗布)로 가리고 오색구슬이 잔물결 짓는 가마(四人轎)타고 시집 가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다. 또한 전에는 혼인잔치를 치르고 삼일동안 신랑은 처가집에 묵으면서 신방을 치러야 하는 '3일 치르기' 의 풍습이 있었다. 이때에는 어른 애 할 것없이 특히 젊은 아낙네들의 집요한 신방 엿보기가 공공연하게 행해 졌었다.

아마도 요지음 젊은 신혼부부라면 펄쩍 뛰어 노발대발만으로 일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혼인후에도 새색시의 첫애(初兒)의 분만만은 찬바람일던 시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친정어머니를 찾아가서 몸을 풀게끔 되었었다.

또한 해산후 삼칠일(21일내) 동안은 친정에서 몸조리하며 묵었다가 시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또 한가지 내 어릴쩍만 해도 있는 형세있는 집안에서는 딸자식을 출가시킬 때 몸종으로 부리던 계집애까지 함께 딸려 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이를 조종비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되어서 딸려간 종년의 짝은 나이가 차서 적당한 혼기에 이르면 시집에서 부리던 행랑아범의 아들이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달리 신랑감을 골라서 짝을 지워 주는데 대개의 경우 행랑채 방하나를 비워주고 평생을 부려 먹었다. 내가 자라오던 서울의 혼속(婚俗)만 하더라도 딸자식 하나를 출가시키자면 그야말로 그 어버이는 혼수감 마련에 등골을 뽑히는 판이다. 의(衣)걸이, 농,이불,장,경대(鏡臺) ,이불, 보료, 사방침 장만에서부터 철 따라 입을 여러벌의 신랑의 옷가지와 당자(新婦)의 옷가지까지해서 버선짝도 몇축에 이른다. 그나 그뿐이랴. 시가(媤家)쪽 식구대로 몫몫이 챙겨서 장만이 되어야 했다. 심지어 신랑의 문방사우(文房四友)에 이르기까지 손을 써야하는 그런 실정이었다.

하기야, 지방에 따라서는 다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안 사둔켠에서 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일이 이로서 끝나면 그도 약과다. 갈수록 첩첩 산중이더라 하는 말이 실감나게 시집을 보낸 후에도 안 사둔의 입장에서는 딸의 시가인 수 사둔댁에 대해서 한시라도 마음을 누그려 뜨릴 수가 없게끔 되어 있었다.

무슨 명절때라든가 시집 식구들의 날(生日) 때에는 이를 평소부터 새겨 두었다가 일일이 예물을 보내는데 망내(막내)시아재비라 해서 그 몫을 결코 소홀히 다룰수는 없었다.

이처럼 알알이 샅샅이 손해보기만 하는 것이 안 사둔의 입장이다. 형편에 닿지 않으면 새 버섯짝이라도 꾸려서 만들어 보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 몰인사(沒人事)하다 해서 그 화가 은연중에 딸자식에게 미칠 것이 뻔해서 그 어버이로서는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데 요즈음의 세태는 조금 심한 예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딸자식의 인물이 반반해서 팔자 늘어진 시집이라도 한번 가게 되는 날에는 그 친정 붙이까지 금새 윤기가 돌아선가, 못난 아들놈 열 보다 낫다는 쓸모있는 신판(新版)효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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