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보다 나은 딸
다만 가까운 집안 부인중에 제법 사람됨됨을 볼 줄 안다는 여인을 내세워서 신부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고 몇 마디 말을 건네보아서 그녀의 판단만을 믿어서 가부(可否) 결정을 내리는 불합리한 속풍(俗風)에 얽매이던 때도 있었다. 하기야 이런저런 이야기도 흘러간 전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 신랑이라면 사모관대(紗帽冠帶) 에 태사혜(太史鞋, 남자의 마른 신의 한가지))를 받쳐신고 은안(銀鞍, 은으로 상감한 말안장) 백마(白馬)위에 걸터 앉아 여행길을 떠났고 신부 또한 칠보단장으로 꾸며서 안면(顔面)위를 면사포(面紗布)로 가리고 오색구슬이 잔물결 짓는 가마(四人轎)타고 시집 가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다. 또한 전에는 혼인잔치를 치르고 삼일동안 신랑은 처가집에 묵으면서 신방을 치러야 하는 '3일 치르기' 의 풍습이 있었다. 이때에는 어른 애 할 것없이 특히 젊은 아낙네들의 집요한 신방 엿보기가 공공연하게 행해 졌었다.
아마도 요지음 젊은 신혼부부라면 펄쩍 뛰어 노발대발만으로 일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혼인후에도 새색시의 첫애(初兒)의 분만만은 찬바람일던 시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친정어머니를 찾아가서 몸을 풀게끔 되었었다.
또한 해산후 삼칠일(21일내) 동안은 친정에서 몸조리하며 묵었다가 시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또 한가지 내 어릴쩍만 해도 있는 형세있는 집안에서는 딸자식을 출가시킬 때 몸종으로 부리던 계집애까지 함께 딸려 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이를 조종비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되어서 딸려간 종년의 짝은 나이가 차서 적당한 혼기에 이르면 시집에서 부리던 행랑아범의 아들이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달리 신랑감을 골라서 짝을 지워 주는데 대개의 경우 행랑채 방하나를 비워주고 평생을 부려 먹었다. 내가 자라오던 서울의 혼속(婚俗)만 하더라도 딸자식 하나를 출가시키자면 그야말로 그 어버이는 혼수감 마련에 등골을 뽑히는 판이다. 의(衣)걸이, 농,이불,장,경대(鏡臺) ,이불, 보료, 사방침 장만에서부터 철 따라 입을 여러벌의 신랑의 옷가지와 당자(新婦)의 옷가지까지해서 버선짝도 몇축에 이른다. 그나 그뿐이랴. 시가(媤家)쪽 식구대로 몫몫이 챙겨서 장만이 되어야 했다. 심지어 신랑의 문방사우(文房四友)에 이르기까지 손을 써야하는 그런 실정이었다.
하기야, 지방에 따라서는 다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안 사둔켠에서 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일이 이로서 끝나면 그도 약과다. 갈수록 첩첩 산중이더라 하는 말이 실감나게 시집을 보낸 후에도 안 사둔의 입장에서는 딸의 시가인 수 사둔댁에 대해서 한시라도 마음을 누그려 뜨릴 수가 없게끔 되어 있었다.
무슨 명절때라든가 시집 식구들의 날(生日) 때에는 이를 평소부터 새겨 두었다가 일일이 예물을 보내는데 망내(막내)시아재비라 해서 그 몫을 결코 소홀히 다룰수는 없었다.
이처럼 알알이 샅샅이 손해보기만 하는 것이 안 사둔의 입장이다. 형편에 닿지 않으면 새 버섯짝이라도 꾸려서 만들어 보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 몰인사(沒人事)하다 해서 그 화가 은연중에 딸자식에게 미칠 것이 뻔해서 그 어버이로서는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데 요즈음의 세태는 조금 심한 예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딸자식의 인물이 반반해서 팔자 늘어진 시집이라도 한번 가게 되는 날에는 그 친정 붙이까지 금새 윤기가 돌아선가, 못난 아들놈 열 보다 낫다는 쓸모있는 신판(新版)효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