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게 신랑

어린 마음에도 별일이다 싶게 생각되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할멈을 피하는가 싶게 여기긴 했지만, 다른 깊은 내력이 있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이런 저런 사연을 알기로는 그 후에 가서야 일이었다. 어쨋거나 그날의 일은 출가해서 채 1년도 못되어 홀몸이 된 딸자식이 천장에 들렸다가 대청마루 위에서 친정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 받다가 이런 사단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에 미쳐 몸을 감추지 못하여 새문 할멈으로 불리던 방물장수 눈에 띄게 되면 일이 번거롭게 되기 때문이다.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댁 과수가 젊고 얌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쪽 의향이야 어찌되었건 적당한 후처 자리를 찾아서 짝을 채우려는 것이 그녀들의 천성처럼 된 습성을 너무나 환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홀몸의 딸자식을 개가시킨다는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 변(變)처럼 여기던 때라 이런 일이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곁들여서 또 한가지 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한일합방(1910)무렵 해서 항간에는 한때 왜놈들이 조혼(早婚)을 못하게 금한다는 풍설이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그때 내 나이와 얼추 맞먹던 여닐곱살짜리 벌거숭이로부터 열두서너짜리 어린애에 이르기까지 때아닌 장가 시집 풍년이 들었던 일들이 기억 난다. 내 집안은 조금 개화한 축에 들어서 요행이 나는 이러한 혼인의 북새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무렵해서 세상에는 많은 코흘리개 신랑과 신부의 배출을 보았었다. 이처럼 풍설에 들떠서 자식가진 어버이들은 이 사품에 혼사를 서두르다 보니 제대로 혼수가 마련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마련없는 핑계는 말짱 시국(時局)탓으로 돌리고 어물쩡하게 넘겨서 치르던 혼례(婚禮)도 많아져서 이 무렵의 혼례잔치라면 태반이 작수성례(酌水成禮, 물만 떠놓고 혼례를 지낸다는 뜻))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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