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녀
지난날에 선비는 스스로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여자는 스스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몸을 치장하는 일을, 학덕을 쌓은 선비가 서로의 사람다운 알음알이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드높은 뜻과 함께 견줄 수 있었던 옛사람들의 속멋은 오늘날의 발상과는 퍽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난날의 여자들이 치장을 하고 아름다움을 가꾸는 데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마음을 썼던 것이 머리치장이고 거기에 으뜸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비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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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류 궁이나 여염을 가리지 않고, 또 반상과 귀천을 가릴 나위 없이 조선시대 말기의 여자들은 누구나가 비녀를 간직하기 마련이었다. |
여염의 출가한 부인들은 일반적으로 얹은머리와 쪽찐머리를 하였고 처녀들은 땋은머리를 했다....
비녀의 맵시가 가장 돋보이는 머리는 쪽찐머리였으므로 궁이나 여염을 가리지 않고, 또 반상과 귀천을 가릴 나위 없이 조선시대 말기의 여자들은 누구나가 비녀를 간직하기 마련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우물에 나가 세수를 하든지 아니면 몸종이 떠다주는 대야물을 방으로 들여서 세수를 하고 나면, 머리채를 풀어 얼레빗으로 슬슬 빗은 다음에 동백기름이나 아주까리기름을 발라서 바른 가리마를 타고 다시 참빗질을 하여 머리를 땋아 그 끝에 속댕기를 드려 틀어서 비녀를 꽂았다. 머리의 앞태는 말굽경대로 들여다보았고 뒷태는 손거울로 앞 경대에 비춰서 보았는데, 쪽찐머리의 태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졌으면 다시 풀어서 비녀를 꽂곤 했다.......
대체로 비녀의 꾸밈새는 그 머리 부분에 집중되었으니 만큼 머리의 꾸밈새에 따라서 불리는 이름도 저마다 달랐다. 용머리를 새겼으면 용잠 또는 용두잠이었고 원앙새나 가마귀를 놓았으면 원앙잠, 오두잠이었고, 잉어면 어두잠이었다. 이밖에도 매화, 난초, 국화, 대 따위의 사군자와 연, 목련, 모란, 석류, 호도, 버섯, 콩, 완두, 화염, 초롱을 새긴 것이 있었고, 한편으로 민짜 비녀며 말뚝비녀, 조리비녀 따위가 있었다........
용잠이나 봉잠의 금세공은 세화보다도 오히려 더 정교한 솜씨이고 은비녀에 곱게 파란을 입힌 솜씨는 오늘날의 에나멜링을 무색케 하는 색감의 조화를 보인다.......
서민들은 값이 싼 나무나 뼈나 뿔로 된 민짜 비녀를 평생토록 지르다가 이승을 하직하기 마련이지만, 지체가 있는 집의 마나님이나 궁의 비빈들은 철따라 비녀를 갈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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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짜 비녀류 대체로 서민들은 값이 싼 나무나 뼈나 뿔로 된 민짜 비녀를 평생토록 지르다가 이승을 하직하기 마련이어서 비녀 임자들이 누렸던 삶의 빈부와 귀천의 자취를 한눈으로 알아차리게 한다. |
옛날의 부녀자들이 비녀를 얼마나 아꼈던지는 옥이나 비취비녀가 부러지면 그것을 금판이나 은판으로 곱게 물려서 다시 쓴 것이나, 또 어줍지않은 나무비녀라 해도 옻으로 땜질을 하여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개화기 뒤에 부녀자들의 머리치장에도 개화바람이 휘몰아쳐서 비녀를 꽂지 않고 핀으로 대신하는 양머리가 나돌고 또 20세기초에는 단발머리가 유행을 하더니 오늘날에는 파마머리가 전성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의 부녀자들이 애지중지 아끼던 비녀가 꽂힌 쪽찐머리는 자취를 숨기고 오직 텔레비전의 사극화면에서 어른거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