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관

조선시대의 여자들이 예식 때에 쓰던 관으로는 적관, 화관, 족두리들이 있었다. 적관은 왕비가 적의를 입었을 때 머리에 썼으며, 사대부의 부인들은 예장을 했을 때 화관 또는 족두리를 썼다.

여자들의 예장으로는 원삼과 당의와 활옷이 있었다. 양반집 여자들이 입을 수 있었던 원삼은 초록 원삼이었는데 여기에는 꽃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당의는 원삼이 위의를 갖춘 대례복인 데에 견주어 좀 간소화된 예복으로 평복 위에 덧입기도 했고 원삼 안에 받침옷으로 입기도 했다. 활옷은 양반집에서 가례 때에 입던 예복이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서민들도 혼례 때에 한해서 입을 수가 있게 되었다......

화관 조선시대 여자들이 예식 때에 쓰던 관으로는 적관, 화관, 족두리 들이 있었다. 적관은 왕비가 적의를 입었을 때 머리에 썼으며, 사대부의 부인들은 예장을 했을 때 화관 또는 족두리를 썼다.

화관과 족두리는 신라 또는 고려 때부터 쓰여져 내려온 것으로 짐작되나 시대에 따라서 그 쓰임새가 조금씩 달랐다. 조선시대만 해도 영,정조 때에는 가체머리 곧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꾸밈새가 하도 호사스러워서 족두리를 권장한 일이 있었다. 또 화관은 화관대로 궁궐에서 잔치가 있을 때에 기녀나 춤을 추던 무녀 또는 악기를 다루던 여령들이 쓰기도 하였다........

족두리 조선시대만 해도 영.정조 때에는 가체머리 곧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꾸밈새가 하도 호사스러워서 족두리를 권장한 일이 있었다.

화관과 족두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수요가 있어서 그것을 만드는 솜씨가 이어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서양 문물이 세차게 몰아닥쳐 신식 혼례가 유행하게 되고 도시의 예식장이 하나의 기업으로 성립하기에 이르자, 원삼이나 활옷에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고 혼례를 치르는 신부란 가물에 콩나듯 한 세태가 되어버려 화관과 족두리를 만들던 사람들이 발을 붙일 데가 없어져버렸다......

신부가 평생에 하루 혼례 때에 원삼이나 활옷을 입고 연지, 곤지를 찍고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게 되면 그것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첩지를 했다. 첩지도 궁중 두식의 일종으로서 왕비는 봉첩지를 했고 상궁들은 신분에 따라 금 또는 은으로 된 개구리 첩지를 썼다........

겨레의 전래된 오랜 멋과 솜씨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정부도 아니고 문화재보호법도 아니며, 더구나 국한된 소수 호사가들의 반짝 하는 호기심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민중의 생활 속에 폭넓고 깊게 뿌리를 내린 이해와 애정과 그로 말미암은 끊임없는 수요라는 것을, 이제는 역사의 유물로 변해가는 족두리가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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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 기

바람이 살랑 구름이 살랑 앞집 큰애기 댕기가 내 눈에 살랑

이것은 경상북도 청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동요의 한 구절이다. 댕기를 노래한 민요는 이 동요 뿐만 아니라 모심기 노래와 같은 노동요나 부녀자들이 부르던 부요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이 전해서, 댕기가 머리치장을 위해서도 긴하지만 생활의 정감으로 비추어 옷매무새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단발이니 양머리니 하는 새로운 머리치장이 나돌기 전까지는 남녀를 가릴 나위 없이 머리를 자르거나 흐트러지는 일은 크나큰 불상사요, 사건으로 여겨졌다. 머리채를 푸는 일은 부모의 상을 당해서나 하는 일이요 더구나 머리를 자르는 일은 목을 잘리는 일에 버금가는 놀라운 일로 여겼던 까닭은 몸이나 머리 또는 살갗은 부모로부터 내림을 받은 것으로 이를 다치는 일은 불효 가운데에 으뜸으로 알았던 데에 있다. 그래서 장가든 남자의 머리는 상투를 틀었고 시집간 여자의 머리는 얹거나 쪽쪘으며 동남동녀들은 댕기를 드려 등뒤로 땋아내렸다.

고이댕기 댕기는 머리치장을 위해서도 긴하였지만 옷매무새에 못지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이댕기는 서북지방에서 혼인, 회갑 등의 의식 때 머리장식으로 사용하였던 댕기로 다른 댕기보다 길고 화려하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개화바람을 타게 되자 머리치장에도 변화가 일어 이제는 댕기머리를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던 댕기의 종류 가운데는 의식용과 일상용이 있었고, 왕가의 반가와 상민에 따라, 또 성인과 미성년에 따라 저마다 달라서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제비부리댕기 댕기의 끝 모양이 제비부리처럼 뾰족한 데서 이름이 붙여진 제비부리댕기는 금박으로 뇌문이나 아자무늬로 난간을 두르고 그 가운데 겹국화, 박쥐, 벌, 초롱들을 올려서 돋보이게 했으며 더러는 댕기고에 파란, 호박, 석웅황 들을 매달아 호사를 하기도 했다.

지난날에는 쪽댕기를 드려서 비녀를 꽂은 뒷머리로 반태가 난다느니 상태가 흐른다느니 아니면 기태를 벗지 못했다느니 하는 둥 말도 많았고, 또 생강덩굴이나 담쟁이덩굴이 얼기설기 얽힌 돌담 너머로 홍색 댕기꼬리만 보아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던 총각들의 낭만 어린 숱한 상사의 사연도 이제는 모두 퇴색하고 오직 민요의 가락 속에서나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귀여운 딸을 위해 등불 아래서 졸리는 눈을 껌벅이며 고운 제비부리댕기를 접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손길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고, 광한루의 이도령과 성춘향의 낭만의 실마리였던 그네뛰기에서 나부끼던 댕기꼬리의 여운마저도 판소리속에서만 머물게 되었다.

댕기 옛날 궁에서는 도투락장이라는 전업 장인이 따로 있었고, 댕기도 금박을 올리는 일은 금박장이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멀 리가 아니라도 "세모시 옥색치마/금박 물린 저 댕기가/창공을 차고 나가/구름 속에 나부낀다"라고 노래했던 것도 엊그제인데 댕기가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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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꽂이, 귀이개, 빗치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치장을 한다고 일러오기는 하나,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의 눈길과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도 치장을 한다고 해야할 듯하다. 그런 여자의 치장 가운데서도 가장 정성을 많이 괴이고 또 제가끔의 형세에 따라 호사를 하려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렇다 할 변함이 없는 것이 머리치장인 듯싶다.......

신라시대부터 여러 왕조에서 왕들은 가끔 여자의 화려한 머리치장을 말리는 금령을 내리곤 했다. 그런데도 여자가 머리치장을 하려는 집념은 꺾지 못했던지 같은 내용의 금령을 뒤미처 또 내리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어린 신부가 혼례 때에 머리치장의 무게가 지나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오를 정도였으니 과연 그 집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케 된다.

위와 같은 머리치장이 오랜 우여곡절 끝에 근세에 이르러 겨우 제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기혼 여자의 평상시 머리는 쪽찐머리였으며 거기에 쓰였던 장식이 비녀와 뒤꽂이였다. 긴 머리채에 곱게 빗질을 하여 동백기름을 바르고 빗치개로 곱게 바른 가리마를 탄 다음에, 속댕기를 드려 머리를 틀고 비녀를 찌르고 뒤꽂이를 꽂으면 머리 단장이 끝난다. 집안 어른이나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인 새벽 어둑한 방 속에서 미닫이 앞에 말굽경대를 옮겨놓고 빗접을 펴서 머리를 쪽찐 다음에야 여자의 하루 해는 비로소 시작이 된다.

대체로 영,정조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뒤꽂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장식을 위한 뒤꽂이이고, 둘째는 가리마를 타고 빗을 소제하는 데 쓰이는 빗치개이고, 셋째는 귀를 후비는 데에 쓰이는 귀이개이다. 물론 장식을 위한 뒤꽂이에도 쪽찐머리가 비녀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오늘날의 머리핀과 같은 구실을 겸하는 것이 있으며, 그밖의 빗치개뒤꽂이나 귀이개뒤꽂이도 그런 구실을 함께 하는 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장식과 실용의 구실을 함께했던 뒤꽂이 가운데서 가장 많이 쓰였던 것이 화첩뒤꽂이였다. 가장흔한 화첩뒤꽂이도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 아니라도 국호와 매화로만 된 것, 나비 대신에 새를 곁들인 것, 꽃이나 나비나 새대신에 연봉을 돋아나게 한 것 따위가 있다.

뒤꽂이 장식을 위한 뒤꽂이에도 쪽진머리가 비녀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오늘날의 머리핀과 같은 구실을 겸하는 것이 있므며, 빗치개뒤꽂이나 귀이개뒤꽂이도 그런 구실을 함께 지니기는 마찬가지이다.

뒤꽂이는 대부분이 은으로 된 것이고 여름에 쓰인 것으로는 비취나 백옥으로 깍은 것도 있고 산홋가지에 조각을 한 것도 있음은 여느 여자 장신구의 경우와 같다.

빗치개 빗치개뒤꽂이는 위가 합죽선을 편 모양으로 둥그스름하고 그것을 받쳐 긴네모꼴의 몸이 따르고 그 끝에 뾰족한 뿌리가 내렸다.

그런데 뒤꽂이 가운데서 은 조이질의 솜씨가 가장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어 있는 것은 말뚝뒤꽂이이다. 말뚝뒤꽂이는 이름 그대로 머리나 몸이 말뚝처럼 생겼는데 다만 끝이 여느 뒤꽂이보다 가늘고 날카로운 것이 특색이다. 이는 말뚝뒤꽂이의 쓰임새가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했을 때에 어쩌다가 있을 수도 있는 변고에 대비한 탓이겠다........

대체로 옥, 비취, 산호 같은 뒤꽂이는 옥공이나 패물장들이 만들었으나 은뒤꽂이는 은도가에서 만들었다. 그 만들어지는 공정은 비녀나 노리개 또는 괴불 따위의 여느 은으로 된 장신구를 만드는 공정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몸이 작아서 세심한 주의와 숙련이 필요했다.

귀이개 귀이개뒤꽂이는 앞의 화첩뒤꽂이나 빗치개뒤꽂이와는 달리 조각이나 꾸밈새가 복잡하지 않고 몸에 무늬를 음각하거나 파란을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이제 쪽찐머리가 귀해져서 쓰임새가 없어지자 뒤꽂이를 만들었던 세공방도 조이장이도 일손을 놓았거나 세상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다.

윤이 흐르는 보드랍고 긴 머리채를 곱게 빗질하여 거기에 당홍이나 깜자주 속댕기를 드려서 칠보 은비녀를 반태스레 지르고, 이에 곁들여 화첩뒤꽂이에 빗치개 뒤꽂이와 귀이개뒤꽂이를 맵시있게 꽂은 쪽찐머리로 단장한 여인이 긴 치마꼬리 아래로 외씨버선을 내보이며 사뿐히 대청을 거니는 자태를 한번 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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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녀

지난날에 선비는 스스로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여자는 스스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몸을 치장하는 일을, 학덕을 쌓은 선비가 서로의 사람다운 알음알이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드높은 뜻과 함께 견줄 수 있었던 옛사람들의 속멋은 오늘날의 발상과는 퍽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난날의 여자들이 치장을 하고 아름다움을 가꾸는 데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마음을 썼던 것이 머리치장이고 거기에 으뜸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비녀다.......

비녀류 궁이나 여염을 가리지 않고, 또 반상과 귀천을 가릴 나위 없이 조선시대 말기의 여자들은 누구나가 비녀를 간직하기 마련이었다.

여염의 출가한 부인들은 일반적으로 얹은머리와 쪽찐머리를 하였고 처녀들은 땋은머리를 했다....

비녀의 맵시가 가장 돋보이는 머리는 쪽찐머리였으므로 궁이나 여염을 가리지 않고, 또 반상과 귀천을 가릴 나위 없이 조선시대 말기의 여자들은 누구나가 비녀를 간직하기 마련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우물에 나가 세수를 하든지 아니면 몸종이 떠다주는 대야물을 방으로 들여서 세수를 하고 나면, 머리채를 풀어 얼레빗으로 슬슬 빗은 다음에 동백기름이나 아주까리기름을 발라서 바른 가리마를 타고 다시 참빗질을 하여 머리를 땋아 그 끝에 속댕기를 드려 틀어서 비녀를 꽂았다. 머리의 앞태는 말굽경대로 들여다보았고 뒷태는 손거울로 앞 경대에 비춰서 보았는데, 쪽찐머리의 태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졌으면 다시 풀어서 비녀를 꽂곤 했다.......

대체로 비녀의 꾸밈새는 그 머리 부분에 집중되었으니 만큼 머리의 꾸밈새에 따라서 불리는 이름도 저마다 달랐다. 용머리를 새겼으면 용잠 또는 용두잠이었고 원앙새나 가마귀를 놓았으면 원앙잠, 오두잠이었고, 잉어면 어두잠이었다. 이밖에도 매화, 난초, 국화, 대 따위의 사군자와 연, 목련, 모란, 석류, 호도, 버섯, 콩, 완두, 화염, 초롱을 새긴 것이 있었고, 한편으로 민짜 비녀며 말뚝비녀, 조리비녀 따위가 있었다........

용잠이나 봉잠의 금세공은 세화보다도 오히려 더 정교한 솜씨이고 은비녀에 곱게 파란을 입힌 솜씨는 오늘날의 에나멜링을 무색케 하는 색감의 조화를 보인다.......

서민들은 값이 싼 나무나 뼈나 뿔로 된 민짜 비녀를 평생토록 지르다가 이승을 하직하기 마련이지만, 지체가 있는 집의 마나님이나 궁의 비빈들은 철따라 비녀를 갈아 꽂았다......

민짜 비녀류 대체로 서민들은 값이 싼 나무나 뼈나 뿔로 된 민짜 비녀를 평생토록 지르다가 이승을 하직하기 마련이어서 비녀 임자들이 누렸던 삶의 빈부와 귀천의 자취를 한눈으로 알아차리게 한다.

옛날의 부녀자들이 비녀를 얼마나 아꼈던지는 옥이나 비취비녀가 부러지면 그것을 금판이나 은판으로 곱게 물려서 다시 쓴 것이나, 또 어줍지않은 나무비녀라 해도 옻으로 땜질을 하여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개화기 뒤에 부녀자들의 머리치장에도 개화바람이 휘몰아쳐서 비녀를 꽂지 않고 핀으로 대신하는 양머리가 나돌고 또 20세기초에는 단발머리가 유행을 하더니 오늘날에는 파마머리가 전성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의 부녀자들이 애지중지 아끼던 비녀가 꽂힌 쪽찐머리는 자취를 숨기고 오직 텔레비전의 사극화면에서 어른거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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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빗

까만 칠이 은은히 비치는 바탕에 무지갯빛 자개를 놓은 말굽경대의 거울을 세우고 경대 서랍의 박쥐들쇠를 잡아당기면 동백기름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서랍 속에는 크고 작은 얼레빗과 참빗이 차곡차곡 놓여 있고 한쪽 옆에는 가리마를 타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뺄 때에 쓰는 빗치개가 놓여 있다.

나무를 반달처럼 깎아 만든 얼레빗으로 풀어헤친 머리를 가다듬고 빗치개로 머리 한가운데에 가리마를 탄다. 거울에 비친 앞가리마가 반듯한 것을 보고서야 기름병에서 동백기름을 손바닥에 받아내어 이마나 귀밑에 묻어나지 않게 조심조심 바른다. 뒷머리 다박지를 맨 끈을 입에 물고 빗살과 빗살 사이가 성긴 참빗으로 한동안 빗어내리다가 빗살이 촘촘한 참빗으로 바꿔 빗어서 기름이 고르게 오른 다음에야 머리를 땋고 속댕기를 들이고 비녀를 꽂는다. 빠진 머리칼은 머리를 빗는 데에 쓰이는 도구를 넣어두는 빗접에 곱게 모두어 담고 참빗살 사이에 끼인 때는 빗치개로 뺀 다음에 빗접을 접어 빗접고비에 꽂고 경대를 닫고 나면 비로서 안주인의 하루 일이 시작된다.

또 사랑채에서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손거울을 목침 모서리에 기대어 세워두고 거기에 상투머리를 비춰보면서 소꿉같이 작은 빗으로 머리를 빗어올린다. 망건 당줄 자국이 뚜렷이 남은 이마에서부터 귀밑머리에서 뒷머리로 빗어올려서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고 동전처럼 생긴 동곳을 꽂는다.
아녀자들의 머리는 빗어내리고 남정네들의 상투머리는 빗어올리는 것이 다를 뿐이지 하루의 일이 머리를 빗는 일로 시작되는 것에는 안팎의 차이가 없다......

여러 가지 머리빗

머리를 빗기도 하고 머리에 끼인 때나 비듬을 훑어내기도 하며 때로는 머리 틈의 이나 서캐를 빗어내어 죽이는 데에 없어서는 안되었던 얼레빗이나 참빗은 오늘날에 와서 그 요긴한 구실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빗들을 손에 잡고 보면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가 오늘날에 볼 수가 있는 가장 오래된 빗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대모빗이다. 생김새는 오늘날의 얼레빗과 비슷한 것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손잡이 부분이 좀더 넓다는 점이다. 거기에 금선을 두르고 금선을 두른 속에 푸른색의 보석을 끼워서 이름 모를 꽃모늬를 아로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금줄을 칡덩굴처럼 드리운 장식을 하고 있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의 어느 귀부인이 쓰임새보다도 치레로 머리에 꽂았던 빗일 것으로 생각된다.........

얼레빗 지금은 얼레빗보다 더 성긴 플라스틱빗으로 건성건성 빗거나 그렇지 않으면 헤어브러쉬로 슬쯕슬쩍 빗는 세상이므로 얼레빗이나 참빗의 쓰임새는 없어지다시피 됐다.

특히 우리나라의 빗 가운데서도 얼레빗보다는 참빗이 더 정교하고 보기에도 아름다워 세계의 어디에서 만들어진 빗도 그 쓰임새와 꾸밈새를 당할 수가 없다. 대로 살을 만든 참빗은 전라도의 영암과 담양의 것을 꼽아온다. 참빗에는 빗살이 성기고 조밀한 것과 크기에 따라서 대소, 중소, 어중소, 밀소의 네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중소이다............

머리에 장식용으로 꽂게 만든 대모제 빗 선을 두르고 금선을 두른 속에 푸른색의 보석을 끼워서 이름 모를 꽃무늬를 아로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금줄을 칡덩굴처럼 드리운 장식을 하고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참빗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되맥이빗'이라고 하여 길이 잘 든 헌 참빗에서 살을 골라 다시 맨 것, 곧 중고품을 재생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영암의 참빗이 양반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또 참빗이 거래되는 시장을 '도깨비시장'이라고 부르며 동이 트기 전인 첫새벽에 잠깐 서고 마는 일도 특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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