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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 기
바람이 살랑 구름이 살랑 앞집 큰애기 댕기가 내 눈에 살랑
이것은 경상북도 청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동요의 한 구절이다. 댕기를 노래한 민요는 이 동요 뿐만 아니라 모심기 노래와 같은 노동요나 부녀자들이 부르던 부요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이 전해서, 댕기가 머리치장을 위해서도 긴하지만 생활의 정감으로 비추어 옷매무새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단발이니 양머리니 하는 새로운 머리치장이 나돌기 전까지는 남녀를 가릴 나위 없이 머리를 자르거나 흐트러지는 일은 크나큰 불상사요, 사건으로 여겨졌다. 머리채를 푸는 일은 부모의 상을 당해서나 하는 일이요 더구나 머리를 자르는 일은 목을 잘리는 일에 버금가는 놀라운 일로 여겼던 까닭은 몸이나 머리 또는 살갗은 부모로부터 내림을 받은 것으로 이를 다치는 일은 불효 가운데에 으뜸으로 알았던 데에 있다. 그래서 장가든 남자의 머리는 상투를 틀었고 시집간 여자의 머리는 얹거나 쪽쪘으며 동남동녀들은 댕기를 드려 등뒤로 땋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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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댕기 댕기는 머리치장을 위해서도 긴하였지만 옷매무새에 못지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이댕기는 서북지방에서 혼인, 회갑 등의 의식 때 머리장식으로 사용하였던 댕기로 다른 댕기보다 길고 화려하다. |
그러나 조선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개화바람을 타게 되자 머리치장에도 변화가 일어 이제는 댕기머리를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던 댕기의 종류 가운데는 의식용과 일상용이 있었고, 왕가의 반가와 상민에 따라, 또 성인과 미성년에 따라 저마다 달라서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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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부리댕기 댕기의 끝 모양이 제비부리처럼 뾰족한 데서 이름이 붙여진 제비부리댕기는 금박으로 뇌문이나 아자무늬로 난간을 두르고 그 가운데 겹국화, 박쥐, 벌, 초롱들을 올려서 돋보이게 했으며 더러는 댕기고에 파란, 호박, 석웅황 들을 매달아 호사를 하기도 했다. |
지난날에는 쪽댕기를 드려서 비녀를 꽂은 뒷머리로 반태가 난다느니 상태가 흐른다느니 아니면 기태를 벗지 못했다느니 하는 둥 말도 많았고, 또 생강덩굴이나 담쟁이덩굴이 얼기설기 얽힌 돌담 너머로 홍색 댕기꼬리만 보아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던 총각들의 낭만 어린 숱한 상사의 사연도 이제는 모두 퇴색하고 오직 민요의 가락 속에서나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귀여운 딸을 위해 등불 아래서 졸리는 눈을 껌벅이며 고운 제비부리댕기를 접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손길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고, 광한루의 이도령과 성춘향의 낭만의 실마리였던 그네뛰기에서 나부끼던 댕기꼬리의 여운마저도 판소리속에서만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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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기 옛날 궁에서는 도투락장이라는 전업 장인이 따로 있었고, 댕기도 금박을 올리는 일은 금박장이의 손을 빌려야 했다. |
그렇게 멀 리가 아니라도 "세모시 옥색치마/금박 물린 저 댕기가/창공을 차고 나가/구름 속에 나부낀다"라고 노래했던 것도 엊그제인데 댕기가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