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덮은 뒤, 내 머리 속에는 그 말만이 맴돌았다.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우리의 사랑이다...라는..

이 책을 쓴 낸시 가든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종일관 어른들의 눈과 주위의 시선은, 너희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비정상적인 형태이며, 성적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리자의 항변은 사랑이었다는 것이었다.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사랑을 좁은 의미로 남녀간의, 즉 이성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인류애적인 사랑은 그저 정신적 사랑만 해당하는 것일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동물을 늘 만지고 싶어 하고 가까이 두려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사람-먹거나 학대하는-들에 대한 비판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단지, 수간이 아니다 뿐이지 스킨십은 허용하고 있는 사랑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여자는 여자를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될까?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해치고, 사회체제에 반한다고 해서? 그것도 아니면 수많은 오해 속에 둘러싸인 에이즈 때문에? 정상적인 가족관계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현재의 사회체제가 정한 관습이 아닌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한다는 말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사랑을 해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남녀가 아니라 여여, 남남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동성애를 지지하고 장려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것도 수많은 사랑 중에 하나이고, 사회체제를 전복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요즘처럼 출산률 저하의 시대에 비생산적인(?) 결합에 제동을 걸 수도 있겠다. 하~ 비생산적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보니 나는 이성간의 결합을 통해 이 사회에 아이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까 논점은 이것이 아니다.




리자와 애니의 관계는 사랑의 한 형태일 뿐이다. 사랑하기에 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성적호기심과 쾌락을 향유하고자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게 아니란 것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그랬다가 아니라 그러기위해 사랑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동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사랑의 하나로 인정할 줄 알아야 어두운 곳에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변질되고 있는 가짜 동성애를 뿌리 뽑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남녀 간의 결합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로지 자신의 성적인 충족을 위해 사랑을 빙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12세의 아이와 24세의 어른(?)이 사랑한다면 문제가 되지만 48세의 어른과 60세의 어른이 사랑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12세의 아이는 가치판단을 할 때 조금 미흡할 수 있고, 그래서 어쩌면 약간의 강제성이 동원된 사랑이 아닐까 의심해서이고, 어른들의 사랑은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물과의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수간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킨십은 애정의 표시지만 수간은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에게 강제성이 부여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행동하고, 자신의 판단력과 가치기준이 있는 17세 소녀들의 사랑은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17세라는 나이가 사회적인 통념상 어른보다는 아이에 가깝다고 느끼지만 이미 그들도 하나의 성인이기 때문에 존중해 주어야한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이해될 부분이기는 하지만, 낸시 가든이 이야기한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서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이 모두 적용한 결과로서 말이다.




어렸을 때, 중고등학생 때 많은 아이들이 동성 간의 친밀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친밀감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 사회적 통념상 그들의 감정은 우정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동성 간의 사랑도 인정된다면-아, 사랑하는데 누군가의 인정이 왜 필요한 거야- 그들 모두 동성 간의 사랑을 키우게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았던 동성에 대한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이성으로 옮아가는 것은 누구의 제재도 누구의 영향도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영역의 차이, 인식의 차이가 이성간의 결합을, 혹은 동성 간의 결합을 자연스럽게 이어줄 것이다. 동성애가 완전히 터부시되지 않았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랜 기간 인류가 유지되었던 것은 그래서이다.




그냥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당신의 아이가 동성 간의 사랑을 한다면? 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 아이의 선택일 뿐이니까. 그러나, 사회적인 멸시의 눈초리를 견뎌야하는 아이의 생활은 걱정스러울 것 같다.




지금까지의 글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애니와 리자가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의 교감이랄까? 그런 것이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별로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을 묘사하기보다 그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주위의 시선을 이야기하느라 분산되어서일 것이다. 결국은 낸시 가든의 이야기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마치 벌레 보듯 대하는 사회에 던진 하나의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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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1-1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도서에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