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변해버린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은 친구 얼굴도 잘 모를 것 같다.
나도, 마스크 쓰고 처음 갔다가 지금까지 단골로 가는 미용실 미용사를
우연히 밖에서 봤는데 못 알아봤다.
사람들은 이제 얼굴이 아니라 이름으로 기억한다.
누가 그랬더라?
시인은 불명확한 것,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언어로 정의 내리는 사람이라고.
모호하고 어려운 시(詩)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시인으로 하여금 많은 깨달음을 준 듯하다.
누구나 살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지나간다.
어떻게 보면 가장 우울하고, 가장 어두운 시기를
위트와 밝은 생각으로 헤쳐나가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나와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가
어둡고 무거운 자기만의 짐을 잘 부려놓길 원한다.
사춘기라는 터널을 씩씩하고, 즐겁게 뛰어나오길 원한다.
"나는 고통에 민감한 소년이고 싶다"(「분홍민달팽기」)거나
"시를 쓰는 흑심고래가 될거다"(「흑심고래를 찾아서」)라거나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검은 털 이야기꾼」)는 그는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뭔가를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으면 좋겠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모르니까 더 행복한 그곳을 향해 가는 아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