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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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의 외래어 표기는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똘스또이'는 낯설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읽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했던' 중학생 때 읽었다. 그래서 늘 읽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얼마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고, 이번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이반 일리치는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동료였고 그들 모두가 사랑했던 사람이다. (중략) 그가 사망하고 나면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고 알렉세예프 자리에는 빈니꼬프나 시따벨이 임명될 것이라는 설이 이미 나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 (p.8~9)

이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신문에서 읽은 그들 동료들의 생각으로, 소설의 서두를 장식한다.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추모하기에 앞서 남은 자들의 삶을 걱정하거나나에게 닥쳐올 변화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리게 된다. 1800년대의 그들과 지금의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

동료의 죽음을 듣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직장 내 보직 이동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죽은 이가 자신이 아니라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예의상 추도식에 참석해서 미망인을 위로하고 귀찮지만 인사는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도 장례를 치르며 남편의 동료들을 상대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 이것 저것 준비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대성통곡을 하며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익히 아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떠올려보라. 그들이 죽은 이반 일리치를 생각하며 울지 않는다고 욕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죽은 이의 보험 처리를 하고, 재산을 분할하며 남은 자들의 삶을 챙긴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알린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료들은 '귀찮지만' 예의상 추도식에 참석하고, 아내와 딸은 그가 남긴 재산과 더 받을 것이 없는지만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는 어떤 삶을 살아 온 사람일까?

이반 일리치는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지극히 끔찍한 것이었다고.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인정되는 한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착실하게 근무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모든 일을 수준 높고 절도있게 수행했기 때문에 그를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예의 바르게 처신했기 때문에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결혼도 평생 그렇게 해왓던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진행하였다.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기"(p.31) 때문에 결혼을 하였다.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은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사랑이 없는 아내와의 관계는 당연히 삐걱댈 수 밖에 없는데, 그는 가정을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아내가 매달릴수록 이반 일리치는 생활의 중심을 자신의 직무로 옮겨갔다.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은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나마 품격을 잘 지키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이쯤 되니 이반 일리치의 아내가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기보다 현실적 문제를 더 고민했던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감내하면서 받아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정보다 일을 중시하는 것이 워커홀릭이어서가 아니라 가정이나 아내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를 더 응원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혼자 있으면 견딜 수 없이 끔찍하게 외롭고, 누군가를 부르자니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상태가 더욱 악화된다는 것"(p.89)을 잘 알고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통증보다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 앞에 서면 '더 살고 싶어질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3년 전 암 수술을 하였다. 암이라는 것이 워낙 '죽음'과 가까운 병이어서 나 또한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죽는다면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아주 어리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만큼 의료보험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에도 안도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아, 내가 '삶'이라는 것에 그렇게 미련이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그저 살아있는 동안에 보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야겠구나.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겠나마는, 그래도 나는 이 한 세상 잘 살다 간다고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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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14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하양물감님 그런 일도 있으셧군요. 잘 견디고 이겨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죽음앞에서 어떨지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인간 대부분의 죽음이 저렇지 않을까 싶어 씁쓸하네요. 톨스토이 같은 대가가 그려낸 죽음의 진실 같기도 하구요.

하양물감 2021-04-11 23:16   좋아요 0 | URL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죽음이 나에게 닥치지 않는 이상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