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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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의 유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미안해 다. 최근 이은주의 유서에서도 다른 말은 흐릿한데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말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 미안해라는 말은 살아남은 사람이 지고가야 할 고통에 대한 미안함이겠지.

이 책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밤에 하얀 강을 배를 타고 건너는 것 처럼 몽환적인 주술을 통하여 남은 사람들은 그 고통을 건너 새로운 생활을 영위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참 다정하다. 감수성이 지나쳐서 때로는 질려버릴 듯했던 그 문체마저도 이 소설의 분위기와 이야기엔 절묘하게 어울려 실연한 사람에게 유행가 가사가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 같은 그런 효과를 낳는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 중에선 『키친』이후로 가장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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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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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과외했던 아이중에,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4년을 살고 온 아이가 있었다. 특별히 친한 아이는 아니어서 다른 생각은 별로 나지 않는데, 무슨 이야기 도중이었는지 "중국 사람은 식탁 빼곤 다 먹어요." 라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엽기적이라는 표정으로, 그럼에도 어느면 익숙해져 있다는 표정으로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내 머릿속엔 의자를 들고 씹어먹는 중년 아저씨나 접시를 아그작 아그작 깨 먹는 아이가 떠올라 한동안 괴로웠었다.

몇천년을 이어온 도저한 문화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현대가 되어도 과거가 사라지지를 않는다. 현재와 과거의 교묘한 혼재가 현대의 중국이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중국 변방의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우죽우죽 피를 팔러가는 허삼관이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아주 코믹하다. 유쾌하다고 썼다가 얼른 우습고 코믹하다, 라고 바꾸었다. 유쾌,라는 말의 그 쾌 라는 단어에 포함된 산뜻한 느낌이 이 책에는 없다. 코믹하고 우스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찡한 이야기다. 그게 피를 팔아서 만들어진 이야기일까.

주인공 허삼관은 인생의 고비마다 피를 팔아 그 고비를 넘긴다. 허옥란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도 피를 팔고(정확히는, 피를 판 돈이 생기자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그제야 허옥란에 관한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을 오쟁이진 남편으로 만든 첫째 아들 일락을 위해서 또 피를 판다. 중국 공산 혁명과 문화 혁명기를 넘기면서 허삼관의 피는 자신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팔기 시작하고, 그 피를 판 돈으로 흉년에 자신의 아이인 이락과 삼락만을 데리고 국수를 먹으러 가면서 그 국수값의 1/3에 해당하는 돈을 일락에게 쥐어주며, "너는 내 친아들이 아니니 내 피를 판 돈으로 산 국수를 먹일 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도 미워지지가 않는다. 더구나, 끝내는 일락이를 업고 국수를 먹으러 가지 않는가.

아버지 허삼관에게서도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고 다들 친 아버지라 이야기 하는 하우량에게서는 아들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일락은, 그러나 "네가 친아들이었다면 너를 가장 사랑했을 거야."라는 허삼관의 말에 행복하다. 허삼관도 그러하기에 행복하다.

간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일락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창길을 걸어 사흘 또는 닷새마다 피를 파는 허삼관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찡하다.

작가 위화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심리묘사를 하나도 하지 않고 대화와 서술만으로 처리해 낸다. 심리묘사가 없는 소설임에도 그 어떤 심리묘사보다도 훨씬 절절하게 그 심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오히려 심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작가가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 놓은 장치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중국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곳곳에 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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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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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령샌님의 그 예리한 명문을 좋아한다. 박학다식함과 다양한 관심사에서 흘러나오는 그 눈부신 레토릭에는 60년대의 그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찬사를 아니바칠 수는 없다. 뛰어난 작가라는 데는 동의하지 못하나 뛰어난 문학 평론가, 문화 평론가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령샌님은 확실히, 복잡한 현상들을 단순화 시키고, 그것들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어 화려한 비유를 구사해내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들만을 가지고서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 천재라 칭하기 아깝지 않다. 그야말로 천재니까. 한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도 천재이듯, 얕지만 그토록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천재는 천재다. 곡학아세도 천재적으로 해 낸달까. 그래서 밉지가 않다.

한국 문화론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이 책은, 두고두고 이어령 선생님을 찬양하는 소재로 쓰이면서 또한 공격하는 소재로 쓰였다. 지프차(서양문물)에 타고 바라본 동양, 이라는 소재의 한국문화를 비하하는 내용의 이 책은 한 시대(60년대)를 풍미한 베스트 셀러였고, 전쟁 직후의 참담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학과 엽전의식에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게으름의 상징같은 장죽과, 허위의식의 상징인 갓, 무식함의 상징같은 한복 바지, 관광을 하러가서는 도시락만 까먹고 오는 무지. 그것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8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어령이라는 한 사람을 공격하는 재료가 되었다. 당신은, 그렇게도 한국 문화를 비하했던 사람이 아닌가, 당신이 과연 한국의 석학이라 칭해져도 좋은 일인가.

가끔. 선생님의 옆에서 선생님을 뵈올때면, 그 순진함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람을 기함시킬만큼 순진하기만 한 면이 있는 우리 선생님은 순진한 만큼 솔직하고, 솔직한 만큼 꾸밈이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분의 그러한 솔직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20대의 중반을 지나면서, 전쟁직후의 한국, 그 참담함 속에 써 내려갔던 이 책을 70세 기념 전집의 첫번째 책으로 내 놓으면서도 어령 샌님은 자신의 잘못과 판단 미스를 숨기거나 꾸미려고 하지 않았다. 게으름의 상징이었던 장죽을 노인 우대와 과학적인 산물로 다시 묘사하고, 허위의식의 상징이었던 갓을 아름다운 것, 우리 민족이 멋있는 민족이었음의 증거로서 내 놓고, 무식함의 상징같았던 한복 바지의 그 넓은 허리를 넉넉한 포용력으로, 관광을 하러 가서는 도시락만 먹고오는 무지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외부의 세계조차 나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훌륭한 예술 정신인 것으로 묘사해 내면서, 어령 샌님은 솔직하고 순수하게 말한다.

그 책을 쓰던 40년 전의 나는 어렸고, 당시의 한국은 지독한 가난과 배고품으로 움츠러 들고 있던 땅이었느라고. 나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따끔한 일침을 가하여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랬노라고. 그래서,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노라고,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그 솔직함이, 그 순수함이 의외로 가슴을 울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간에 그대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할 줄도 알고, 그것을 바꿀 줄도 아는 그 당당함이 멋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무언가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바뀐다. 그 바뀌어가는 모습조차도 긍정하는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난 어령 샌님이 참 좋다. ^______________^

ps. 이 책의 문장들은 사실, 어령샌님 특유의 눈부신 레토릭이 별로 없다. ^^;;; 레토릭을 기대한다면 『말로 찾는 열두 달』을 읽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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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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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할 땐 습관적으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중의 서너권을 꼭 함께 구입하곤 한다. 어린 시절에 세계문학전집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나에겐 어떤 부채의식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어린시절에 그것을 읽지 않았기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음을 여러가지로 인정을 하면서도 말이다. 서재 책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 번호 순대로 졸졸졸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도 선듯 손이 가지않는 것은, 아무래도 "봐야하는 책"이라는 생각에 사 두기는 했지만 "보고싶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언제나 고전의 가치를 역설하면서도 '고전'이라는 말의 무게에 짓눌려 재미없고 지겨울거야, 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이상하게도 늘 그렇게 된다. 고전은, 막상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내리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는 않는다.

책장을 훑다가 무심결에 손에 잡은 책이었다. 요즘 읽다가 던져두는 책이 하도 많아서(아니면 중간에 술술 건너뛰든가) 나의 독서습관이 바뀌었나, 나쁜 버릇이 들어버렸구나, 반성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 책이 나의 그러한 반성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내가 문제가 아니라 책이 문제 있었던 거다.

각설하고, 1960년대 영국, 성개방 직후의 혼란스러움과 마약, 가족 해체 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시기에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공 남녀 헤리엇과 데이빗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 그들은 주변의 우려에 찬 눈길도 무시한 채 빅토리아 양식의 거대한 (방이 10개가 넘고 다락방까지도 존재하며 15인용의 참나무 식탁이 있는) 집을 구입해 가정을 꾸린다. 피임약은 신뢰하지 않으며 자연의 섭리에 위배되는 피임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두 사람은 단숨에, 아이 넷(아들, 딸, 딸, 아들)을 낳고 "거대한 과일 케이크"같은, 모범적인, 타인의 부러움에 가득한 가정을 만들며 행복해 한다. 처음 이렇게 행복한 그들 가정의 모습은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머리 앤』에서 앤이 이룩한 가정 '잉글사이드'의 모습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행복한 웃음과 즐거운 여름 휴가가 가득한 집. 이러한 집에 태어나는 다섯째 아이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그들이 얼마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구나, 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특이한 유전자를 가진 다섯째 아이 벤 덕분에 그들의 행복한 가정은 파탄을 맞는다. 태내에서부터 범상치않은 태동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혀 댄 벤은, 그로 인해 해리엇으로 하여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진정제를 집어먹게 만들었다. 진정제의 힘으로 일곱달 반의 임신기간을 견뎌낸 해리엇은 아이를 낳은 직후부터 아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와는 전혀 다른, 원시적 폭력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태어난 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결국 벤을 요양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용소)에 보내게 되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보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해리엇은 결국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반전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벤은 사실 독특하지만 매우 빼어난 아이였는데 평범한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그걸 몰라줬던 것 뿐이다, 라든가 어느 정도의 정신 질환(해리엇이 집어 먹은 진정제로 인하여)을 가지고 있는 아이여서 결국 가족들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다시 화합하게 된다든가, 아니면 최소한, 벤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을 견디지 못하고 해리엇과 데이빗을 떠나간 자녀들을 대신하여 벤이 부모의 곁에 남아 부모에게 뭔가 깨우침을 준다든가......

이 책은 독자의 그러한 깨우침을 무참히 부셔버리며 끝난다. 끝끝내 벤은 밝혀지지 않은 고대의 유전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돌연변이일 것이다, 라는 해리엇의 짐작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며 "거대한 과일 케이크" 같았던 가족들은 완전히 해체되고 와해되어 다 먹고 난 뒤 찌꺼기가 눌러붙은 접시마냥 처참한 모양으로 변화하고 만다.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했던 해리엇과 데이빗은 결국 자신들이 가장 부정했던 가족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은 끝내 화해의 계기를 찾지 못하며, 벤은 여전히 부모(특히 엄마)와 별개의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 살아나간다.

벤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가족 드라마였던 소설은 벤의 출생과 동시에 호러무비로 바뀐다. 작가 도리스 레싱의 차분하면서도 적절하고 간결하면서도 냉정한 묘사는 그 분위기의 반전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행복해 보였던 가족의 이기심이랄까, 그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 것이었던가에 관한 깨달음 같은 것도. 그리고 그 깨달음만을 남기고 소설은 쓸쓸하게 끝난다.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지? 설마, 설마, 설마... 했던 기대를 모두 무시한 채 작가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 버리는 것이다. 허무하다, 화난다 말하기 이전에 이런... 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아쉬움이.

가끔 우리는 잘 된 일에 관해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칭찬 한마디 없다가 잘못된 일에 관해서만 책임을 묻고 나무란다. 그런 상황을 접하면 마치 소설 속 해리엇의 외침처럼 외치고 싶은 것이다.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전 그저 죄인이죠."

고전의 힘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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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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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든, 음식을 다룬 글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또한 마술적이다. 음식을 다룬 글은, 열과 물과 갖가지 재료의 어울림이 단순한 식재료에 요리라는 마법을 부려내는 것처럼, 그 요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마법을 부려내는가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이 소설은 의외로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과 조금은 닮아있다.

남미의 문학은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그것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외국문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 어쨌든 보르헤스를 비롯한 남미의 문학들은 분명, 북미나 유럽의 문학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무언가 관능적이면서도 토속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이 어쩌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건가?

멕시코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마마 엘레나와 세 딸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맛있고, 재미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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