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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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부터 29살까지, 꼬박 4년간, 나는 대여섯명의 소년들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우연히 시작된 중3, 16살 남자 아이 대여섯명의 그룹과외는 꾸준히 이어져 대학 입시를 마치고나서야 끝이났다. 열여섯살부터 열아홉살까지, 그 나이대의 소년들은 청년과 소년이 혼재된 상태로 한없는 예민함과 지독한 둔감함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소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여자형제밖에 없는데다 여중 여고 출신인 나에게 그 전까지 소년이란, 내가 알지못하는사이 환상만을 잔뜩 가지게 된 괴 생명체와 비슷했다.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즐기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말은 할 줄 아나 싶게 말을 안하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뭔가 인간 같기는 한데 동물 쪽에 더 가까워 보이는 뭐, 그런 존재였다. 나에게 그런 환상(?)을 가지게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남자 형제를 가진 여중 여고 친구들의 하소연이었고.  

그러다 내가 만난 16살 소년 여섯은, 16살 나의 여중 3학년 시기와 별 다를 것 없는 아이들이었다. 상냥해 보이는 눈을 가진 아이도 있었고, 음침한 표정의 아이도 있었지만, 스물 여섯이 봐도 열여섯의 아이들은 그냥 아이였다, 사실은, 성별이 거세된 '아기'라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음, 동네 분위기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얌전한 아이들이기는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열일곱살이 되면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 그것도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씌워지는지를 느끼는 듯 했다. 여자보다 용감해야 하고, 나중에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니까 여자보다 공부도 잘 해야 했다. 혹시나 여자친구가 생기면 남자니까 당연히 돈도 많이 부담해야 하고, 혼자 돌아오는 밤길도 무섭지 않은 척 해야 했다. 무엇보다, 위로 따위는 필요없는,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것자체로 짐이었다.  

한때 아기 같았던 그 아이들은 어느새 '가오'를 잡으면서 소년이 되어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착하거나 아니거나 순진하거나 발랑까졌거나 다 상관없이 그 아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한단어가 '가오' 였다. 그놈의 '가오'는 Y유전자에 별책부록도 아닌 합본부록으로 딸려오는 모양이었다. 열일곱살인 그 애들은 스물일곱살인 내 앞에서도 가오를 잡고 싶어했다. 가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애들은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낸시 스미스라는 여자가 쓴 시에 이런 대목이 있어. 
재욱 형이 시를 읊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강한데도 약한 척해야 하는 게 지겨운 여자가 한 명 있는 곳마다, 상처받기 쉽지만 강하게 보여야만 하는 게 피곤한 남자가 하나 있다. 항상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기대에 부담을 느끼는 소년 한 명이 있는 곳에, 자신의 지성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쳐버린 소녀가 하나 있다. 그리고.......
시는 술 한모금을 마신 뒤에 다시 이어졌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게 지겨운 소녀 한 명마다, 자신의 연약하고 흐느끼는 듯한 감성을 숨겨야 하는 소년이 한 명 있다. 

-p. 341 

 
   

부들부들, 열일곱 소년이 잡는 가오는 뭔가 애처로운데가 있었다.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게 뻔해서도 그랬고, 스스로가 자신의 가오에 확신을 갖지 못해서도 그랬고, 자신이 왜 가오를 잡아야 하는지를 확신하지 못해서도 그랬다. 그 가오에 속아주면 끝까지 가오를 잡아야 할 그애들의 어깨가 안타까웠고, 가오 그만 잡지, 좀? 이라고 그 어깨를 두드려 주려 하면 자존심을 송두리째 침해받은 듯 펄펄 뛰어 어려웠다. 가오를 건드리지 않으며 위로를 해 준다는 건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였다.  

그놈의 '가오'가 '갑빠'로 옮겨가면 그나마 다루기가 좀 낫더라는 게, 열여섯부터 열아홉까지, 그리고 다시, 그 아이들이 대학생과 군바리, 복학생이 되는 것을 간간히 지켜본 나의 경험담이고. 그리고, 올해 마흔을 찍으신 분을 데리고 살면서 보니 그놈의 '가오'는 평생을 잡고 사는, 몸 속에 y 유전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 되는 것이더라는 거, 그리고, 가오를 잡는 한, 소년들은 죄다 위로가 필요하더라는 거. 그게 나의 결론이기도 하고. 

다시, 소년의 이야기와 이 소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청소년기의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였다. 그리고 실제로 청소년기에 했던 대부분의 고민들을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들여다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는 그런 고민들이었다. 그런 일들 하나하나에 그리 울고 웃었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었다고밖에.  

그런 대단한 열정에 감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대단한 열정으로 했던 그 많은 고민들, 그것들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었다고 해도, 당시의 나에게는 생사의 기로와 세상의 존폐위기와 맞먹는 것들이었던 것이지. 그것또한 진실.  

이 책은 그 하찮은 것들에 대한 소년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한낱 '가오'로 보일 뿐인 그것이 소년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희경은 놀랍도록 잘 그려낸다. 와. <새의 선물>에서의 진희와 이 소설 연우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로 느껴질 정도다. 은희경, 많이 컸구나!!!(이런 건방진 말이라니...;;;;) 

보너스 트랙은 없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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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종종 느끼는건데,
아이에게도, 같이 있는 어른에게도 가장 힘든 시기가 중학교 시기인 듯 해요.
남자아이들이 더 심하고, 여자아이들도 성격에 따라서는 참 어렵게 보내죠.
극과 극을 달리고... ^^

제 딸 코알라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에 되면서, 참 생각이 많아요!

참...... 제가 아시마님의 전에 페이퍼를 보고 재봉이 너무 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래서 요즘 배우면서, 재봉틀도 사고, 내친 김에 오버록 기계도 샀어요!
아시마님, 그때 그 페이퍼 다시 감사드려요!

아시마 2011-03-10 13:45   좋아요 0 | URL
헉, 오버록까지 사셨군요!
제가 저희 충무공에게 맨날, 누가 나한테 와서 "야옹아 '오바로꾸(오버록이라는 건 아실테고. ^^)' 사주께 따라가자." 그러면 냅다 따라갈거라고 협박질 중인 그 오버록! ㅠ.ㅠ 아아, 부럽슴다.

전 지금도 그렇지만, 중학교때는 많이 둔감하고 많이 예민한 아이여서, 혼자 힘들었어요. 엄마가 굉장히 둔한 성정이라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얼마전에 사춘기를 호되게 앓고 있는 옆집 애를 보고 혼자 에구... 너도 크느라 욕본다, 중얼중얼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애도 한국 학년으로는 중학생이네요. 전 중3-고2까지가 많이 힘들었던듯.

그나저나, 재봉틀은 뭐 사셨어요?

따라쟁이 2011-03-1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저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남녀 공학이거든요. 네. 그녀석들도 가오를 잡으면서 이제 남자가 됐어요. 그래서 애처로울 때도 있어요. 최근에 한녀석 아버님이 장기 이식수술을 받으신 경우도 그랬고요. 일은 다 치루고 나서.. 그랬더라.. 하면서 지난간 옛이야기 하듯이 이야길 건내더라구요.
너는 결혼도 했고, 신경쓰게 하기 싫었다고 하면서.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내려놓지 못하는 그놈의 가오는... 어디에서 풀고 좀 쉴 수 있으려나..싶네요.

sslmo 2011-03-19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아들이 중3이 되었죠.
전 이 책을 아줌마의 마음에서 읽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아직 아이가 소년의 한가운데 있지 않아서 비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 이땅의 소년, 소녀들 좀 안됐어요.
성정을 발현할 시간 따윈 없으니까 말이죠~^^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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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5년이었는지, 2006년이었는지 그해의 동인문학상 후보작품 10편 중 하나였다. 그 시기에 나는, 문학상 수상작은 물론 후보작품들을 아주 열심히 독파해 나가던 중이었던 관계로 이 책도 읽었다. 열심히.  

이 책 읽고, 첫 생각은, 이런 작품까지 후보로 넣어주다니 동인상도 다 됐군, 이었다. -_-(아아, 난 요즘 리뷰가 거칠어지고 있다. ㅠ.ㅠ)  

기생이라니 누구나 혹할만한 소재다. 이 책의 작가는 나름대로는 자료 조사도 잘 했다. 자료조사는 잘 했는데, 그 자료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지를 못했다. 자료와 이야기가 따로논다. 그건 이 책의 최대 단점이다. 작가가 자료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그냥 머물러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지 않고 쓰겠노라고"(p. 255)하더니 후반부로 갈수록 기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받아 적느라 이야기는 난맥상이다.  

특히 <집사의 사랑>편에서 타박네의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호통을 치는 대목과, <서랍이 많은 사람> 부분에서 하루코의 난고촌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이거야, 소설을 쓰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이럴 거면 사료집을 편찬해야지.  

인물은 다들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또다른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엌어멈은 부엌어멈의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을 뿐 어떤 개별성이 없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거야, 현대판 장화홍련인 것이다. 각 인물의 개연성도 필연성도 개별성도 없이, 각자의 포지션에서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하다. 그러니까, 계모는 계모로서의 역할에, 의붓 언니는 의붓언니의 역할에, 구박받는 전처의 딸은 그 역할에만 충실한 것처럼, 그 외의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처럼. 

소재는 독특하고 발상도 좋았는데,  

거기까지가 이 소설의 한계인 건가. 

ps. 아, 난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버리고 만 건지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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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1-02-05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제목의 영화인가 드라마도 있지 않나요? 이게 원작인가...

아시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곳에선 어떻게 설을 보내나 궁금하네요.ㅎ

아시마 2011-02-05 14:37   좋아요 1 | URL
영화는 2006년인가 만들어 진걸로 알고 있고, 최근에 임성한(막장 작가로 유명한 그 임성한이요. ㅎㅎㅎ)이 극본을 쓰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죠. 서사는 영 볼품없는 소설인데(뭐, 전반적으로 별로예요) 막장으로 만들수 있는 요소가 몇가지 있는 소재라서, 임성한과 결합했으니 재미있을수도...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러나 저러나 안볼테지만. ^^
잊고 있던 책인데, 알라딘에서 띄우길래 다시 꺼내 읽고 리뷰 써 봤어요. 처음 읽었을 때도, 이번에 읽을 때도 여엉, 별로예요. -_-;;;

여기는 뭐, 한국하고 비슷하게 설을 쇠요. 떡국 끓여먹고, 만두도 빚어 먹고. 저는 안빚었지만요. 주변에 만두 빚으신 분들이 나눠 주셔서 맛나게 먹었답니다. ^^
루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따라쟁이 2011-02-09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제법 재밌다고 하던데.. 그게 그러니까 막장요소 덕분인건가요?

리뷰는 참 신기해요. 책을 읽고 좋았다고들 하시면 오와.도대체 얼마나 좋길래? 하고 읽어보고 싶고, 이렇게 별로라고하시는 글을 읽으면 음.. 뭐가 얼마나 별로길래.. 하고 읽어 보고 싶어져요. ㅎㅎ


아시마 2011-03-10 13:46   좋아요 1 | URL
너무나 늦은 답글이지만;;;;; 떠비.

그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막장요소 때문인듯. 임성한이 워낙에 막장요소를 막장스럽게 잘 요리를 해 내는 작가니까, 그런 부분도 작용 하겠죠.

ㅎㅎㅎㅎㅎㅎ 저는 남들이 별로라는 책은 별로 안궁금하던데, 대신, 나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남들이 별로라고 하면, 나의 보는 눈을 의심하는 쪽이기는 합니다. ^^;;;
 
행복한 만찬 - 공선옥 음식 산문집
공선옥 지음 / 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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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무공은 종종, 회사를 그만 둔 뒤엔 뭘 해먹고 살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생각하는 업종이 <떡국장사>다. 명동 어딘가 쯤에(그러니까 말하자면 충무공의 회사 근처에) 작은 떡국집을 열어서 아침과 점심에는 '내가 끓인' 떡국을 팔고, 점심과 저녁에는 빨갛게 끓인 경상도 특유의 소고기 콩나물국을 끓여서 팔면 대박이 날거란다. 대박이야 나겠지만 남는 건 없을텐데.  

2. 충무공은 내가 끓인 떡국을 좋아하는데, 어느정도냐면, 어느해인가의 설날 아침 시댁에서 시어머니가 떡국을 끓이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부리나케 따라 들어가 "어머니, 떡국은 다인엄마더러 끓이라고 하세요." 라고 말을 할 정도다.(아들이란 키워봐야 다 이런다. 그래서 난 딸만 낳았다. 아, 참 잘했다. ^_______^) 우리 시어머니, 결혼하고 첫해 설날, 우리 아들들은 떡국을 싫어해, 라더니 웬걸 형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주버님도 충무공만큼이나 떡국을 좋아한단다. 그러니까 어머님의 아들 둘은 어머님의 떡국을 싫어했나보다.  피식.

3. 사실은 나도 친정엄마의 떡국을 싫어했다. 친정에서는 멸치다시물로 떡국물을 쓴다. 그나마도  어렸을때 설이라고 집에서 떡국을 먹은 기억은 별로 없고, 잘사는 외가집이나 가야 떡국을 먹을 수 있었다. 외숙모 떡국의 국물 베이스가 멸치였는지 소고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반드시 있었던 게 소고기를 볶아 만든 고명이었다. 어렸을 때는 국물에 풀어지는 그 소고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계란인데도 황백 지단으로 부쳐 놓은 계란은 그지없이 화려했고. 어느해엔가 내가 하도 떡국을 잘 먹어 굳이 떡국떡을 조금 얻어와서 집에서 먹으라 끓여주었더니 먹지도 않는다고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엄마의 떡국은 멸치비린내가 너무 강했고,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소고기 고명도 없었다. 어린마음에, 그 소고기 고명은 부유한 외가의 상징 같았다.   

4. 나는 양지로 국물을 내서 떡국을 끓인다. 나의 떡국은 시어머니의 것과도 친정엄마의 것과도 외숙모의 것과도 다르다. 나는 최고급 양지를(난 좋은 고기를 보면 떡국을 끓이고 싶어한다.) 작게 썰어 달군 냄비에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달달 볶아 물을 붓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 뒤 푹 끓여 국물이 우러나면 거기에 떡국을 집어 넣고 계란을 풀고 파를 썰어넣어 끓인다. 먹기 전에 구운 김을 바수어 넣어준다. 충무공은 내 떡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작년 8개월간 혼자 외국생활을 하며 두달에 한번씩 집에 돌아올 때, 무조건 한두끼는 떡국을 먹기를 원했을 정도다. 계절이나 세시에 관계없이. 우리집은 떡국을 아무때나 먹었다. 한국에선.

5. 이곳에서는 1++ 등급은 고사하고, 양지다운 양지를 구할 수가 없다. 한우가 얼마나 우월한 품종의 소인지, 외국에 나와보면 알게된다. 특히 국을 끓여보면, 소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핏물을 빼도 빼도 빼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것저것 사다가 시도해 보았으나 매번 실패였다. 한국에서 끓이던 것처럼, 달군 냄비에 소고기를 달달 볶아 물을 부어 끓이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먹을만한 떡국이 나오지를 않았다. 결국 양지(라고 짐작되거나 점원들이 주장하는 부위)를 뭉근하게 고아 육수를 내고, 거기에 소고기를 볶아 고명을 올렸다. 남편도 나도 떡국 국물에 풀어진 소고기의 깔깔함이 싫었다. 한때는 그렇게 맛있었던 소고기 고명이, 어쩌면 그렇게 맛이 없는지.  

6. 외가에 가서 떡국을 먹을때면, 국물에 떡만 담긴 그릇이 나오고 고명이 담긴 그릇 네개가 상 위에 놓여있었다. 황백지단과 볶은 소고기와 김. 나는 볶은 소고기를 양껏 푹푹 덜어넣어 먹고 싶었지만 외숙모의 눈치가 보여 그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 좋고 우리 자매들을 특히 예뻐했던 외숙모, 게다가 음식 인심까지 좋았던 외숙모가 까짓 소고기 고명 따위로 눈치를 준다거나 했을리는 없을텐데 혼자 그렇게 눈치를 봤다. 그 소고기 고명, 이제는 넘치도록 먹을수가 있게 되었는데, 양력설이 보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집 냉동실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안먹는다. 내일은 우리 애 밥 볶아 먹일때나 넣어먹여야 겠다.  에이 참. 맛도 없다.

추어탕은 내게 가을의 풍성함과 함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결핍감을 동시에 일깨우는 음식이 되었다. 추어탕을 먹을 때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먹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토지를 물려받지 못한 가난한 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의 딸이다, 작은집 애다. 작은집들은 추어탕을 별로 안 끓여 먹는다. 더구나 딸만 있는 작은집이니. 추어탕은 아들 많은 큰집들에서 끓인다. 가을 저녁이면 세상의 큰집들은 아들들이 잡아온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이느라고 부산하다. 

p. 232

 

그때, 멸치비린내 가득하던 엄마의 떡국을 그냥 좀 참고 먹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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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15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갑자기 떡국 먹고 싶어요... 거기다
아시마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맛없는 떡국을 먹는 우리 신랑이 너무 불쌍해지는걸요. 이긍. 그러고 보면 울 신랑은 마누라 잘못 만난 듯... 어제두 다퉜는뎅.

아시마 2011-01-15 20: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의 떡국은 저희 신랑이나 맛있다고 하는 거죠. 아마 마녀고양이님의 신랑은 마녀고양이님의 떡국이 세계최고인줄 알고 계실겁니다. 내심 나 회사 관두면 우리 마나님 떡국집 셔터맨 또는 배달맨 해야지, 하는 꿈을 꾸실지도.

떡국 참 맛있죠, 여기서는 떡도 맛난게 없고 고기는 아무리 최고급 호주산 와규라고 해도 누린내가 나요. 한우 먹던 입으로는 괴롭습니다. ㅎㅎㅎ 한국서 구워먹을땐 호주산이라도 국끓일 때랑 애들 이유식은 꼭 한우 썼더니, 저희 따님들, 호주산으로 소고기 무국 끓여주면 쳐다도 안보십니다. -_-;;;;;;;

저희도 맨날 다투고 화해하고 그렇죠 뭐. 신랑들은 다들 철이 없으셔서리.

덕수맘 2011-01-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은 요리도 잘하시는 군요^^*ㅋㅋ저는 늘상 요리할때 되면 재미있기는 한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제가 생각할떄는 맛나는데..ㅋㅋ우리신랑이 요리를 더 잘해서인지...ㅋ
제가 요리하면 좀 뭔가 부족한가봐여..헤헤 근데 저도 떡국 완전 사랑해요..근데 시댁할머님께 떡국 좋아한다고 말했다가..ㅋㅋ매번 떡국을 해주셔서..ㅋㅋ힘들었던 기억이...새록새록 나네요~

아시마 2011-01-30 18:33   좋아요 0 | URL
요리를 잘 하지는 못하고... ^^ 시어머니가 워낙 음식을 못하시는 관계로다, 요리를 잘 하는 척은 하고 삽니다. 뭘 만들어도 시어머니가 만든것보단 무조건 맛납니다. -_-;;; 게다가 남편은 대학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던지라, 뭔가 가정식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의 맛의 기준이 제가 만들어 준 음식이 되어버린듯 해요. ㅎㅎㅎ 시어머니 음식솜씨가 한정식집 수준인 친구가 있는데, 그것도 참 괴로운 일이더군요. ^^

전 떡국 완전 사랑해요. 아마 일년내내 떡국만 매 끼니 먹으라고 해도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먹을걸요. 문제는 제 입맛에 맞는 떡국은 저만 끓인다는 거. -_-+ 전 맛없는 떡국은 혐오합니다.

따라쟁이 2011-01-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떡국은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데. 뭔가 글을 읽으니까. 한그릇 먹어 줘야만 할것 같군요. 음... 내일 점심은 떡만두국으로 하겠어요!

아시마 2011-01-30 18:36   좋아요 0 | URL
전 떡국은 좋아하지만 떡만두국은 별로더라구요. 떡국도 좋아하고 만두국도 좋아하는데 떡만두국은... 흠... -_-;;;

제가 자란 경상도 지방은 설에 만두를 빚지 않거든요. 만두를 설에 빚는 전통은 아마 경기 이북 지방에서만 그러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니까 경기, 서울 개성 이런 지방은 만두를 꼭 빚어 먹고, 당연히 떡국이 아닌 떡만두국을 먹는 것 같던데.... 그러고보면 입맛이란 참 보수적인듯.

답글이 늦었지만, 떡만두국은 맛나게 드셨나요, 새신부님? ^^

sslmo 2011-02-01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서 음식의 정갈함이 배어나는 듯 해요.

저희 시댁에선 고기를 아주 많이 넣은...떡국에도 미역국에도 그만큼의 고기가 들어가줘요.
전 멸치로 국물내고,그 위에 양지머리 결대로 찢어 올리고,황백 계란 지단 붙여올린 그 떡국을 끓여내고 싶은데 말이죠.

한국이 아닌 곳에 계신가 보죠,
한국 식으론 명절인데...떡국 드실 수 있으려나요?
어찌 되었건 명절 잘 지내세요~^^

아시마 2011-02-04 11:31   좋아요 0 | URL
명절 잘 지내셨나요? ^^
전 어제 떡국 잘 먹었습니다. ㅎㅎㅎ 양지머리 대신 치마살로 국물을 냈죠. 치맛살은 그나마 결대로 쪽쪽 찢어지니까요. 남편은 여전히 투덜대더군요. 이맛이 아니야, 이 맛이 아니야, 이래가며. 한대 때려 주고 싶은거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ㅎㅎㅎ
 
욕망의 응달 박완서 소설전집 5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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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은 대부분 최소한 한번은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뜻밖에 낯이 설었다.  

이 책은 약간, 파격적이다. 전혀 박완서 스럽지 않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박완서 스럽다. 나는 이 책을 93년에 나온 세계사판 박완서 전집에서 읽었지만, 이 책은 실제 1978년 <여성동아>(문예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기 바람)에 1년 반동안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사실 작가들은 연재와 비문학지에 작품 발표라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한때는 신문 연재 소설이 소설의 대표적인 발표 지면이었고, 실제 신문 연재 소설중에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동아일보)나 최인호의 상도(발표지 기억안남. 신문이었음) 박경리의 토지 5부 (문화일보)등은 장편 소설로서의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 내지만, 대부분 비문학지에 연재되는 소설은 통속성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혐의의 시선을 짙게 받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박완서의 소설 중 가장 통속적이다. 숲 속의 별장 같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밀실, 그곳에 모여든 각자 모두 구린 구석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명 한명 죽어나가는 상황. 그리고 유일하게 순결한 누군가에 의한 범인 탐색. (오, 이쯤되면 크리스티 여사가 부럽지 않지 않나?)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박완서스러움을 잃지 않지만, 어차피 상황이나 인물 모두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관계로 박완서의 묘사는 빛을 그다지 발하지 못한다. 사실 이쯤되면 앗,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에도 오롱이 조롱이가 나오는 건가, 싶기까지 하다. 어떤 상황의 어떤 인물에게도, 그리고 어떠한 관계에도 충분히 그럴법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게 박완서 선생님의 최대의 장점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면이 부족하다.  

주인공 자명과 민우의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도 억지스럽고, 사실 자명이 민우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다. 이야기는 미혼모인 자명이 민우의 유혹(?)에 이끌려 6살난 아들 윤명을 데리고 저택집으로 들어가 저택집의 과거와 비밀, 2살 어린 시어머니 소희 부인의 비밀을 하나하나 추적하고 밝혀내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자명이 이 저택집으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부자연스러운데다 인물들이 죄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게다가 도무지 이유없이 등장했다 사라져버리는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자면, 윤명의 아버지인 윤재. 윤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명이 윤재의 집에서 당하는 수모는, 이야기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자명의 배경으로 그런 장치를 해 놨었어야 했나 싶고(그냥 사연있는 미혼모쯤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민우의 어머니가 굳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영우의 어머니는 더욱 갑작스럽다. 박완서의 소설에서는 사실 이렇게 군더더기 인물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 소설은 유난하다. 이야기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구도로 흘러가고, 결말은 더욱 작위적이다. 박완서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기엔 이 작품은 뭔가, 죄송스럽게도 2%가 부족하다.  

그래도 어쨌든, 박완서 선생님도 이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한국적인(?) 추리소설은 이런게 나온다고, 박완서 스럽게 가독성은 역시 최고라고. 주저리 주저리.  

201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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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1-10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쓰셨다는 데, 제목을 보곤 모르겠더니...내용을 보니 읽은 책이네요~^^
저 이 책에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쫌 남사시려웠는데...ㅠ.ㅠ

아시마 2011-01-10 15:19   좋아요 0 | URL
전 솔직히...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남사시러웠던 정도가 아니라, 이 책을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요. -_-;;;

매문이 필요하신 분도 아니었을텐데.. 왜 이런 글을 쓰셨을까요? 에효.

아, 맞다. 근데 이 소설의 아우라가 한참 뒤, 2000년대에 쓰신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풍겨져 나와요. 저는 이 두 장편이 은근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더라구요. 내용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뭐랄까 사람들의 속물성이 가지고 오는 그 기묘한 은밀함에 대한 탐구? 뭐 그런거요. 아직 정확히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되어서 말이 막 꼬이네요. -_-;;;

여튼, 마음은 아프지만 의미는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식의 추리기법을 차용한 소설은 전혀 쓰시지 않으셨어요.) 리뷰 한편 남겼어요. ^^;;;

78년작이니까요. 소설가도 변신을 하지만 대한민국의 소설작법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던 8-90년대 아니겠어요. 이해해야지요. 하하하... 그 시기 나온 한국 추리는 다 요모냥 요꼴... ;;;;

blanca 2011-01-1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설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아니고--;; 근데 박샘이 의외로 통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지점을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일단 너무 재미있잖아요. 정말 너무 훌륭한 작가인데 재미 없는 작품을 쓰는 이들도 많아서....

그런데 저는 왜 자꾸 혼자서 박완서샘 책 전작주의를 90%는 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ㅋㅋㅋ 캐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아시마님, 저 담주에 이사가는데 <도시의 흉년>은 아주 어수선한 가운데 주문해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서울 진짜 너무 추워요. 여하튼 아시마님이 돌아오셔서 저는 너무 기쁘다는^^;;

아시마 2011-01-11 16:10   좋아요 0 | URL
박완서 샘 작품을 전작하시려면 일단 세계사판 장편소설 전집(19권까진가 나와있고요)이랑 문학동네에서 나온 단편소설 전집 6권+푸르매 출판사에서 나온 <환각의 나비>라는 박완서 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을 읽으면 큰 줄기는 잡히는 거고, 나머지는 에세이집들이랑 근간이라고 보시면 되요. 아주 오래된 농담 이후의 책들은 아직 전집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여행기랑 일기도 따로 있고 박완서 선생님 작품 해설집이랑 작가앨범(웅진판), 작가세계에서 나온 박완서 편, 뭐 이런것들까지 챙기면 한 80%쯤은 전작 콜렉션 하신 셈이 되요. 워낙에 다작하시는 분인데다 예전에 나왔던 에세이 중에 절판된 것들이 좀 있어요. 소설로만 다작이 아니고, 에세이랑 산문들도 워낙에 많이 쓰셔서... 짧은 산문인데도 정말 버릴것이 없다는게 박완서 샘의 장점이죠. 저도 옛날 80년대 초반에 나온 에세이집 <혼자 부르는 합창>은 아직 구해보지 못했어요.

아, 도시의 흉년은 세계사판 박완서 전집에 상, 하 두권으로 들어가 있구요, 그거 말고, 하권 이후의 이야기가 있는 속편이 또 있는데, 그건 새로 발간하지 않으시는 듯 해요. 저도 예전 세로읽기로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도시의 흉년>은 박완서 샘 작품 중에 제가 또 특별나게 손꼽는 작품이거든요. 빠져드시면 ㅎㅎㅎㅎㅎㅎ 짐정리가 늦어지실 겝니다.

어디로 이사가세요?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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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혹평을 하기보다는 입을 닫아버리는 쪽이다. 나의 혹평으로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것도 저어되지만, 더 중요하게는 혹평을 하고 듣는다고 한들 그가 조금치라도 발전하거나 변화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나쁜점을 마구 공격하기보다 좋은 점을 마구 칭찬해서 그쪽을 돋워주는 쪽을 택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가, 김진규에 관해서는 이제 혹평 좀 해야겠다. 뭐 나 따위의 혹평으로 이 사람의 글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지만. 

김진규는 2008년 벽두에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이다. 2008년 새해 벽두부터 알라딘은 시끄러웠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아직 등단도 하지 않은 작가의 첫 작품이 제 13회 문학동네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고, 작가의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작가의 인터뷰가 먼저 알라딘에 게재되었다.  

그녀의 첫 책 <달을 먹다>로 나를 화악 끌어당긴 것은 책 뒤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의 말이었다. 옮겨본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재, 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

 

무려 최명희란다. 무려 최명희. 그 혼불 최명희 말이다. 지름신이 내려와 머릿속에서 광을 쳐 댔다. 당연히 예약구매를 했다. 그리고 책을 받았다.  

이런, 문학동네, 이 조선일보스러운 것들아.  

책을 다 읽고, 책 뒤에 수록된 심사평까지 다 읽고 한 말이었다. 어떻게 박완서 선생님의 심사평 중에 딱 너 좋을 거 한줄만 꺼내놓냐?  

박완서 선생님의 <달을 먹다>에 대한 평가는 정말이지, 그지없이 가혹하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모든 박완서 선생님의 각종 문학상 심사평 중 가장 가혹하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나 박완서 선생님글 스토커쯤 되니까, 이 말 믿어도 된다.) 

박완서 선생님의 평 중 일부를 옮겨본다. 

"<달을 먹다>를 나는 아마 세 번도 더 읽었을 것이다. 내리 세 번을 정독했다는 뜻이 아니라 읽다가 줄거리를 놓쳐서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는 소리이다. 참으로 읽기 힘든 소설이지만 난해한 소설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중략)............ 줄거리만 말하면 흥미진진할 듯싶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중략).............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큰 그림을 총체적으로 보려면 독자는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이 스스로 꿰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작가가 이렇게까지 불친절해도 되는 걸까 싶게 그 조각 맞추기가 쉽지 않다. .... (중략) .... 어렵사리 꿔맞춰서 겨우 한 화판 속에 퍼즐조각을 빈틈없이 집어넣고 나서도 완성의 기쁨이 별로 없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는 거, 곧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그 작의가 와 닿지 않았다.  .....(중략)....

혹평은 이만 접고 좋은 점도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제, 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 작가의 억제해야 할 장점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작가는 인물도 사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물들이 구체적인 언동으로 성격을 표출하고 운명을 암시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미리 나서서 설명함으로써 인물들이 꼼짝달싹 못하도록 규정해놓고 있다. 인간도 정물화처럼 묘사해 박제화 시키는 건, 앞으로 이 작가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달을 먹다> 심사평 중에서

혹평 접고, 장점도 있다더니 두줄 써 주시고 바로 "그러나" 붙여버리셨다. 장점도 단점인 작가란다. 박완서 선생님 최고 乃 -_-;;; 

장점은 하나도 없는 글 되시겠다. 도대체 작가는 이 글을 왜 썼는지 모르겠고, 문학동네는 왜 무려 '소설'상을 줬는지도 모르겠고, 당췌 이 글이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처녀작이니까. 괜찮다. 최명희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인정한다. 구절구절 섬세한 묘사도 해 낼줄 안다. 남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 다음작품 기다렸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도 읽었다. 재미있게 술술 읽어넘겼다. 여전히 큰 줄기를 잡아내는 서사를 구성해내는 데는 약한 작가지만 그래 첫 작품보다 나아졌으니가 너그러이 넘겼다. 삼 세판, 한 작가에관해 글을 쓰려면, 세권까지는 읽어줘 보자 싶어 이 책까지 읽었다.  

아 쓰,.... foot. 어쩌라고오오오! 

아니 얘는 말이지, 그 위대한, 살아있는 대작가 박완서 선생님이 요목조목 넌 이런 점이 나쁘고 이런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다 손수 짚어주시기까지 하셨으면 극복하려는 척이라도 좀 해봐라, 응? 너한테 약한 건 서사거든? 넌 도대체 소설가라고 하기 무색하게(소설은 서사장르라고오오!) 서사가 너무 약해. 장면과 장면만으로 나머지는 알아서 채워 나가라고 말하는 건 소설이 아니라고, 어떻게 넌 니가 쓰고 싶은 장면만 쓰냐고, 작가가 이렇게까지 불친절해도 되는 걸까 싶다는 말씀으로 이렇게 불친절하면 안된다, 라고 말씀해 주신 그 대작가 노선배의 말을 이렇게 깡그리 무시하냐? 응? 응? 응? 아니, 뭔 깡이냐고, 대체! 

이 책은 전혀 서사가 연결되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진짜, 웬만해서는 서사와 서사사이의 블랭크를 메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편인데, 이 소설은 2/3가 넘어가도록 이 이야기가,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박완서 선생님이 달을 먹다를 세번 넘어 읽으셨다더니 이 책은(안 읽으셨으리라 확신하지만) 아마 열번쯤 읽으셨을게다. 나도 나중에 숫제 오기로 서사 파악하려 읽었다.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말한다.  

"내 이야기의 팔할은 공부에 의지한다."  

<저승차자 화율의 마지막 선택>, 김진규, 문학동네, 2010, 작가의 말에서

그러니까 말이다, 이 작가, 공부한 거 아까워서 놓지를 못하는 거다. 자기가 공부한 염색과 당시의 사건들과, 각종 벼슬아치들 구실아치들... 그런 것들 공부한 거 자랑하고 싶어서, 나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아는데 니들은 이거 모르지? 자랑하느라 정작 소설은 쓰지도 못하고 끝이 난다. 막판에 가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긴지 자기도 헤메었을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한 후, 김언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김진규는 이런말을 한다.  

"남편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매일 책만 붙들고 사니까, 쏟아내지 않고 그렇게 계속 구겨넣기만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랬나봐요." 

<달을 먹다>,  김진규, 문학동네, 2008, p. 263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그러니까 이 사람의 글쓰기라는게 과식과 급체로 쏟아져 나오는 오바이트 또는 설사 되시겠다. 공부하는 작가 좋지. 남들보다 많이 아는 작가 좋고, 남들이 쓰지 못하는 글 써내는 작가 좋고, 속에서 이야기가 고이고 넘쳐 도저히 참을 수 없을때 터져나오는 이야기도 좋고. 김훈이 칼의 노래를 한달만에 썼다던가 세달만에 썼다던가. 중요한 건 그 이야기를 속에 담아 발효시키는 과정이다.  

잘 삭은 똥냄새는 곱기만 한데 말이지. 이 작가의 글을 전부가 전혀 삭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그러나 이미 서로 뒤섞여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런 토사물 또는 설사의 느낌이다.  

도대체 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것일까.  

 

1. 타인의 글에 대해 토사물이니, 설사니 이런 극단적인 악담을 하기는 싫은데, 표현을 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김진규의 스스로의 글에 대한 설명이 그러하였으니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표현일 뿐 특별히 욕을 보이기 위해 선택된 단어는 아님을 밝혀둔다. 

2. 지금까지 출간된 김진규의 책 네권(달을 먹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을 모두 읽고 쓴 글이니 뭐, 어쩔 수 없다.  

3. 에혀.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_-;;; 공지영이 그랬지. 일단 언어에 대한 감각은 있어야 한다고. 거기에 덧붙인다. 최소한의 서사를 구성해 낼 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4. 문득 느끼는 건데, 문학동네에서는 김진규 의 책들마다 표지를 어쩌자고 이런 일러스트들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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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1-08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저 김진규 인터뷰만 몇 번 읽어 봤는데 등단도 하지 않은 주부가 단편 습작도 없이 장편을 갑자기 써서 바로 고액의 상금을 받고 등단했다는 그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좋아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군요--;; 요새 출판사 공모 수상작들이 함량 미달이라는 평이 많더라구요. 박완서 스토커 ㅋㅋㅋ 갑자기 안그래도 박완서 샘의 소설을 한 편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의 흉년>을 읽을까 하고 있었거든요. 또 아시마님의 추천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 리뷰 왜이리 재미있죠? 아시마님이랑 얘기해 보고 싶어요.^^

아시마 2011-01-08 21:11   좋아요 0 | URL
사실 전 달을 먹다 기대가 너무 컸던 책이라 실망도 어마무지 해서요.
그래서 그때는 리뷰도 못쓰겠더라구요.

제 주변에 책 좋아하는 사람들 다들 김진규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해요. 그나마 제가 좀, 희한하게 질깃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어서, 4권을 내리 읽어준거죠. 근데 이제는 그만 읽을까봐요. 사람이 발전이 없는 걸로도 모자라 점점 나빠져요.

습작도 없이 고액의 상금과 함께 바로 등단하는 드라마틱한 주부중엔 심윤경도 있죠. 심윤경은 김진규와는 전혀 달라요. 김진규가 달을 먹다를 내놓던 그 즈음해서 심윤경도 달의 제단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정말... 비교체험 극과극이니 반드시 읽어보세요, 달의 제단은. 너무 아름다운 책이죠.

김연수가 그랬잖아요. 첫 작품이 대표작이 되는 작가들이 80%가 넘는다고. 그러고보면, 등단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작가는 외려 흔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도시의 흉년은 너무 좋죠. 하긴 뭐, 박완서 선생님 글중에 안좋은게 있으려구요. 그래도 제가 유난히 좋아하는 책이기는 해요. 예전에 드라마도 했고.

이 리뷰가 재미있으셨다니 다행. 누구 험잡는 리뷰라, 재미까지 없으면 전파 낭비잖아요. ^^;;; 저도 블랑카님이랑 이야기 해 보고 싶어요.

최근 이사하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디로 하셨나요? 나중에 저 귀국했을때, 가까이 산다면 우리, 다같이, 독서회라도 조직해 보아요!!!

잘잘라 2011-01-0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관심 없던 책(작가) 리뷰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혹평을 하기보다는 입을 닫아버리는 쪽이다, 라는 첫 문장에 공감해서 읽기 시작한 리뷰, 끝까지 재미있게요^^.

내친김에 『나는 여기가 좋다』 리뷰도 읽었는데, 사기 결혼 운운하신 대목에서 킥킥거리다가 즐추 눌러버렸습니다. 재밌는 아시마님을 알게되서 보람찬! 주말이 되었어요. 땡큐베리감사마치~~~

아시마 2011-01-09 18:57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겨찾기까지 해 주셔서, 더. ^^
즐겨 찾으실 때마다 읽을 거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볼랍니다. ^^

김진규는 음. ㅎㅎㅎㅎㅎㅎ 관심 갖지 않으셔도 될 것같은 작가중의 한명입니다. ^^;;;;;;

2011-01-09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절로 2011-01-1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스러운 것들!!! 지존이십니다그려~

아시마 2011-01-11 16:1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녀고양이 2011-01-12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여, 이 책을 50페이지 읽다가
못 견디고 던져버렸어요. 저랑 취향이 너무 안 맞는거예요.

그런데 제가 친한 지인이 이 책 괜찮다고 리뷰를 썼더라구요.
역시 제 취향이 지랄맞아 하고 있는데, 아시마님의 리뷰 보고,,, 크크크, 위안 받는 중.

아시마님, 굉장히 오랜만에 들렸네요. 잘 계셨죠?
건강하고 즐거운 새해되셔요. 아직도 인도네시아에 계신건가요?

아시마 2011-01-15 20:45   좋아요 0 | URL
작가마다 특징이 다 있고, 이 작가의 장기가 문장이랑 묘사니까 그쪽을 중점으로 봐 주어야 한다고 생각은 해도... 이 작가는 좀 심해요. 정말 어지간하면 저도 읽어주는 편인데, 화율은 진짜 좀.

마녀고양이님도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
저는 이제 2년 반쯤 남았답니다. ㅎㅎㅎ 세월 참 빨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