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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의 여왕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질투라는 감정은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호승심이 많은 사람이 질투도 많다고 하는데, 질투는 끝내 그 질투를 하는 사람과 그 질투를 받는 사람 양쪽을 다 파괴시킨다. 나 쟤 싫어, 그냥 주는 거 없이 미워, 라고 말할때 그 사람의 내면은 그 '주는 거 없이 미운 쟤'를 질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질투를 하는 사람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쟤가 미운짓을 하기 때문에 싫다고 강변한다.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은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동경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을 질투하고, 좋은 성적을 동경하는 고교생은 나보다 성적이 나은 사람을 질투한다. 질투는, 내가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이니까.
그런데 이 질투라는 감정은 참 희한한데서 발현된다.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의 질투 대상은 공인된 미녀인 김태희 전지현이 아니다. 같은 아파트 501호 애 엄마가 질투의 대상이다. 성적에 집착하는 아이의 질투대상은 전교 1등하는 나일등이 아니라 나와 비슷하게 약간 높은 성적을 가진 이중간이다. 이상하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고3 내내 나는 K와 Y 둘과 함께 점심, 저녁을 먹었다. Y는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였고, 나는 중간보다 좀 위, K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 있던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저녁마다 나는 혼자 버려져야 했다. K는 늘 Y와 둘이 나가버렸다. 그 둘이 아니어도 밥 먹을 친구는 있었고, 처음엔 어리둥절 했지만 나중엔 으레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모의고사날 저녁마다 버려져야 했던 이유는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K의 고백을 통해.
고등학교 시절 난 언어영역으로는 거의 전교 톱이었는데(그래, 자랑질이다.) K는 늘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언어영역만 아니면, 나를 이길 수 있는데, 단 한번도 모의고사 점수로 나를 이겨보지 못했던 K는 성적이 나온 저녁이 되면 속이 상해 Y를 끌고나갔던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난 정말 몰랐다. 학교 다니는내내,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신기할 정도로, 나는 성적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애였으니까. 그렇다고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남의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그걸로 스트레스 받아본 적이 없다. 당연히 누군가를 질투해 본적도 없고, 내가 질투의 대상이 될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사실 나는 좀 감정적인 부분에선 늦되는 아이였다. 아주 많이.
재미있는 건 K의 질투 대상이 Y가 아닌 나였다는 사실이다. 전교 1-2등의 수재였으니 Y와 나의 언어영역 성적은 비등비등했는데도 K는 Y의 언어영역 성적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않고(사실 관심도 없고, 으레 잘했겠거니.) 나의 성적에만 관심있고 나에게만 스트레스를 받아했다. 나에게도 그랬지만 K에게도 Y는 애초 경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연히 질투를 느끼지도 않는다.
시간을 좀 더 당겨서, 대학을 졸업하고 여차저차해서 일식집 서빙을 하는 언니를 알게 된 일이 있다. 그 언니의 경쟁대상은 놀랍게도 고현정이었다. 한때 연예인을 꿈꾸던 언니가 트레이닝 비슷한 걸 받느라 요가 헬스 학원같은걸 다녔는데, 그때 그 언니 옆에 데뷔전의 고현정이 있었더란다.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걸 굳이 내게 거짓말 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이었으려니 한다.) 그런데 그 언니는 연예인의 꿈을 접고, 일식집 서빙으로 취직을 했는데 고현정은 그때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끝내고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그 언니는, 고현정도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자신도 삼성가 까지는 아니어도 명문가의 며느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 흠. 1년여의 사귐뒤로 만난적이 없는데 그 언니는 꿈을 이뤘을까. 그 당시의 언니와 고현정은 내가 볼 땐 정말 극과 극이었는데, 그 언니에게 고현정은 자신과 동급이었다. 질투란게 뭘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었던 내 인생의 일화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잘나가는 것에대해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운명론을 갖다 붙이기도 하고, 전생을 갖다 대기도 하고. 그런데 한때나마 나와 동등했던 사람이 나보다 나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또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아니면 그거 하나만 빼고는 나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그 하나만은 내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데 대해서는 불같은 질투를 느낀다. 내가 쟤보단 낫지, 라는 천박한 위안을 주던 대상이 내가 무척 가지고 싶으나 아직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휙하니 쟁취해버렸을 때의 박탈감은 거의 증오에 가깝다. 그래서,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고, 질투와 증오는 사촌간이다.
이 질투를 증오가 아닌 자기 발전의 연료로 삼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사람이라는 게 그러기가 참 힘들다. 그럼 그냥 놓아버려도 될텐데 질투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집착과 함께 온다. 질투의 대상은 밉고 싫지만, 그 사람의 소식에는 가장 감도 높은 수신기가 작동한다. 그래서,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고, 질투와 증오는 사촌간이며, 질투와 집착은 동복 형제다(사실 쌍둥이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 <다이어트의 여왕>은 그 질투의 속성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TV리얼 쇼 <다이어트의 여왕> 참가자인 14명은 처음에 비만이라는 동일 선에 서서 함께 출발했다. 거기서 이들은, 서바이벌 게임 형식으로 참가자 한명씩을 탈락시켜 나가면서 단 한명의 다이어트의 여왕을 뽑는 과정에 참여한다.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형식 자체가 질투라는 감정이 개입하게 만든다. 나보다 나아서 질투나는 사람은 가차없이 탈락 대상이다. 프로그램 속성상, 나보다 더 살을 많이 뺀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라서도 그렇지만 경쟁의 대상이라서도 탈락시켜야야 한다. 그런데, 절대 그 이유가 질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팀에 도움을 주지 않으니까, 융화에 방해가 되니까 기타 등등등의 구구절절한 이유가 붙는다. 게다가 그들은, 질투의 대상(아직까지는 불특정 다수다.)을 이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결코 공개하지 않는다. 질투란게 원래 그렇다. 내가 너를 질투한다는 사실은 제 3자 에게도 그렇지만 질투의 대상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질투의 대상은 처음부터 빼빼 말라 피골이 상접했던 작가 김인경이 아니라 나와 같이 뚱뚱했다가 다이어트에 성공해 날씬해진 연두다.
다이어트에 성공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직장으로 복귀해 승승장구해 나가는 연두는, 나머지 13명이 그리 될 수도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질투는 무섭게 작동해 곧바로 증오로 바뀐다. 연두가 근무하는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연두의 음식에 흠집을 잡은 사람은 연두를 제외한 참가자 열세명 모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앗, 이거 스포일러구나.)이 소설은 끝난다.
주인공 연두를 파괴하는 건, 그 나머지 13명의 증오로 변질된 질투와 연두 내부의 질투(옛 연인의 옛 연인에 대한) 두가지다. 처음 연두의 질투는 "질투는 나의 힘" 이 되어 다이어트의 성공을 가져오지만, 질투라는 것이 본래 그쳐지지가 않는 것이라(집착과 쌍둥이라니까.) 결국은 연두를 파괴로 몰아넣는다.
질투로 인해 망가진 연두를 구해내는 건, 그 질투와 상관없이 연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그대로의 사랑과 관심이다. 사랑과 관심만이 동경으로 시작된 질투, 질투에서 진화한 증오, 증오와 더불어 오는 집착의 고리를 끊는다. 자족한 사람은 타인을 질투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니 남이 가진것을 동경하지 않는다. 아마 연두는 자신이 질투로 인한 증오와 집착의 대상이 되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상처야 되겠지만, 그것이 이미 자신의 질투를 딛고 살아남은 연두를 또다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지금, 질투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꽤나 강렬한 질투다. 이런 나를 구제하는 것도 오직 자족한 삶일텐데, 그 자족의 평화는 언제 찾아오려나.
지금, 당신은, 누구를 질투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