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대학 2학년 겨울에 잠실 롯데에서 일주일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과외를 제외한다면 평생에 걸쳐 내가 해 본 유일한 아르바이트다. 알바 사나흘차가 되었을 때 그곳의 3교대 청원 경찰의 대장(조장?)쯤 되는 이와 점심시간에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리저리 들리는 풍문으로 그는 20대 후반에 이미 애가 둘이나 있는 기혼남이었으며, 직업군인을 거쳐 그곳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다. 묘하게 권위적인 태도의 그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어조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몇 살이냐, (스물 한 살이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냐 (친구 따라서요) 등의 질문 끝에 남자친구는 있냐, 물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남친이 있던 때라 “네, 공돌이랑 사귀고 있어요.”라 대답했더니 표정이 꽤나 기묘해졌다. 뭐랄까. 너도 참 안됐구나, 하는 표정.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나름대로는 격려하는 어조로 말을 했다. “그래, 공장을 다니면 뭐 어때서, 남잔 돈만 잘 벌면 되지.”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처음으로 접한 거였다. ‘공돌이’라는 말의 함의가 그와 나는 전혀 달랐다.
2. 사회학자 조은의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읽게 된 계기는 그때의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영세한 경우도 세금이 많이 나와요?” 물었다가 “영세한 게 뭐예요?” 라는 질문을 받고 아차 했다. 얼마 전 덕주 씨 권투 시합 날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덕주씨가 “‘김천’을 가자”고 해서 내가 “‘김천’이 뭐냐?”고 물었다가 “‘김밥천국’ 모르세요?”라고 신기해할 때와 비슷했다. 오랫동안 알아 친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은 순간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고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고 만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11
나도 모르는 새 강의실에서 쓰는 언어나 집안 식구들끼리 쓰는 단어들을 쉽게 말해 버리고 나면 질문이 들어오거나 대화가 중단되거나 했다. 예를 들면 영주씨에게 “저녁 먹을 때 주로 화제가 뭐예요?”하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하다가 “화제가 뭔데요?”라고 되물어 오면 대체할 만한 쉬운 말을 생각해 내느라 멈칫거리게 된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88
이 인터뷰는 2011년에 한 것이고, 영주씨는 73년생, 당시 38세. 덕주씨는 79년생이니 당시 32세였다. 영세하다라는 단어와 화제라는 단어를 모르는 30대의 한국어 네이티브라니.
3. 소설가 조선희는 단편소설 <서울의 지붕 밑>에서 ‘자신의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은 모두 판타지다. 우주전쟁뿐 아니다. 비참이나 남루도 그렇다.’ 라는 말로 동시대 같은 도시에 사는 전혀 다른 계층의 이질감을 묘사해 냈다. 대학을 나온 (아마도 전문직이나 교수쯤 될) K는 갑자기 결근을 한 파출부 정자 씨의 산동네 집을 찾아 간다. ‘서울에 30년 가가이 살아도 이런 동네는 처음이다. K의 가까운 친구나 친척 중에 산동네 꼭대기에 사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K의 계층을 제시하고 ‘거제도에서 자라 서울로 온 정자 씨는 35년의 생애에 거제도와 서울 외에는 가본 곳이 없었다. K는 정자 씨가 문맹이라는 데 처음 놀랐었고 그 다음엔 그가 “그런데 부산은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을 때 두 번째 놀랐다.’는 말로 정자씨의 계층을 제시한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좁아서 한두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건 학연과 지연이 엮어내는 범주 안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얘기다’ 라는 말로 두 계층의 단절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누구나 자기 동네에 갇혀 살기는 마찬가지다. 울타리 바깥은 그저 책이나 신문이라는 종이 위에 건설된 판타지일 뿐이다.
(중략)
사라져버린 정자 씨 가족은 K의 상상력 밖에 있다. 서울의 지붕 밑이라 해도 K의 상식이 감히 미치지 못했던 것인데, 그 바깥으로 튕겨나갔다면 그곳은 대체 어떤 외계인가.
조선희, <서울의 지붕 밑>, 『햇빛 찬란한 나날』, 실천문학사, 2006, p. 116-117
‘공돌이’ 라는 말의 함의가 다르고, ‘영세하다’와 ‘화제’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성인 남자가 사는 곳, 그곳은 대체 어떤 외계인가.
4. 이 책은 사회학자 조은이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던 1986년 유니세프의 연구비를 받아 <재개발 사업이 지역주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 출발하였다. 두명의 대학원생이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 방을 얻어 입주까지 해 연구를 했고 그때 심층 연구 표적 사례 22 가구 중 한 가구인 정금선 할머니네를 25년간 추적 연구한 결과물이다. 정금선 할머니 가족의 이야기는 《사당동 더하기 22》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이 되었고 그 뒤로도 3년간 더 추적 관찰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5.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식상할 정도로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 연진희 역, 민음사, 2009, p. 13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을지 모르나 가난한 가정은 동일한 빈곤문화를 보여준다. 오스카 루이스가 1961년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만들어 낸 이 ‘빈곤문화는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정치적 학문적 논쟁을 촉발했다’고 사회학자 조은이 말하고 있으니까.
6. 빌 게이츠의 추천으로 유명해 진 책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며 끊임없이 조은의 책이 떠올랐다. 사당동(뭐, 지금이야 그 사당동이 그 사당동이 아니지만)과 잭슨(또는 러스트 벨트)이 겹쳐졌고, 철거민과 힐빌리가 겹쳤다. 사당동 사람들은 시유지 땅 10평에 진흙집을 짓고 살고 잭슨의 사람들은 트레일러 파크, 정부 공급 주택, 작은 농장에 산다. 이 책의 저자 J. D. 밴스를 ‘키워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사당동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거나 중퇴했다. 정금선 할머니 집안에서도 1920년대생 정금선 할머니가 가장 학벌이 높아서 고등고녀 출신이다.
7.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쓴 『힐빌리의 노래』와 사회학자가 빈민을 관찰하고 쓴 『사당동 더하기 25』의 분위기는 같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은의 관찰 대상인 정금선 할머니 집안의 사람들은 누구하나 대학을 나오지도, 고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밴스는 무려 예일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쓴다는데서 오는 냉정한 평가와 자신이 벗어난 그 개천에 대한 혐오가 밴스의 이야기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은이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 거리감이 밴스의 저술에는 없다. 밴스는 자신의 고향 잭슨을 떠나 해병대에서 보낸 4년을 통해 자신이 변화했음을 말한다. 그 해병대에서의 4년이 없었다면 밴스 역시 금선할머니의 손자 영주씨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그래서 이 책이 조금 불편하다.
8. 빈민의 공통점은 종교에(정확히는 교회에) 의지하는 점인 것 같다.
아빠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했다. 알코올 중독자들에게는 공동체 모임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홀로 중독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 임신부에게는 무료 숙소를 마련해주고, 직업교육과 육아 수업을 제공했다. 누군가 직장이 필요하면 교인이 직접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소개해줬다. 아빠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도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몇 푼씩 모아 아빠의 가족에게 중고차를 사줬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너진 세상에서,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종교는 신도들이 순조롭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J. D. 밴스, 『힐빌리의 노래』, 흐름출판, 2017, p. 164
맨몸으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 가족을 통해 보면 교회, 로또 복권, 생명 보험인 듯하다. 금선 할머니는 평생을 교회에 의지하며 살았다. 사당동에 정착해서 교회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고 계 모임도 교인 중심으로 꾸렸다. 상계동으로 이사 온 뒤에도 교회는 사당동으로 갔다. 영주 씨 또한 교회가 의지처다. 야간 신학교 다니는 동안 낮에 일하면서 번 돈의 십일조는 교회에 냈고 약간 모은 돈은 모두 신학교 등록금에 소진했다. 전도사-부목사-담임목사에 이르는 목회자 길을 꿈꿨지만 전도사 자리도 얻지 못했다. 영주 씨는 지금도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지만 여전히 수입에서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는 일은 꼭 지키려고 한다. 할머니가 아무리 어려운 살림에서도 십일조를 거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277-278
아, 쓰고 보니, 쓰바. 미국 교회는 밴스가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는데 한국 교회는 이 가난한 가족에게서 십일조를 뜯어갔다. 천벌 받아라. 심지어 영주 씨가 다닌 야간 신학교는 무허가, 무인가 학교이기까지 했다. 너무한 거 아니니.
9. 가난은 꿈의 크기마저 축소시킨다. 인도 빈민가 출신 소년이 퀴즈쇼에서 우승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꿈은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었다. 선생이 우리에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비행기 조송사나 수상, 은행가나 배우가 되겠다고 대답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요리사나 청소부, 체육선생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나마 용기있는 아이가 원장을 꿈꾸었다. 이처럼 소년원은 우리의 꿈까지 꺾어버렸다.
비카스 스와루프, 『Q & A』, 문학동네, 2009, p. 114
사당동 사람들의 꿈도 그러하다.
이들 계층에서 비교적 공부 잘하고 말썽 안 부리는 자녀를 둔 경우, 아들은 경찰이나 기능공, 딸은 간호사·공무원·유치원 교사 등을 꿈꾼다. 대체로 4년제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드물고 전문대에 가서 기능공이나 간호사 자격을 따거나 작은 회사의 회사원이 되면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말한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160
이런 소박한 꿈의 결정판은 영주씨가 아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영주씨의 아내 지지는 필리핀 출신의 결혼 이주 여성이다.
영주 씨는 지지 씨가 출산한 날, 꿈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아이가 “선생님… 교수처럼 큰 그런 선생님 말고 영어 선생님”이 되는 거라고 답했다. 지지 씨가 영어를 하기 때문에 아들 재성의 영어 교육에 힘이 될 거라고 많이 기대하고 있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264-265
이걸 참.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영주 씨의 아들 재성이는 무려 2008년생이다. 선생님이라는 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수는 안 된다고 지레 선을 긋고 시작하는 그를 안타까워해야 하나 답답하다 해야 하나.
10. 가난 끝판왕은 인도에 있다. 이 책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인도 빈민가의 이야기다. 인도 빈민의 실상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이 책은 소설적 재미가 넘쳐난다.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가. 둘 중 어느게 더 낫니. 라고 물으면 이 책을 택하겠다.
압둘의 정확한 나이는 제루니사도 몰랐다. 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지 누가 장남이 몇 살이냐고 물으면 열 일곱 살이라고 대답했지만, 어쩌면 스물일곱 살일지도 몰랐다. 아이들 입에 먹을 걸 넣어주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아이들이 몇 살인지 기억할 여력이 없었다. 안나와디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 강수정 역, 반비, 2014, p. 195
자신이 낳은 아이의 생일은 커녕 나이조차 모르는 삶이라니.
11.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적 불평등은 커져 갈 것이고 상대적 박탈감도 커져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생각 조차, 나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조은이 관찰한 금선 할머니의 손자녀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그린 집의 방은 세 개였다. 심지어 영주 씨는 ‘넓은 방이 2개가 있는 궁궐’ (p. 261) 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방이 두 갠 데 심지어 넓기 까지 하면 궁궐이란다. 영주 씨의 동생이자 덕주 씨의 누나인 은주 씨는(나와 동갑이다, 그녀는.) ‘지하 셋방이나 임대 아파트 외의 집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았고 실제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p. 249) 상대적 박탈감이고 나발이고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12. 우리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의 가장 비참한 점은 그 희망없음에 있지 않을까. 물론 J.D 밴스처럼 스스로의 가난을 떨치고 일어나 계층이동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냉철한 사회학자 조은은 후기에서 말한다.
한 번쯤 더 이 가족에 대한 다큐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25년에 몇 년이 더해져도 같은 이야기를 쓰게 될지 모른다. 그 점이 두렵다. 25년이 더 더해져도 그럴지도 모른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321
슬프다.
13. 《동행》 류의 TV프로그램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많다. 저렇게 사니 가난하지, 라는 힐난조의 말을 들은 적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남의 이야기 일 때는 그럴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조은은 아주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가난함’의 경험은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이다.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또 하나의 문화, 2012, p. 310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니 가난하다, 라고 말을 한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다. 정확히는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 가난이다.
14.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책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겁나 재미있고 잘 읽히는 책들이다. 믿으시라. 특히 다른 책은 뭐 그럭저럭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니 재미있는게 당연하다 쳐도, 조은의 책은 사회학 보고서인데도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꼭 한번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