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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케이트 앳킨슨 지음, 임정희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1월
평점 :
리셋증후군(Reset syndrome)이라는 말이있다. 컴퓨터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세계에서도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정신병리학적으로는 컴퓨터 중독 증상과 관련되어 흔히 쓰인다. 즉, 온라인과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에 깊이빠진 사람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참을성 없는 행동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을 하다 심리적 압박감이 가중될 경우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희미해 지면서 생명(자신은 물론 타인의 것까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술적인 용어가 그렇듯, 현실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학문적 의미와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자신의 삶을 과거의 어느 시점(주로 중요 선택을 하는 시점)으로 돌려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이런 충동을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쯤되면 이건 정신병리학적 용어가 아니라 시적이고 문학적인 용어가 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은유 말이다.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일부 발췌, 정현종 역.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이야기는 매력적인 소재다. 이런 소재를 사용한 작품은 지금 생각나는 것만도 2004년의 헐리우드 영화 《나비효과》, 2013년의 한국 드라마 《나인》, 2016년의 한국드라마 《시그널》 등이 있고, 내 인생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어 놓으려 시도한 스티븐 킹의 소설(물론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었다) 『11/22/63』이 있으니까. 아. 나 역시 2009년 5월, 해인의 이유식을 먹이다 본 TV 자막을 떠올리면 종종 그 시간, 봉하로 뛰어들어 제발요, 제발! 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인간의 상상이란 다양한 듯, 동일하다.
이 책의 주인공 어슐라는 1910년 2월 11일, 폭설 속에서 탄생한다. 처음에 그녀는 탄생하자마자 탯줄에 목이 감겨 죽고,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난다. 잘못된 선택을 하던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태어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그야말로 리셋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 어슐라는 10번도 넘게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그 반복된 삶 속에 어슐라는 이전의 생을 어렴풋하게 기억을 하고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한에서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현재를 바꾸기 위해 케네디를 살리려 노력했던 『11/22/63』의 제이크 애핑이나 앨 탬플턴처럼 유럽과 전 세계를 전쟁의 포화에서 구하기 위해 히틀러를 죽이려는 시도로 역사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그야말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 대표적으로 가정부 브리짓이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축하하는 마을 축제에 갔다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와 전염시키는 것으로 자신과 동생 테디를 죽이는 일을 막기 위해 세 번의 인생을 다시 사니까.
주인공이 1차 세계대전 직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온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영국인인 이상, 개인의 삶과 역사는 뒤섞일 수 밖에 없으니 히틀러의 문제까지 엮여 들어가는 것일 뿐, 사실 이 소설은 그런 역사 의식보다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오류들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는가에 더 집중한다.
인간은 흔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라고들 말한다. 이 것은 한 개인에 국한된 오류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저지르는 오류다. 1차 세계대전을 겪고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이 책에서 말하듯,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가 또다시 중동 전쟁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간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이 책의 주인공 어슐라는 10번이 넘는 생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겠지. 한두번 쯤이야 어슐라 본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치더라도 나머지 죽음들은 인류 전체의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 안에서 작가는 묻는다. 당신에게 당신의 삶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과연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라고.
“이 이름들.” 테디는 기념비에 적힌 이름들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이 생명들, 그런데 또 전쟁이라니. 난 인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신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훼손해버려, 그렇게 생각 안 해?”
“이건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그냥 살아나갈 뿐이지.” 어슐라가 씩씩하게 말했다. “결국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우린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해. 결코 ‘옳게’ 살 수는 없겠지만 ‘노력’은 해야 하지.”
“계속 반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결국 옳게 해낼 때까지 말이야. 그럼 멋지지 않을까?”
“그럼 피곤할 것 같아.”
p. 518-519
삶을 반복해서 살고 있고, 자신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어슐라가 오히려 ‘인생은 한 번 뿐’ 이고 ‘결코 옳게 살 수는 없겠지만 노력은 해야하지’ 라고 말하는 게 의미 심장하다. 열 번이 넘는 생을 살았지만 어슐라에게 그 삶은 매번 한 번 뿐인 생이자 삶이었고 옳게 살려는 노력을 했을 뿐 과거의 오류를 수정하는 삶은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는 오류 수정을 했지만 어슐라는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 회차의 삶 안에서 ‘노력’을 했을 뿐 옳게-즉 오류를 수정한다는 의식을 가지고-한 일은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은 누구나 리셋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 나도 그렇고 우리 엄마도 그렇고, 이제 고작 10대 초반인 내 아이도 “엄마 난 갓 귀국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드물게 이것이 신의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리셋, 진짜 말 그대로 리셋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어슐라는 그러나 인생이 반복된다는 건 피곤할 것 같다. 고 말한다. 열 번을 넘게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삶이란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리셋까지는 아니어도 내 삶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였을 때, 나는 만족하게 될 것인가.
뜻밖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한편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