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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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자들의 은밀한 즐거움이 하나 있다. 굳이 나의라고 말하지 않고 책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서두를 뗀 것은 이 은밀한 즐거움이 나만의 것은 결코 아니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는 즐거움이다. 알라딘의 신간 알림 설정을 해 놓고도 종종 몇몇 작가의 이름을 알라딘 검색창에 넣어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훈, 김연수, 김영하, 권여선, 한강. 그리고 박경리, 박완서, 정미경. 허수경.

 

박경리 선생님이 1926년생, 향년 83세에 별세하셨다. 박완서 선생님은 1931년생, 향년 81세에 별세하셨다. 납득할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러나 정미경은. 정미경은. 1960년생, 작고하신 2017년에 고작 57세였다. 남겨진 작품이 많지도 않다. 일곱권, 고작 일곱권의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이럴수가. 이건 슬픔이 아니다. 배신감이다. 어떻게 이럴수가. 그 질투조차 하지 못할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겨우 일곱권의 책을 끝으로 어떻게 이럴수가.

 

2017년 벽두였다. 한동안은 책장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늘 책이 넘쳐나고 두겹으로, 세겹으로 책을 꽂으면서도 정미경의 섹션엔 자리를 남겨뒀다. 다음 책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여기에 더 이상 꽂힐 책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미경의 이름을 달고 유작집 세권이 나왔다.

 

다이앤 셰터필드의 소설 열세 번째 이야기는 헌책방집 딸 마거릿이 노년의 유명 소설가 비다 윈터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다 윈터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책을 읽은 것은 없던 주인공은 아버지가 보물처럼 보관하던 비다 윈터의 책 변형과 절망의 열세 가지 이야기를 읽는다. 한없이 매혹되어 읽던 그녀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나는 열두 번째 이야기를 읽은 뒤 다음 장을 넘겼다.

아무것도 없었다.

앞뒤로 책장을 넘겨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열세 번째 이야기는 없었다.

 

열세 번째 이야기다이앤 셰터필드비채, 2016, p.45

 

이것이다. 매혹당한 이야기, 분명 열세 가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펼쳤는데 열두 편밖에 없다니. 마거릿은 비다 윈터 여사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두려워 하면서도 첫 장부터 나를 사로잡았고 밤새도록 나를 포로로 만들었던 열세 가지 이야기를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포로가 되고 싶(열세 번째 이야기, 다이앤 셰터필드, 비채, 2016, p.50)”어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기로 한다.

 

유명작가의 출간되지 않은 원고란 언제나 최고의 화제에 오르기 마련이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는 오리지널 오브 로라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을 집필하며 아내 베라에게 자신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베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베라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아들 드미트리가 200911월 책으로 출간해 버린다. 무덤 속 나브코프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정미경은 정떨어지도록 완벽한 작품을 써 낸다. 완벽하게 벼려진 문장, 온전한 인물들, 똑 떨어지는 구조.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는 두어번, 고개를 갸웃 하였다. . 뭔가. 싶었는데 뒤에 수록된 정미경의 남편 김병종 선생의 발문을 읽으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원고 뭉치를 발견한 다음 나는 출판사에 넘겨야 될지를 놓고 며칠을 고민해야 했다정작가는 대단히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원고를 출력한 채 책더미 속에 던져두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원고가 마음에 안 들었달지 이차 수정을 하기 위해셔였을 확률이 높았다.

 

발문김병종, ‘정미경서늘한 매혹’ 당신의 아주 먼 섬』 수록, p.215

 

남편 김병종은 아내 정미경이 이 미완의 원고를 그 상태 그대로 출판사에 넘겨준 걸 안다면 천국에서도 섭섭해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출간해 버렸다. 정미경의 독자인 나는 몹시도 감사하고, 한편으론 참 많이 음.

 

작품은 김병종 선생의 예측대로 정미경이 이차수정을 위해 버려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정미경 답지 않은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몇 개 붙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미쳤다는 것보다는 미친 애의 엄마인 게 더 힘든 모양인 엄마를 둔 이우는 엄마 연수의 고향친구 정모에게 맡겨진다. 남해의 자그마한 섬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정모, 귀가 들리지 않는 판도, 연수와 정모의 친구이자...., 더 밝히면 스포일러가 되니 쓰지 않겠고, 그냥 태원. 20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가운데 정모가 이제는 쓰지 않는 폐 염전의 소금창고를 이용해 섬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력을 잃어가는 자가 만드는 도서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정미경다운 시리도록 맑고 투명하나 차갑지는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미완인 것은 알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미경.

 

이제는 정미경을 볼 수 없다. 고작 57. 그야말로 신이 질투할 재능.

편히 영면하소서,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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