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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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고전소설론 시간에 담당 교수님께서, 김만중의 구운몽은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 남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다룬 소설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부귀공명과 2처 6첩이 최고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축첩제도가 만연한 조선시대라지만 좀, 그렇군 싶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구운몽 전편을 단 한번도 읽어본 일이 없다는 데 생각이 가 닿았다. 별로 재미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고민 끝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72번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주문해다 읽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없었다.
단 한명의 악인도 나오지 않고, 아주 사소한 갈등조차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란, 도무지, 뭐랄까,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늙은 바람둥이의 소시적 연애담을 듣는 기분이랄까. 고전소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지, 깊고 풍부한 사상이라든지, 그게 아니면 뭔가 기발한 이야기라도 있어야 할 텐데, 이 소설은 그게 없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고전이니까, 그래 엄청난 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 거다~ 라고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지만, 글쎄다~ 조선시대에 씌여졌다는 것 외에 이 소설이 왜 가치를 가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이것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진정한 로망이라면, 나는 정말이지 조선의 선비에게 실망이다.
본디 신선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불제자였던 성진이 인간세상에 태어난다.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고, 가는 길에 그 빼어난 외모와 엄청난 글재주로 가는 족족 여자들을 후린다. 아니다, 후리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유혹을 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 준다. 양소유(성진) 스스로는 단 한번도 여자에게 접근을 한다든지 여자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든지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노력하는 것이 제1부인 정경패와의 만남인데, 사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이 이 정경패다.) 그야말로 가는 여자 안잡고 오는 여자 안막는다, 랄까, 처음부터 나는 수십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울꺼야! 라는 결심이라도 한 듯, 손짓만 하면 휙,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여덟명의 여인네들,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제가 양소유를 모시고 눕는 밤에 자신과 친한 다른 여자를 천거하는 여자가 둘이나 되고, 자신의 몸종으로 하여금, 양소유의 ‘살수청’을 들게 하며, 자신과 결혼할 날을 기다리게 하는 여자도 있다. 음, 그러니까, 이렇게, 2처 6첩을 거느리면서도 그 여성들이 서로형제의 의를 맺어 친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진정한 로망이었단 말인가.
근사한 연애소설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더니, 연애는 전혀 없는 포르노 무비를 한편 본 기분이랄까. 중간 중간 이어지는 사건들도, 전혀 흥미진진한 구석은 없이(뭔가 주인공도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매번 양소유를 사모하는 여성의 도움으로 휘딱휘딱 해치워 버린다. 이래서야 별 재미가 없지 않은가.
사씨 남정기를 사다 읽어볼까 했는데, 음.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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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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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문학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장에 대해 “전압이 높은 문장”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가 마음먹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전압을 준 글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조바심과 약간의 짜증이 나는 일이다.
어느 순간 몰입해서 읽었는가 생각하면, 어느새 눈은 글자를 읽는데 머리는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짜증을 내며 책을 던져버릴 법도 한데, 김훈의 글은 쉽게 팽개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 내 책장에는 김훈의 책이 여섯 권 꽂혀 있는데, 나는 그 중 두 권을 아직도 읽지 않은 채 꽂아 두고 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꽤나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내가 김훈이라는 한 작가를 인지하게 된 것은 당연히 2001년 독서계를 휩쓸고 간 소설 『칼의 노래』덕분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김훈 世說” 이라는 소제를 달고 나오는 그의 짤막한 에세이들 때문이다. 나는 그의 위악에 가까울 정도로 솔직한 에세이를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가 보수주의자임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에서 파생되는 여성의 능력에 대한 예찬을 부정하고, 한여름 여성의 노출패션을 찬양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경직된 사회에서 그는 “오버한다” 싶을 정도의 솔직함으로 글을 쓴다. 위악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거침없는 그의 문장들은 그러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는 위악적인 문장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를 역설가라 말한다.
하기야, 역설은 그가 가장 많이 구사하는 수사법이기는 하다.

올해, 김훈의 두 번째 世說은 “순정한 처사(處士) 김훈이 몸으로 써낸 사람살이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제목은 그의 수사법 그대로 “밥벌이의 지겨움” 이란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밥벌이’라는 명쾌한 이름을 붙일 줄 알고, 그것이 지겹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솔직함이 짧은 에세이에 묻어 나온다.
단지, 버려 주었으면 좋았을 뻔한 글이 너무 많다.
여기저기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묶어낸, 그래서 세설(世說)이라는 이름을 붙인 에세이집인 것 같은데, 해서 동어반복의 글들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김훈, 이라는 네임 벨류에 대한 훼손이 될 텐데…… 걱정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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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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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 2학년 겨울에,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독파했던 일이 있었다.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 이상문학상의 초기 스타일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딱히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뭐랄까, 일종의 소설 트랜드를 읽어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바탕으로 레포트를 썼다가 이쁨 받았지, 울 샌님한테. ^^

무라카미 류는 내가 일본문학에 학을 띠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만약, 그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즈(버려진 아이들의 반란으로 초판 번역됨)』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하루키나 바나나, 가오리, 에이미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엽기코드로 다가왔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애널 섹스의 개념조차 없을 때, 읽었던 코인로커 베이비즈는 며칠동안 잠을 못자게 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은
1.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2. 그의 데뷔작이자 자전적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놈은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가지 이유가 전부다. 그나마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한 건, 울 샌님의 강압에 의해서다. 움. 일본문학은 별로 맞지 않고, 나는 유미리도 싫다만, 또 시키는 건 잘한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누가, 책을 처분하겠다는 글을 올린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처분 목록 중의 하나가 이 소설이었고, 처분 이유가 16살 된 늦둥이 동생이 자기 방에 들어와 이 책을 들춰 보는 걸 보고 얼른 치워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그 정도의 반응인가, 하는 호기심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붉은 딱지는 한층 더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읽던 책을 던져놓고 읽었는데,

마약, 그룹섹스, 동성애, 약물중독, 난교파티……

16살 된 동생이 들춰 본다면 좀 심란해 지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의 취향과는 전혀 반대되는 소설임에도.

소설의 주인공 류는 기지촌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저 이태원쯤 되려나.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 여자와 미군의 난교파티를 주선하고, 마약을 나눠주며, 아무런 미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딱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이, 이것이 굳이 나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눈앞에 주어진 일이고 막상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약과 난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뭘 해야 겠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70년대 초중반 일본 사회의 상실감에 관한 소설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되고 싶은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겨워 미치겠는 그 상실감이 이 소설만큼 확연하게 드러난 것도 드물 것 같다.

물론, 어린이날 읽기에는 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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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love 1 : 냉정과 열정사이 세트 - 전2권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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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고 에쿠니 가오리에게 기함을 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이 책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자주 가는 서평 홈의 주인장이 써 놓은 리뷰를 읽고 다른 책을 주문하면서 함께 끼워 넣어 주문을 하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 주인장이 리뷰를 쓴 책을 거의 다 구입했다. 아마, 내가 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나의 독서취향이 꽤나 비슷하다는 판단보다는 그의 독서취향이 몹시 다양하면서도 꽤나 고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그는 꽤 수준 높게 책을 고르는 편이다.

책의 형식은 꽤나 참신하고 독특하다고 평가받는 모양인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런 식으로 치고받는 이야기, 그러니까 여자 주인공 아오이와 남자주인공 쥰세이, 둘이 함께 사랑하고, 그 사랑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각각 글로 써 낸다는 건, 여기저기에서 많이 시도되었던 형식 아닌가? 그런 형태는 꽤나 매력적일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단지, 이 책이 좀 더 참신한 것은, 그간은 한명의 작가가 각각의 인물을 대변하는 형태였지만 이 소설은 두 명의 작가가 하나의 사랑이야기를 엮어 내려갔다는 것 정도. 덕분에 문체도 느낌도 달라서(개인적으로는 츠지 히토나리가 쓴 Blu쪽이 마음에 들었다.) 입장의 차이도 그만큼 확연히 느껴져서 좋았다는 것 정도?

음. 글쎄.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다른 작가가 쓴 것 치고는 두 등장인물의 성격이 너무 비슷하다. 헤어진 이후에 각각의 연인을 만나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둘 다 개인적인 세계에 침잠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그렇고……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연애를 하게 되는 거야 정해진 이치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비슷한 사건전개와 성격 유형을 보여줄 거라면 굳이 두 사람의 작가가 필요했을까? 아, 문체와 느낌의 차이는 매력 있었다.

두 권을 다 읽어내리고 나서 느낀 건데,
이 책을 정말 맛있게 읽으려면, Rosso와 Blu를 동시에 한 챕터씩 읽는 거다. 아오이 쪽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준세이의 이야기, 다시 아오이, 다시 준세이, 이런 식으로.
나한테도 누가 그렇게 읽으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아오이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준세이의 이야기를 나중에 읽었다. 그것도 6개월이나 묵혀둔 뒤에. 억울해라. 

이 소설의 기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히토나리 덕분인 듯싶다. 서사의 유연성이랄까 튼튼함이랄까, 제대로 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히토나리 덕이다. 그에비해 가오리는 감성에 기대어 열심히 따라갈 뿐이랄까.

20대 초반에, 동경에서 서로가 주변인인 사람으로 만나 동질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해 간 두 사람이, 남자 아버지의 방해와 남자의 일방적 오해로 헤어지게 되고, 8년간이나 떨어져 살다가 10년 전의 약속을 지켜 동경이 아닌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참신하고 재미 있다기 보다는 허접하고 지루한 연애담이다. 이 허접하고 지루한 연애담을 나름대로 산뜻하게 바꾸어 놓는 것은 히토나리쪽. 뭐, 그러니까 굳이 원한다면 Blu만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걸 읽으면서 궁금해 진 게 있는데,
원래 독자란 주인공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특히 그것이 연애담의 주인공일 때에는) 조연에게는 한없이 매몰차지게 되면서 쉽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아오이의 연인 마빈과 준세이의 연인 메미 양쪽 모두를 위하여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8년의 세월 내내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살아온 두 사람에게 마빈과 메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준세이는 애써, ’메미와 헤어진 다음 10년 후에, 그녀를 아오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Blu / p.193)‘ 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메미와의 사랑도 사랑이었다고 정당화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편으론,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아오이를 잊을 수 없어.(Blu / p.218)'라는 말로 메미와의 모든 시간들을 부정해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마빈에 대한 아오이의 태도에서도 딱히 다르지 않다. '나는 마빈에게 일상적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Rosso / p.185)'라고 느끼며 그것에 대해 짜증을 느낄 정도로 미안해 하면서도, 이야기를 하자는 마빈에 대해 ‘나한테는 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도, 그것만은 분명했다. …… 다만 준세이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쥰세이밖에 없다(Rosso / p. 202-203)'라는 말로, 마빈의 모든 의미를 깡그리 부수어 버린다.

어차피, 연인이란, 타인에 대해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only one을 외치기 위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것을 정당화 시키려는 태도는. 죽어도 서로를 잊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아오이와 쥰세이는 서로의 사랑에 대해서만 1/2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메미와 마빈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1/2의 책임을 져야 한다.

가끔은, ‘여자에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던 이수영의 노래 가사를 ‘사람에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진리로 봉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최소한, 과거의 사랑으로 현재의 사랑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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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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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다. 구성이 뛰어나게 잘 되었다든지(이인화), 독특한 문체의 아름다움 이라든지(김훈), 천재적인 발상이라든지(로저 젤라즈니,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런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각각의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분명 소설의 본령은 서사에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요소들을 벗어나 재미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소설은 소설로서의 가장 큰 매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 가발다의 이 첫 장편소설은 매력적이다. 특별히 뛰어난 문체도 구성도- 실제 구성은 좀, 엉성한 편이다- 아닌 이 소설의 매력은 그 서사에서 나온다.

이 소설은 아내를 버리고 떠나는 남자와, ‘버림받은 아내’를 위로해 주는 ‘아내를 버리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다. 일종의 액자소설적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 외형적 틀은 일단, 버림받은 아내인 나, 클로에의 이야기다. 남편 아드리앵은 새로운 여자와 바람이 나 딸 둘이 있는 클로에를 버린다.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그와 함께 두 아이를 만들고서도 어느 겨울날 아침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 다는 사실을 알게”(p.42)된 클로에는 충격으로 멍해져 있고, 그녀를 잠시나마 쉬게 해 주기 위해 클로에의 시아버지인 피에르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의 ‘시골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 시골집에서 머무는 동안 클로에는 시어머니 쉬잔을 버리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마틸다를 버려야 했던 시아버지 피에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설의 중심 서사는 피에르와 마틸다의 사랑이야기다. 그러니까 제목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에서 ‘나’는 피에르이고, ‘그녀’는 마틸다인 셈이다.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클로에와 아내를 버리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려야 했던 피에르는 처음, 전혀 반대의 위치에서 대치하게 되지만, 클로에는 시어머니 쉬잔과의 동일시에서 점점 벗어나 마틸다에게서 일치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남편 아드리앵에게서 버림받은 일의 충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간다. 물론, 그 전까지 몹시 서먹하였던 시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됨은 물론.

작가 안나 가발다는 비교적 균형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를 버린 아드리앵의 손을 들어주지도, 가정을 지킨 피에르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그저, 그녀가 말하는 것은, 사랑의 방식에 관한 것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피에르의 입을 빌어 작가가 하고 있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집스런 딸아이는 좀더 행복한 아빠랑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행복의 요소가 빠지고 의무와 책임만이 남은 사랑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그런 형태로라도 사랑을 쟁취? 또는 지킨 피에르의 아내 쉬잔은 행복하였을까.

그런 면에서 안나 가발다가 클로에의 시선을 취한 것은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다. 버림 받은 것으로 고통을 당하는 여인을 화자로 삼음으로해서 피에르와 마틸다에게 가는 일방적인 동정여론을 차단했고, 그 차단을 통하여 균형잡힌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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