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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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고, 간단하고, 가볍고, 조금 짜증스럽고, 좀 많이 황당한- 소설이다.

확실히 바나나는, 상상력 자체가 이질적이다. 이걸 독특함이라고 해석해야 하나.

종교집단에 가까운 집단의 지도자인 할머니, 그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안에서 자란 나 마오짱, 딸과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어머니, 갓난아이를 인도에 버리고 가는 하치의 부모, 하치와 동거를 하는 여고생 <엄마>, 명상을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인도로 가야만 하는 하치. 열 일곱, 첫 상대는 집안의 중년 남자였다- 라는 마오짱, 마오짱과 <엄마>의 느닷없는 동성애적 행위.

이런 것들의 조합을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일본 내부의 성적 문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르포드라마?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나 손색없을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이 소설은 성적 문란이 주가 된 것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들 하겠지.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거냐, 라고 묻고 싶어지게 만든다, 늘, 바나나는.

재작년에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했던 『툼레이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말도 안 되는 설정과 황당한 우연을 억지로라도 말이 되게 이어 붙이기 위하여 "제비꽃의 요정"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예를 들면, 졸리(라라 크로포드)가 정글에서 길을 잃어 헤메고 있으면 짜잔, 하고 등장해 길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라라 크로포드가 어떻게 길을 찾게 되나를 설명할 재간도 설명할 생각도 없어 뵈는 감독에게는 아마, 최고의(또는 최후의) 선택 아니었을까.

바나나의 소설에는 늘 그러한 "제비꽃의 요정"이 등장한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의 틈을 연결 지어 주기 위하여, 주인공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개연성 획득을 위한 노력은 머리가 아파 하기 싫으니, 일종의 신끼가 있었던 할머니의 유언을 통해 만난다는 황당한 설정(이걸 신비스럽다고 해 줘야 하는 건가.)을 통해 하치와 마오짱을 만나게 해 놓고, 이제 작가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은 모두다 그놈의 "제비꽃의 요정" 에게 맡겨놓고!

그러니까, 바나나의 소설에서 취할 점은 그 '뜬구름 잡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리고 바나나의 가치는 그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있다. 바나나의 글은 구체적이고 질박한 대신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생활'이 거세되어 있다. 황당한 상황의 제시, 현실에서 유리된 인물들의 제시를 통하여 바나나는 반대로 '생활'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색다른 사랑, 독특한 사랑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색다르고 독특하고 현실에서 유리된 이야기를 통하여 현실의 가치,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난감하다. 바나나를 싫어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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