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황경신의 프로방스 여행기를 읽었다. 그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애초에 나는 독일이나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했는데, 그쪽으로 갈 사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 떠올린 곳은 그리스였는데, 생각해보니 그리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이나 살다가 돌아와서 『먼 북소리』라는 훌륭한 여행서를 낸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3년이나 살 수도 없을뿐더러 살다 온다고 해서 하루키보다 재미있는 책을 낼 자신도 없기 때문에 마음을 접기로 했다.
p. 15
그때, 내 책장에는 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가 꽂혀 있었다. 그것도 한 10년전에 사다 꽂아 둔 책이었다. <먼 북소리> 읽기를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난 책을 읽다 덮어두는 일을 별로 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먼 북소리는 두어번 시도해서 50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곤 했다. 특별히 글이 재미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가진 일종의 징크스 같은 거다. 첫판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번에도 쉽게 되지가 않는거. 하지만 황경신의 말은 그런 징크스마저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몇달 뒤, 드디어 나는 하루키의 먼 북소리 읽기에 성공한다. (정확히 3개월 뒤였다.) 읽고나서 알았다. 이 책이 <상실의 시대>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하루키의 책이 된 이유를.
하루키의 책을 읽고 곧 이어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체류기?)를 읽었다.
하루키를 의식해 그리스를 피해 간 황경신과는 달리, 김영하는 하루키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인지, 둘의 체류지는 많은 부분이 겹치고 있다.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도 비슷하고, 비교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마흔 살이 되려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를 긴 여행으로 몰아낸 이유중의 하나이다. p. 16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너무 지쳐 있다는 것이다. 참 내, 어쩌다 이렇게 지쳐버렸지? 그러나 아무튼 나는 지쳐있다. 적어도 소설을 쓰기에는 너무 지쳐있다. 그것이 내가 껴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두 편의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있다기 보다는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쓰면 좋은가, 어떻게 쓰면 되는가, 그런 것도 대충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대로 영원히 스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기분조차 든다. 그리고 머리 안으로는 벌이 붕붕 날아다니고 있다. 너무 시끄러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p. 30
이런 이유로 하루키는 일본을 떠나 그리스 로마로 떠난다. 그럼, 우리의 영하씨는(사실은, 내사랑 영하씨, 라고 쓰고 싶지만, 김영하의 아내님이나 충무공이 보면 기분 나쁠 것 같아 참는다. 뭐, 어쩌면, 김영하씨가 보고도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더욱 큰 이유다. 쳇.) 그 멀고먼 시칠리아, 마피아들의 섬으로 왜 떠나셨나.
나이 마흔에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립 예술대학의 교수였고 네 권의 장편소설과 세 권의 단편소설집을 낸 소설가였고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서울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가 있었고 권위 있는 문학상들을 받았고 서점의 좋은 자리엔 내 책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p. 19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전적인 저주의 형식을 닮았다. 너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소설 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도 좋다. 그러나 절대로 그 시간에 네 자신의 소설을 써서는 안된다. 너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 신나게 떠들어라. 하지만 그 시간에 네 소설을 이야기 하거나 그것을 써서는 안된다. 나는 그 저주의 대가로 월급과 연금을 보장받고 꽤 쏠쏠한 출연료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쉬익, 기분 나쁜 바람소리가 들렸다. p. 21
두 사람의 작가는 놀랍도록 동일한 이유로 각자의 생활터전을 포기하고 모국을 떠난다. 오직, 글을 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서.
김영하는 로마를 거쳐 라파리 섬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섬에서 그는 스무살적의 자신을 만난다. 그 부분은, 이 책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2007년 겨울, 나는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에서 한동안 기시감에 사로잡혀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잡느라 애를 먹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 그리스식 극장때문이었다. 20년 전의 그 노천극장이 거기, 시칠리아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 계단에 앉아 저 멀리 희붐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 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때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하여 반복하던, 그래서 신입생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그 응원가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여, 그대여어어,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
김영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랜덤하우스, 2009, p. 87-88
이 구절을 읽는데 왜 갑자기 울컥했었을까.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이 책을 펼쳐서 이 구절을 보는데도 여전히 울컥한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젊었다>를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흥얼거렸을 김영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그 생각을 한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흥얼거리고 있었을 김영하는, 사랑해 줘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로마를 거쳐 들어간 라피나를 시작으로, 김영하는 두달간, 시칠리아 지역에 머문다. 여행기의 나머지 부분은 평이하다. 그렇다고 평범한 여행기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무려 김영하가 쓴 여행기이니까. 여행기도 위트있다, 이 친구는.
그리고 그렇게 떠난 김영하는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책에 의하면, 2008년 8월부터 캐나다 밴쿠버의 UBC대학에서 1년동안 머물러 있었을테니, 2010년 8월인 지금, 그는 어디를 흘러다니고 있을까. 그는 오지 않고 그의 책만 물결에 밀려 한국에 왔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소문에 의하면, 그의 새로운 단편집은 썩 괜찮은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가 그의 재능을 허비하지 않아서. 조금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와 같은 나이에, 그와 같은 이유로 모국을 떠났던 하루키가 그 여행에서 그 자신의 최고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써냈던 것처럼, 김영하도 무언가를 들고 돌아오기를, 그리고 하루키가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철딱서니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젊은 글을 써 내는 현역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김영하도 그럴수 있게 되기를. 사실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다 좋아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을만큼 사랑하지만, 그래도 노년문학으로 접어든 것은 슬펐다.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겠지만, 나는 김영하가 노년문학으로 가는 건 정말 바라지 않는다. 80이 되어서도 김영하는 김영하였으면 한다.
상대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여행기라기보다는 체류기 또는 생활기에 가깝다. 김영하의 책이 여행기답게 자신이 방문한 지역의 특산물과 명소를 소개하고 그 지역에 얽힌 문학이나 고전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 과는 달리, 하루키의 책에서는 관광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이사를 했으니 옆집 사람은 이런 사람이 있고, 나는 이런 생활을 하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그럴거면 뭐하러 굳이 로마까지 가냐 싶기도 하지만, (로마, 그 복잡하고 물가 비싼곳!) 그거야 하루키 마음이고, 그는 거기서도 콜로세움에 가는 대신 영화관에 가고, 트레비 분수에 가는 대신 마라톤을 한다. 이 글 역시 하루키답게 재미있다.
하지만 글 어디에서도 그의 내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속마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외부 풍경이 건드린 자신의 내면을 펼쳐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라피나 섬의 원형극장이 김영하의 내면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김영하는 고스란히 펼쳐보인다. 하지만 하루키는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이, 일본인의 특성인건지도 모르겠다. 민족성이라는 게 전혀 없을수는 없을테니까. 일본인을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하루키지만, 읽어보면 가장 일본적인 감성을 다루는 작가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작년 하반기, 김영하의 여행기를 읽고서, 써보면 재미있겠다, 생각한 글을 이제야 쓰고 있는 나는 뭔가. -_-;;; 지금까지도 안쓰고 있던 내가 게으른 건지, 1년 전의 생각을 끝까지 지켜낸 내가 집요한 건지 잘 모르겠다.
ps1. 요즘 나는 꿩대신 닭을 하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신작 에세이집을 읽고 싶은 나머지 박완서 선생님의 다른 책들을 세권이나 읽었고, 김영하의 신작 단편집을 읽고 싶은 나머지 김영하의 다른 책들을 차례로 독파해나가고 있다. 하루키도 마찬가지. 사실 이 글은 그 꿩대신 닭의 결과물이다. 흑흑. 불쌍하다, 나.
ps2. 충무공의 사랑이 식었다. 예전엔 다섯권씩 갖다주고 그러더니, 이번엔 딱 두권만 주문하라고 해서 김영하와 박완서의 신작을 선택했다. 하루키와 영원의 아이와 김이설은 또 뒤로 밀렸다. 에혀. 사랑이 식었어어어어어어어어어! \
ps3. 여튼, 며칠만 기다리면 김영하도 박완서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