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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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렬한 축구팬은 아니지만 월드컵은 흥미진진하게 보는 편이다. 나이지리아 전이 열렸던 새벽 3시30분. 평소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시간에 눈을 뜨자마자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자다말고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왜 소리를 지르고 있는가? 골대 근처에서 방황하는 공의 움직임에 왜 탄식하고 상대편 선수들이 한국 골대 근처에서 얼쩡대면 가슴을 졸이는가? 우루과인 전에서 주심만 휘슬을 제대로 불어줬더라면 태극전사들의 앞날과 즐거운 밤샘이 한 번 더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주심을 욕하는가? 이런 일련의 비이성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모적 태도에 은근한 흥분을 즐기는 이유는 뭘까? 

축구 관람자의 태도는 브라운관 속 선수들이 내 탄식이나 환호를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그들이 듣든 안 듣든 중요하지 않다. 선수들과 어떤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일방적 감정 분출이다. 90여 분 간 감정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거센 파도 속에서 파도 타기하는 것 같은데 이 힘은 전략과 전술이라는 계산 속에서도 골을 지배하는 건 불확실함 때문이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고 기술적으로 앞섰다고 경기를 90분 내내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속성은 축구 뿐 아니라 다른 스포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저자가 지적했듯이, 축구가 다른 스포츠보다 극적인 이유는 골의 희소성에 있다. 공을 이용하는 다른 스포츠들이 다량 득점으로 이기는 팀은 계속 이길 것 같은 반쯤 확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축구의 득점은 한 골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한 골이라는 건 본경기가 끝나고 추가 시간인 2-3분 내에서도 뒤집을 수 있다. 직접 뛰는 선수들과 지켜보는 관객 모두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많은 의도적 전술과 반칙등 같은 필연과 우연의 조합은, 삶의 모습과 닮았다. 시간을 지배해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를 빼곡이 채우는 열정을 쏟아도 어떤 알 수 없는 우연이란 이름이 결과를 지배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보통 '운'이라고 부르는 삶의 요소인데 행운이든 불운이든 필연과 어울려 이중주를 한다. 삶의 변주인 축구를 보면서 이중주를 보고 들으면서 익숙해지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한국팀이 '약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행운'을 불러오는 집단 주술로 응원이란 부적을 쓴다. Be the Reds!와 대.한.민.국.이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집단 의식에 들어간다. 개인은 자신의 약점을 외면하고 행운에 몸과 마음을 맡겨도 자괴감이 들지 않는 공식적 집단 최면이 아닐까.  

책 얘기를 하면, 축구 입문서로 아주 훌륭하다. 소제목을 달고 규칙, 문화, 역사까지를 총 망라한다. 축구의 주술적 면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의도적 전략에도 관심이 있다면 일독할만하다.공을 차는 법을 원한다면 물론 이 책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왜 남미축구는 개인기고 잉글랜드 축구와 스코틀랜드 축구의 테크닉이 어떻게 다르고 감아차는 공과 뜨는 공은 어떻게 생기는지 알면 한국 경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남은 월드컵 경기는 여전히 감정 파도타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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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과 마음을 맡겨도 자괴감이 들지 않는 공식적 집단 최면이 아닐까 "라는 부분에 정말 동의합니다.

넙치 2010-06-28 13:59   좋아요 0 | URL
이제는 우리 모두 최면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ㅋ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키어런 앨런 지음, 박인용 옮김 / 삼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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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큼 재밌는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막스 베버 삐딱하게 읽기다. 아일랜드 대학에서 베버를 강의한다고 하니 베버 전문가다. 바로 이 전문가적 기질이 책을 재미없게 만들었다. 나같은 비전문가는 베버를 바라보는 더 보편적 시각을 원하는데 키어런 앨런은 조목조목 베버의 글을 인용해가며 반박한다. 베버의 책 달랑 한 권 읽은 독자한테 세부적이고 꼼꼼한 반박문들이 지루하다. 왜 이 구절이 허술하며 저 구절은 비논리적인지..하는 게 이 책 한 권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 정신을 종교와 관련시킨 데 터트렸던 감탄을 아직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저자가 주장하고 의도하는 바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논문투의 세부적 반박문이 아니라 일반 독자가 베버에 대한 다른 각도를 가질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려줬으면 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모두 베버 연구자는 아닐테니.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가 왜 유럽에서 태어나 호황을 누렸는지 설명한 베버의 입장을 반증하는 부분에서 아시아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설명한다. 베버의 설명이 꽤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기독교-영생과 불교-윤회의 차이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이다.  

기독교가 엄한 아버지를 신으로 하고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기반으로 미물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서양사에서 자본의 축적은 힘, 즉 엄한 아버지로의 상승할 수 있는 사다리였다. 산업혁명 이후 부즈주아지의 탄생은 엄한 아버지로의 상승이다. 반면에 불교는 축적보다는 무소유를 강조하고 힘보다는 힘에서 초월하는 가치를 역설한다. 힌두교나 유교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구조에 베버는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어떤 사회 현상이나 인간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정답은 없다. 모든 발화된 설명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어떤 독자는 참을 크게 이야기하고 어떤 독자는 거짓을 크게 이야기할 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베버의 독창성만 빛나게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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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2024-09-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일수도 있고 거짓일수도 았다는 도대체 어떤말인지
 
방자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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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김대우 감독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보기로했다. 각본을 쓴 <스캔들>,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한 <음란서생>을 보면서 진부한 소재에 대한 다른 해석이 흥미로웠다. <천일의 앤>이 핸리 8세의 관점이 아니라 앤의 관점에서 본 튜더스이야기고 요즘 케이블에서 상영중인 <튜더스> 역시 헨리8세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야사이다. 튜더스 첫 회때 보고는 안 보고 있지만;; 리처드 버튼이 연기한 헨리8세와는 다른 아주 야한 야사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한테 너무나 익숙한 야사인 <장희빈>이 있다. 숙종 시대에 숙종이 주인공이 아니라 장희빈이 바라본 숙종시대이다. 그러나 장희빈이 관점의 미덕을 벗어난지 오래다. 드라마 단골 소재로 한결같은 해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음모, 권모술수. 이런 점에서 <방자전>은 시놉만 듣고도 극장에 가는 수고를 즐겁게 했다.  

방자전을 보면서 아무래도 <음란서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구조가 너무나 닮아있다. 통속소설을 모티브로 한 거며 실내 공간에서 빛을 사용하는 방법은 거의 흡사하다. 인물이 들어있는 실내에 창호지로 들어오는 빛은 마치 고딕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에서 빛이 비추는 것처럼 이국적이고 황홀하다. 인물들이 입는 한복은 전통의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유행하는 패션처럼 낯설고 영화의 비틀기 관점과 잘 맞물린다. 이야기도 조금 각도를 벗어나고 의상도 각도를 벗어나 현대화한다.  

프랑스 영화학교를 나왔다는 감독의 이력을 보는 순간 아, 하면서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고나 할까. 프랑스 왕실이나 영국 왕실 이야기를 다룬 미장센 화려한 사극을 한복으로 치환해서 표현하고자하는 의도가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물들의 옷은 물론 화장법이나 액서서리 모두 눈을 두리번거리게 할 정도로 이국적인데 그 기원이 한국적이지만 낯선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주막집 역시 국적 불명이다. 붉은 등이나 노란 등은 중국영화나 일본식 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영화가 시각예술이니, 감독들이 CG나 대형 액션 씬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처럼 김대우 감독 역시 한국적 복장과 공간을 스펙터클화 하는데 로망이 있는 거 같다.  

이런 미장센이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데 감독은 꽤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야기 측면에서는 어떨까. 항상 그의 영화를 보면 2% 부족한 느낌으로 극장을 나선다. 좋기는 하지만 고개가 갸우뚱 기운다. <방자전>이 춘향전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설정과 이몽룡과 춘향의 러브 라인 아닌 춘향과 방자의 러브 라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향은 전통적 여인상이 아니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이용하는 여인이다. 정이현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처럼 교활하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영화라는 게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두 시간 가까이 펼쳐가야 하니까 간단한 이야기를 늘려야 하는데 각 인물들이 좀 입체적이지 못한채 입담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잘나가는 통속소설가(공형진)은 방자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고 월매는 매력적인데 별 비중이 없었다. 그 중 살아있는 조연은 향단이와 변학도다. 변학도의 개성이 영화를 살렸다. 변학도처럼 개성있게 월매를 이용했더라면..관객으로서 아쉽다. 쩝. 캐릭터 열전 대신에 감독이 택한 노선은 베드신이다. 베드신이 한국영화치고는 세긴 센데 문제는 전체 흐름과 별 관련없이 길다. 여자들이 보기에는 좀 지루하다. 조여정의 노출이 화두인데 여자 관객들이 조여정 가슴을 보고 두근거릴 것도 아니고 그녀의 군살없는 뒷태에 침흘릴 것도 아니지 참 지루했다.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 거 보면 난 김대우 감독 영화들에 확실히 애정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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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6-13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캔들>의 각본도 김대우로군요. 저는 지금까지 <황진이>, <라디오데이즈>의 김현정 작가로만 알고 있었어요. 넙치님의 글을 읽으니 <스캔들>의 그 화려한 미장센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어요.

넙치 2010-06-15 18:49   좋아요 0 | URL
황진이, 라디오데이즈랑은 조금 느낌으로 제겐 다가와요.
스캔들이야 원작이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니 기본설정은 소설에서 차용하고 미장센만 바꾼거니 제가 그렇게 느꼈을수도요..
 
여자 이야기 - Story of Wom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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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나중에 <베라 드레이크>와 연결시켜 조금 길게 끄적여보고 싶다.  끌로드 샤브롤은 고다르와 다르게 영화 속에서 정치를 다룬다. 고다르가 영화를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반면 샤브롤은 그 지점까지 나아가진 않았다. 오히려 정치 속에 갇힌 인간의 군상들을 표현하려고했다.

몇 가지만 메모해두면. 

1. 낙태를 바라보는 법과 여성의 시각 차.  

불법낙태술을 실시하는 여자의 입장은 고통을 당하는 여성의 삶을 구원하고 돈도 벌고. 즉 선을 행하고 돈을 버는 거다. 돈을 위해 낙태시술를 한 게 아니다.  법의 관점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죽이고 위협하는 일을 했으므로 사형당해 마땅하다.  

2. 사형제 

사형선고의 부당한 측면. 규범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 때 같은 죄에 대해서도 사형이 선고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시장경제의 논리와 부합한다. 처벌이 무거울수록 범죄가 줄어들거라는 거. 사형이 문제점이 되는 건 생명의 존엄에 대한 문제보다도 정의의 형평성 때문이 아닐까. 범죄 형량을 내리는 판사는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정신과 의사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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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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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많은 사소한 사건들과 조금의 큰 사건들로 이루어진다"고 로알드 달 님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권태롭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이 아름답다고 하는데는 태도와 시선의 문제다. 대부분은 사소한 반복되고 지루한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인생이 무료할 것이고 가끔 일어나는 큰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인생이 경이롭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일까? 사소한 반복적인 일보다는 가끔 일어나는 큰 일을 바라보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쉽게도 많은 사소한 일에 눈을 돌려버리는 부류다.-.- 

<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는 사소한 일을 어떻게 흥미로운 일로 바꿀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장 폴 뒤부아의 재치넘치는 필력은 타네 씨의 비루한 일상을 모험으로 바꾼다. 타네 씨는 애물단지 저택을 삼촌한테 받아서 수리를 시작하기 전까지 반복적이고 사소한 일에 집중하는 삶을 꾸려갔다. 집수리를 1년동안 시작하면서 많은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만 반복되는 일 속에서 타네 씨는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모험처럼 묘사한다. 모험같은 삶, 흥분되는 삶이란 꼭 집을 나서거나 직장을 뛰쳐나와야 한다는 공식을 잠재의식 속에 품고 있는데 모험이란 사소한 일상에도 늘 깃들여있다. 타네 씨는 집수리라는 일상적 일을 모험으로 바꾸는 모험가다.  

여러 일꾼들과 짧게는 삼 일, 길게는 몇 주동안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그 개성이 타네 씨에게 불러온 파장들은, 타네 씨한테는 물론 즐거움이 아니었다. 물로 흠뻑 젖은 침대에서 잠을 잔다거나 수도관이 터져버린다거나 빗물이 새는 일을 겪는 사람이 재밌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정신일리가 없다. 모험과 일상의 가장 큰 차이는 유효기간이다. 모험은 끝이있고 일상은 끝이 없다. 적어도 일상의 주체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일상은 지속된다. 유효기간의 유무는 인간의 자비로움과 의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힘들고 험난해도 언젠가 끝난다면 참고 견디는데 한 몫한다. 지리멸렬한 일상이 아름다워 보이려면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서 폭발하해야한다는 게 전제조건이 아닐까. 집수리 전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타네 씨처럼. 모험 그 자체가 가치있기보다는 모험 전 혹은 모험 후에 대한 지리멸렬을 되찾기 위해 모험이 필요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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