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낯 간지러워서 안 보려고 했다가 한 후배가 강추해서 봤다. 많은 멜로 영화가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제작되고 남자가 꿈 꾸는 환상을 온통 여자에 넣어두거나 혹은 여성 관객을 겨냥해서 비현실적인 남성상을 마구 남발하는 거에 비하면 이 영화는 아주 훌륭하다.

 

시선이 마고란 여성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점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여자가 꿈 꾸는 남성상이라든가 모든 남자가 꿈 꾸는 여성상이란 전형에서 탈피한다. 결혼 5년 차인 마고의 남편은 곰돌이 푸같은 체형에 닭요리 레시피를 개발하느라 매일 주방에 있고 그 외에는 마고와 농담을 주고 받는다. 마고는 평범한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앞 집 총각을 흠모하기 시작한다. 현재 생활에 별 불만 없는데 갑자기 또 다른 사랑이 막을 수 없는 재채기처럼 찾아온다.

 

내 이의 제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감독은 삼각 관계에 빠진 세 인물의 심리를 이성적이고 잔잔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잡아낸다. 마고가 남편과 춤을 추는 장면이나 결혼 기념일에 극장에 데려다주면서 세 사람이 있는 장면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같은 게느껴지니, 영화는 좋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고 삶은 삶이다. 결국 사랑을 택한 마고가 나중에 전남편을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다. 루(마고의 전남편)는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루의 말을 백만 배 이해한다. 이 영화가 세 사람의 심리를 잘 다루는데도 난 별로 재밌지 않았다. 많은 영화와 책에선 사랑(특히 이성 간에)이 없으면 세상이 종말하는 것처럼 호들갑이다. 사랑이 없어도 사람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밥으로 채울 수 없는 어떤 허기가 이따금씩 찾아오기는 하지만 곧 잊게 된다. 알 수 없는 허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아주 익숙해져서 나는 아주 잘 살고 있다. 감정의 허기에 우선 순위를 매기는 멜랑콜리에 나는 동조할 수 없게 됐다. 나는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  

 

마고는 금기된 사랑과 단 하루 밀회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어둠 속에서 커다랗게 음악이 나오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를 타고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놀이기구가 멈추고 음악이 멈추고 주변이 밝아지자 미소는 황망함으로 바뀐다. 마지막 장면에는 마고 혼자 놀이기구를 탄다. 왈츠를 함께 추려고 상대의 손을 잡았지만 왈츠곡이 끝나면 다시 재투성이 부엌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마고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마고의 용기를 질투하는 걸까. 마고도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데 한 표를 거는 거 보면.

 

*영화 데이터 베이스가 부활했다. 언제 했지? 아무튼 좋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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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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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열혈독자로서 이 에세이는 의미가 깊다. 역시 위화는 이야기 꾼이다. 시류를 다룬 에세이지만 작은 에피소드에서 시작해서 거시적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력까지 두루 갖춘 위대한 작가다. 작은 에피소드들을 톻해 위화의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준 긍정의 힘과 해학에 대륙적 기질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위화의 철학이 일등공신이다.

 

위화는 문화대혁명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어제의 친절한 이웃들이 오늘은 모두의 적이 되어 타도 대상이 되고 죽기도 한다. 한 나라의 역사는 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 반추할 수 있기에 위화의 이웃들 이야기는 중국 근대사를 이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아준다. 위화의 허구 속 인물들은 유독 많이 죽고 초기 작은 아주 어두운데 그 열쇠가 위화의 유년기에 있었다. 한 개인의 경험을 살을 붙여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내는 데 위화의 위대함이 있다. 어린 위화가 본 문화대혁명은 이념적 혁명 이전에 개인에 대한 억압과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한다. "마오의 말씀"은 기존의 사실도 뒤집을 수 있는 위력을 지녔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세뇌당한다.

 

읽으면서 문화대혁명기는 그저 남의 나라일 같지 않은 게 나 역시 군부독재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다. 극장에서도 애국가가 울리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손을 가슴에 올리는 의식을 따라야했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가다가도 국기 게양식 시간에 걸리면 걸음을 멈추가 태극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려야했다. 그 시간은 어린 내게는 아주 지루한 시간이었고 영문도 모른 채 애국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국민교육헌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하는 걸 담임 선생님한테 확인받아야했고 애국가 사절을 모두 외어서 쓰는 시험을 봐야했다. 이런 일들이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일로 영문 모르는 일이 참 많았다. 어느 날은 갑자기 모두가 학교에서 우유급식을 해야했고(지금 보면 우유가 남아서) 또 어느 날은 도시락에 보리를 섞었나 검사를 하기도 했다(쌀이 부족한 해였다). 또 어느 날은 단팥빵(내가 싫어하는) 급식을 먹어야했다. 어린 내게는 이런 일들이 귀찮고 왜 먹기 싫은 걸 먹어야하나 였지만 한국 현대사 속에 문화대혁명을 능가하는 억압의 시기가 존재했다.

 

위화는 내 유년의 기억을 소환할 뿐 아니라 현재 현재 한국 상황까지도 돌아보게 한다. 속도전이나 모방에 대한 욕망이 국경을 초월해 일어나고 있는 전지구적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대동소이한 탓이기도 하다. 후반부에는 중국의 현재 사회상을 위화식으로 말하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당이 이끈 지난 6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의 풀뿌리 계층에 거대한 기회를 두 차례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은 정치권력의 새로운 분배라고 할 수 있고, 개혁 개방은 바로 경제권력의 재분배였던 셈이다."(287)

 

의미심장한 말인데 한국으로 치면 군부독재가 끝나면서 문민정부로 접어들고 시장은 자유주의로 넘어가면서 정신적 가치가 존재를 상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형제>에 보면 고물장수가 거부로 거듭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부의 축적에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윤리가 생성된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사회로 역행했지만 이를 퇴행이라고 보는 이는 웃음거리가 된다. 모든 비극은 이 가치 변화에서 파생되지만 그 누구도 가치를 바로 잡는 일에 선뜻 앞장서려하지 않고 일반적 가치에 뒤처질까봐 전전긍긍한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한때 유행했지만 진정한 사유의 깊이까지도 유행했는지는 의문이다. 어떠 사상도 한국에 들어오면 소비 형태로 들어와 우르르 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뭐든 우리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잡식성 취향으로 무장한 참 놀라운 민족성을 지녔다.

 

어찌보면 행복은 마음 속에나 카르페디엠 같은 말은 실은 분명히 존재하는 계급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들의 상술일 수도 있다. 발화를 막는 것 자체가 통제며 억압인데 문명이 발달하다 보니 교묘하게 통제를 한다. 행복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그럴 듯한 말은 모든 구조적 문제를 내 탓이오, 하는 종교적 색채를 담고 있다. 행복은 마음 속에 있는 게 아니며 현재를 즐기려면 미래가 불안하지 않는 사회적 구조가 필요한데 이런 담론 조차도 원천봉쇄하는 대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살 수 있는 게 계급평등이라고 주장하는 광고 홍수 속에서 우리는 최면이 걸린 채 살아간다. 열심히 영혼을 파는 노동의 대가로 카드값을 지불한다. 유한한 휴가를 떠났다 돌아오면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데도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채 휴가를 떠났다 돌아와서 현실에 더 낙담하곤한다. 요즘은 휴가를 즐기는 것도 피곤하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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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 이병헌이 나온다. <지아이조>도 극장가서 볼 정도의 팬심을 지닌 나다. 개봉 전부터 몹시 기다린 영화다. 그도 늙는다. 부질없이 젊어지려고 하지 말고 곱게 늙는데 주력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피부가 늘어져서 주름지고 눈의 총기가 사라져도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다 볼 수 있을 거 같다.

 

1-2. 류승룡도 나온다. 한국영화도 배우의 흐름이 있는 거 같다. 한떄 송강호 만한 조연급이 없어 보였는데 요즘은 송강호가 뭘 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다. 바야흐로 명품 조연 춘추전국시대다. 류승룡을 처음 눈에 들어오게 한 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개인의 취향>이란 말도 안 되는 판타지에서 동성애자로 그윽한 눈길을 이민호한테 쏘아대던 때부터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영화 상영 전 광고에서도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크린에서 오래 볼 수 있길.

 

1-3. 김인권도 있다. 김인권을 보면 인간 승리, 혹은 시대를 잘 타고난 거 같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배우라기에는 안타까운 비주얼이지만 그만의 색깔로 영화마다 김인권이 아니면 누가할까, 싶은 역을 한다. 영화 전체 중 가장 멋진 대사를 한다. 왕이 중전한테 바칠 시를 지어 읽어주고 난 후 어떠냐, 고 묻자 "궁의 법도에 맞습니다"한다. 여기서 빵터져서 주위 사람들한테 민망했다. 도부장의 정신세계를 다 말해 주는 함축된 단 한 마디. 정말 훌륭한 대사다.

 

2.

2-1. 영화란 매체는 내게 모든 지적 호기심의 원천이다. 서양사를 찾아 읽고 십자군 전쟁사를 자발적으로 공부하게 만드는 샘이다. 서양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전공도 있지만 시대극 탓도 크다. 그에 비하면 한국사, 특히 중세나 근대사에 대한 무지는 한국영화가 그 시기를 다루고 있지 않아서 호기심이 자극을 받을 기회가 없기도 한 탓이다. 이 영화는 광해군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급 광해군 이쪽 저쪽 시기가 궁금해진다. 추석 연휴에 책 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2-2. 역사 소설이나 역사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의 어떤 허점이나 한 부분을 확대 과장해서 기승전결을 꾸며내는, 상상력이 극도로 필요한 작업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원안자한테 존경심이 일었다. 허구긴해도 미시사적 측면에서는 꽤 있음직한 일을 시각화했다. 오프닝에서 왕이 아침에 일어나 곤룡포를 입는 장면을 아주 애로틱하게(나만 이렇게 느꼈나?) 묘사했다. 특히 손톱 손질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주로 주체가 여자들인 장면에서 주체가 남자로 치환돼서 일어나니 낯설면서도 애로틱하다는 생각이. 그 밖에 왕의 일상을 화면에 옮겼는데 어디까지가 고증을 거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시대 왕의 일상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기도 했다.

 

3.

3-1. 내용적인 면에서 정치적이고 교훈적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를 연상할 수 밖에 없는 플롯으로 더 이전에 <왕자와 거지>도 있어서 새롭진 않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고 했다. 익숙한 모티브를 새롭게 배치하는 일이 훌륭한 감독들이 하는 일이다. 좀 클리쉐한 부분이 있긴하지만 배우들의 개인기와 촬영술, 미시사적 관점 등이 풍부한 볼거리를 준다.

 

3-2. 후반부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란 영화를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에 나갔던 마르탱 게르가 8년 만에 돌아와 마을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데 가짜 의혹이 불거진다. 마을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기 위해 재판을 하고 최종 결정은 그의 아내한테 맡겨진다. 마르탱은 가짜였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진짜라고 말한다. 가짜 마르탱은 그녀가 바라는 남편상이었기 때문이다. 가짜와 진짜는, 그러니까, 전적으로 인간의 주관에 달려있다. 마음에 안 들면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다. 광해군도 주색을 탐했다고 알려져왔는데 마음에 안 들지만 왕이다. 보름 간 인간미 넘치고 반듯한 세계관을 지닌 가짜가 대역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임금상을 본다. 카게무샤처럼 저잣거리 광대가 점점 임금을 닮아간다. 결국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가지만 대신들과 중전은 또 하나의 임금을 마음 속에 담아두는 의리를 지니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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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2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병헌이 확실히 연기를 좀 하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과 하선, 그리고 왕이 되었으나 왕이 된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선, 그리고 나중에 왕보다 더 왕 같아지는 하선이라는 4가지의 연기를 해야했음에도 그 4가지 모두 그럴듯 하더군요. 말씀하신대로 조연들의 연기도 좋았고...

여러모로 팩션으로서 즐길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에필로그 식의 후일담이나, 광해는 조선의 단 하나의 왕이다, 뭐 이런 식의 자막이었던가요..그건 심히 오바였지 싶습니다만..^^;

넙치 2012-09-21 01:1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가 이병헌의 연기를 아주 돋보이게 하진 않는 거 같아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전작들에서 깊이 감명받은 터라 이 영화에서 기대치가 좀 높았나봐요. ^^; 오히려 비중있는 조연들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없어도 좋을 마지막 자막 보면서 왜 그런 말을 넣었을까, 배경이 궁금해졌어요. 좀 과할 수 있단 걸 감독도 알았을텐데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봤다. 9월 극장가는 왜 이렇게 볼 게 없는지. 아트시네마도, 영상자료원도, 시간이 있어도 볼 영화가 없다.ㅜ.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된 배경은 이렇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

 

영화란 아니 모든 예술은 창작자의 철학이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분노가 깊이 배여있다. 사람이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김기덕 감독의 표현 방식은 좀 일방적이서 늘 불편하다. 공감을 통한 소통 보다는 인물들이 행하는 극단적 행동에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는 방법을 택한다. 무자비함이나 야수성을 대놓고 전면에 부각시킨다. 한 인물이 무자비해지거나 야수성을 지니는 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환경으로 등장한다. 자본가들이 주로 그 적들인데 자본가는 어쩌면 사회에서 공공의 적일 수 있지만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점에서는 날생선의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어제 피에타를 보면서,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냉철하게 그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에 올려도 될 듯한 다르덴 형제가 떠올랐다. 다르덴 형제 영화는 보고 나면 많은 생각거리를 주고 바르게 사는 게 어떤건가 고민케 한다. 다르덴 형제가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내가 감명받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마음에서 생각들이 싹을 틔운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을 다루는데도 피착취 계급한테 내 심장이 뛰어가질 않는다. 물론 나는 이런 점이 김기덕 감독의 의도와 관련있다고 믿는다. 감독은 어떤 공감이나 소통에 관심이 있어 담론을 형성하는 쪽보다는 고발자가 지닐 수 있는 입장을 지닌다. 고발자의 한이나 분노를 배출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계기로 김기덕 감독의 살아 온 과정이 회자되고 있다. 사실 얼마전 TV

에서 김기덕 감독이 검은 모자를 벗고 흰머리를 뒤로 빗어 묶고 심지어 웃기도 하는데 깜짝 놀랐다. 표정이 전과 달리 아주 온화해서 처음에는 몰라봤다. 그도 나이가 들면서 마음 속 분노가 좀 누그러진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영화를 보면서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제목이 피에타라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전반부에 좀 기대를 했는데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고아로 자라서 가족을 잃는 슬픔을 모르는 사채업자 종업원과 그 종업원한테 목숨을 잃은 엄마의 복수극. 엄마의 복수 방법은 슬픔과 고통을 모르는 이한테 슬픔과 고통을 알려주고 건물에서 몸을 던진다. 슬픔과 고통을 알게 된 남자 역시 죽음을 택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가 불쌍해 우는 가짜 엄마를 보면서 어쩌면 이번에는 김기덕 감독이 달라졌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난데 없이 몸을 던지는 장면을 보면서 김기덕 감독한테 세상은 여전히 증오스럽구나,하는 걸 읽었다.

 

개과천선해서 나도 살고 너도 변화시키는 긍정의 에너지 따위는, 딴 세계 일이다. 사람한테 희망을 품지 않는 삶을 사는 인물들을 보면 안스럽다. 그치만 딱 거기까지다. 보는 이한테 어떤 울림을 주며 내 삶도 한번 뱐화시켜 지금보다 선하고 긍정적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결심을 시키지 못한다. 얼마 전 <시스터>란 담담한 영화를 보면서 어른들이 좀도둑 아이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 나는 좀 바르게 살아봐야기 하고 결심한 바에 비하면, 김기덕 감독의 철학은 분명히 어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이 시너지로 나오지 않는다. 그게 나는 감독 탓이라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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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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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만에 발자크다.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에서 앙트완이 읽었던 책이 바로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이다. 제목이 왜 <나귀 가죽>인가 의아해 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근심chagrin의 가죽이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요것도 틀리지 않다. 발자크는 언어 유희로 유명한 소설가다. 사람 이름도 중의적 의미를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 소설 제목도 그렇다. chagrin이란 가죽의 기원을 인물들이 말하긴 하지만 원래 chagrin은 근심이란 뜻으로 널리 통용되는 말이다.

 

왜 근심 가죽인가. 일종의 부적인데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이루어주는 대신에 수명을 담보로 잡는다. 욕망이 실현되는 기쁨은 잠시, 가죽이 줄어들면 수명도 줄어드는 걸 시각적으로 알려준다. 우리는 한번 쯤 현재의 삶과 다르게 살기를 머릿속에서 상상한다. 머릿속에서 그려볼 때는 추상적이어서 그 어떤 갈망도 완벽해 보인다. 갈망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우리의 근심은 영원히 소멸할 것만 같다. 이 소설의 소재가 바로 여기에서 착안을 했다. 갈망을 실재화해 보는 것.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가 갖는 힘을 한 젊은이를 통해 본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두 가지 본능적인 행위에 의해 기력이 소진되지. 두 개의 말로 죽음의 그 두 이유를,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모두 표현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바람과 행함이라는 말이네.(......) 바람의 행위는 우리를 서서히 불태워 없애고 행함의 행위는 우리를 일거에 파괴시키지. 하지만 앎은 유약한 우리의 심신 구조를 항구적인 평온 상태로 유지시킨다네."(72)

 

소설 도입부에서 현자가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자가 아니므로 겪어보고 눈으로 보기 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 그래서 소설도 있고 소설같은 사건도 일어난다. 자살을 결심한 가난 한 젊은이가 어차피 죽음을 결심한 바에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번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여긴다. 부도 얻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과 사랑도 얻는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이를 만나자 더 살고 싶다는 새로운 바람이 극대화된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평온을 찾을 때 그의 수명을 암시하는 가죽이 점점 줄어든다. 사람은 변덕스러운 존재다. 처음에 목숨을 버리려했던 의지는 모두 잊고 이제, 그의 바람은 나귀 가죽이 수축하지 않게 사는 거다. 아무런 바람을 갖지 않으려 애쓰면서 어떤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그의 삶은 수도사의 삶과 닮아있다.

 

바로 도입부에서 밝힌 바람, 행함, 앎을 차례로 겪는 한 젊은이의 인생 여정을 보면서 내 머릿속도 복잡해진다. 바람이 없으니(요즘이 그렇다) 행함도 없다. 그러나 앎도 없다. 앎은 바람과 행함이 필요조건이 아닐까. 후회도 해 보고 탄식도 해 봐야 깨달음도 오는 게 아닐까. 시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 날이 눈으로 측정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는 다르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 젊은이처럼. 삶은 유한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유한의 개념은 추상이다. 추상적 유한은 곧 무한과 같아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추상을 구상화하는데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럼 내 삶을 어떻게 구상화 해 볼까, 하는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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