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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아주 오랫만에 발자크다.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에서 앙트완이 읽었던 책이 바로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이다. 제목이 왜 <나귀 가죽>인가 의아해 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근심chagrin의 가죽이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요것도 틀리지 않다. 발자크는 언어 유희로 유명한 소설가다. 사람 이름도 중의적 의미를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 소설 제목도 그렇다. chagrin이란 가죽의 기원을 인물들이 말하긴 하지만 원래 chagrin은 근심이란 뜻으로 널리 통용되는 말이다.
왜 근심 가죽인가. 일종의 부적인데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이루어주는 대신에 수명을 담보로 잡는다. 욕망이 실현되는 기쁨은 잠시, 가죽이 줄어들면 수명도 줄어드는 걸 시각적으로 알려준다. 우리는 한번 쯤 현재의 삶과 다르게 살기를 머릿속에서 상상한다. 머릿속에서 그려볼 때는 추상적이어서 그 어떤 갈망도 완벽해 보인다. 갈망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우리의 근심은 영원히 소멸할 것만 같다. 이 소설의 소재가 바로 여기에서 착안을 했다. 갈망을 실재화해 보는 것.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가 갖는 힘을 한 젊은이를 통해 본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두 가지 본능적인 행위에 의해 기력이 소진되지. 두 개의 말로 죽음의 그 두 이유를,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모두 표현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바람과 행함이라는 말이네.(......) 바람의 행위는 우리를 서서히 불태워 없애고 행함의 행위는 우리를 일거에 파괴시키지. 하지만 앎은 유약한 우리의 심신 구조를 항구적인 평온 상태로 유지시킨다네."(72)
소설 도입부에서 현자가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자가 아니므로 겪어보고 눈으로 보기 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 그래서 소설도 있고 소설같은 사건도 일어난다. 자살을 결심한 가난 한 젊은이가 어차피 죽음을 결심한 바에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번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여긴다. 부도 얻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과 사랑도 얻는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이를 만나자 더 살고 싶다는 새로운 바람이 극대화된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평온을 찾을 때 그의 수명을 암시하는 가죽이 점점 줄어든다. 사람은 변덕스러운 존재다. 처음에 목숨을 버리려했던 의지는 모두 잊고 이제, 그의 바람은 나귀 가죽이 수축하지 않게 사는 거다. 아무런 바람을 갖지 않으려 애쓰면서 어떤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그의 삶은 수도사의 삶과 닮아있다.
바로 도입부에서 밝힌 바람, 행함, 앎을 차례로 겪는 한 젊은이의 인생 여정을 보면서 내 머릿속도 복잡해진다. 바람이 없으니(요즘이 그렇다) 행함도 없다. 그러나 앎도 없다. 앎은 바람과 행함이 필요조건이 아닐까. 후회도 해 보고 탄식도 해 봐야 깨달음도 오는 게 아닐까. 시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 날이 눈으로 측정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는 다르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 젊은이처럼. 삶은 유한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유한의 개념은 추상이다. 추상적 유한은 곧 무한과 같아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추상을 구상화하는데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럼 내 삶을 어떻게 구상화 해 볼까, 하는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