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 이병헌이 나온다. <지아이조>도 극장가서 볼 정도의 팬심을 지닌 나다. 개봉 전부터 몹시 기다린 영화다. 그도 늙는다. 부질없이 젊어지려고 하지 말고 곱게 늙는데 주력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피부가 늘어져서 주름지고 눈의 총기가 사라져도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다 볼 수 있을 거 같다.

 

1-2. 류승룡도 나온다. 한국영화도 배우의 흐름이 있는 거 같다. 한떄 송강호 만한 조연급이 없어 보였는데 요즘은 송강호가 뭘 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다. 바야흐로 명품 조연 춘추전국시대다. 류승룡을 처음 눈에 들어오게 한 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개인의 취향>이란 말도 안 되는 판타지에서 동성애자로 그윽한 눈길을 이민호한테 쏘아대던 때부터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영화 상영 전 광고에서도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크린에서 오래 볼 수 있길.

 

1-3. 김인권도 있다. 김인권을 보면 인간 승리, 혹은 시대를 잘 타고난 거 같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배우라기에는 안타까운 비주얼이지만 그만의 색깔로 영화마다 김인권이 아니면 누가할까, 싶은 역을 한다. 영화 전체 중 가장 멋진 대사를 한다. 왕이 중전한테 바칠 시를 지어 읽어주고 난 후 어떠냐, 고 묻자 "궁의 법도에 맞습니다"한다. 여기서 빵터져서 주위 사람들한테 민망했다. 도부장의 정신세계를 다 말해 주는 함축된 단 한 마디. 정말 훌륭한 대사다.

 

2.

2-1. 영화란 매체는 내게 모든 지적 호기심의 원천이다. 서양사를 찾아 읽고 십자군 전쟁사를 자발적으로 공부하게 만드는 샘이다. 서양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전공도 있지만 시대극 탓도 크다. 그에 비하면 한국사, 특히 중세나 근대사에 대한 무지는 한국영화가 그 시기를 다루고 있지 않아서 호기심이 자극을 받을 기회가 없기도 한 탓이다. 이 영화는 광해군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급 광해군 이쪽 저쪽 시기가 궁금해진다. 추석 연휴에 책 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2-2. 역사 소설이나 역사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의 어떤 허점이나 한 부분을 확대 과장해서 기승전결을 꾸며내는, 상상력이 극도로 필요한 작업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원안자한테 존경심이 일었다. 허구긴해도 미시사적 측면에서는 꽤 있음직한 일을 시각화했다. 오프닝에서 왕이 아침에 일어나 곤룡포를 입는 장면을 아주 애로틱하게(나만 이렇게 느꼈나?) 묘사했다. 특히 손톱 손질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주로 주체가 여자들인 장면에서 주체가 남자로 치환돼서 일어나니 낯설면서도 애로틱하다는 생각이. 그 밖에 왕의 일상을 화면에 옮겼는데 어디까지가 고증을 거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시대 왕의 일상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기도 했다.

 

3.

3-1. 내용적인 면에서 정치적이고 교훈적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를 연상할 수 밖에 없는 플롯으로 더 이전에 <왕자와 거지>도 있어서 새롭진 않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고 했다. 익숙한 모티브를 새롭게 배치하는 일이 훌륭한 감독들이 하는 일이다. 좀 클리쉐한 부분이 있긴하지만 배우들의 개인기와 촬영술, 미시사적 관점 등이 풍부한 볼거리를 준다.

 

3-2. 후반부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란 영화를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에 나갔던 마르탱 게르가 8년 만에 돌아와 마을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데 가짜 의혹이 불거진다. 마을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기 위해 재판을 하고 최종 결정은 그의 아내한테 맡겨진다. 마르탱은 가짜였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진짜라고 말한다. 가짜 마르탱은 그녀가 바라는 남편상이었기 때문이다. 가짜와 진짜는, 그러니까, 전적으로 인간의 주관에 달려있다. 마음에 안 들면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다. 광해군도 주색을 탐했다고 알려져왔는데 마음에 안 들지만 왕이다. 보름 간 인간미 넘치고 반듯한 세계관을 지닌 가짜가 대역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임금상을 본다. 카게무샤처럼 저잣거리 광대가 점점 임금을 닮아간다. 결국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가지만 대신들과 중전은 또 하나의 임금을 마음 속에 담아두는 의리를 지니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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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2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병헌이 확실히 연기를 좀 하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과 하선, 그리고 왕이 되었으나 왕이 된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선, 그리고 나중에 왕보다 더 왕 같아지는 하선이라는 4가지의 연기를 해야했음에도 그 4가지 모두 그럴듯 하더군요. 말씀하신대로 조연들의 연기도 좋았고...

여러모로 팩션으로서 즐길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에필로그 식의 후일담이나, 광해는 조선의 단 하나의 왕이다, 뭐 이런 식의 자막이었던가요..그건 심히 오바였지 싶습니다만..^^;

넙치 2012-09-21 01:1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가 이병헌의 연기를 아주 돋보이게 하진 않는 거 같아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전작들에서 깊이 감명받은 터라 이 영화에서 기대치가 좀 높았나봐요. ^^; 오히려 비중있는 조연들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없어도 좋을 마지막 자막 보면서 왜 그런 말을 넣었을까, 배경이 궁금해졌어요. 좀 과할 수 있단 걸 감독도 알았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