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봤다. 9월 극장가는 왜 이렇게 볼 게 없는지. 아트시네마도, 영상자료원도, 시간이 있어도 볼 영화가 없다.ㅜ.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된 배경은 이렇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

 

영화란 아니 모든 예술은 창작자의 철학이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분노가 깊이 배여있다. 사람이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김기덕 감독의 표현 방식은 좀 일방적이서 늘 불편하다. 공감을 통한 소통 보다는 인물들이 행하는 극단적 행동에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는 방법을 택한다. 무자비함이나 야수성을 대놓고 전면에 부각시킨다. 한 인물이 무자비해지거나 야수성을 지니는 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환경으로 등장한다. 자본가들이 주로 그 적들인데 자본가는 어쩌면 사회에서 공공의 적일 수 있지만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점에서는 날생선의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어제 피에타를 보면서,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냉철하게 그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에 올려도 될 듯한 다르덴 형제가 떠올랐다. 다르덴 형제 영화는 보고 나면 많은 생각거리를 주고 바르게 사는 게 어떤건가 고민케 한다. 다르덴 형제가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내가 감명받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마음에서 생각들이 싹을 틔운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을 다루는데도 피착취 계급한테 내 심장이 뛰어가질 않는다. 물론 나는 이런 점이 김기덕 감독의 의도와 관련있다고 믿는다. 감독은 어떤 공감이나 소통에 관심이 있어 담론을 형성하는 쪽보다는 고발자가 지닐 수 있는 입장을 지닌다. 고발자의 한이나 분노를 배출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계기로 김기덕 감독의 살아 온 과정이 회자되고 있다. 사실 얼마전 TV

에서 김기덕 감독이 검은 모자를 벗고 흰머리를 뒤로 빗어 묶고 심지어 웃기도 하는데 깜짝 놀랐다. 표정이 전과 달리 아주 온화해서 처음에는 몰라봤다. 그도 나이가 들면서 마음 속 분노가 좀 누그러진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영화를 보면서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제목이 피에타라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전반부에 좀 기대를 했는데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고아로 자라서 가족을 잃는 슬픔을 모르는 사채업자 종업원과 그 종업원한테 목숨을 잃은 엄마의 복수극. 엄마의 복수 방법은 슬픔과 고통을 모르는 이한테 슬픔과 고통을 알려주고 건물에서 몸을 던진다. 슬픔과 고통을 알게 된 남자 역시 죽음을 택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가 불쌍해 우는 가짜 엄마를 보면서 어쩌면 이번에는 김기덕 감독이 달라졌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난데 없이 몸을 던지는 장면을 보면서 김기덕 감독한테 세상은 여전히 증오스럽구나,하는 걸 읽었다.

 

개과천선해서 나도 살고 너도 변화시키는 긍정의 에너지 따위는, 딴 세계 일이다. 사람한테 희망을 품지 않는 삶을 사는 인물들을 보면 안스럽다. 그치만 딱 거기까지다. 보는 이한테 어떤 울림을 주며 내 삶도 한번 뱐화시켜 지금보다 선하고 긍정적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결심을 시키지 못한다. 얼마 전 <시스터>란 담담한 영화를 보면서 어른들이 좀도둑 아이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 나는 좀 바르게 살아봐야기 하고 결심한 바에 비하면, 김기덕 감독의 철학은 분명히 어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이 시너지로 나오지 않는다. 그게 나는 감독 탓이라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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