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선호하는 장르 혹은 취향이란 게 있다. 영화는 감독의 취향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은 <다찌마와 리>의 정극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류승완 감독 영화를 아주 좋아라하진 않는다. 깊이가 좀 없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류승완 감독이 잘 하는 게 있다. 직설화법이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척'하지 않는 단순, 무식함 속에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인물들의 코믹함이, 늘 그의 영화를 보고 웃게 만드는 힘이었다. <베를린>은, 전작들과 달리 간접화법을 쓴다. 근데 어설퍼서 인물들이 각자 혼자서 비밀을 만들려고 애쓰는 거 처럼 보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 생각은 더더 심해져서 뭐야, 간단한 얘기를 왜 저렇게 해, 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난 류승완 감독이 자신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빨리 파악하고 <다찌마와 리>같은 영화로 복귀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2.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직설적인 인물은 동명수 역을 한 류승범. 류승범은 나이들면서 배우의 아우라가 물씬 풍긴다. 절대 악으로 등장해서 씨익 미소 지으면서 사람을 죽이는데 아주 카리스마 넘친다.ㅋ아쉬운 건 이 캐릭터가 <스카이폴>에서 실바(하비에르 바르뎀)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 마지막 시퀀스에서 외딴 집이 폭발하고 이성을 잃고 비틀거리며 총질을 해 대는 모습에서 나만 실바를 떠올린 건 아닐 터. 공교롭게 두 장면이 일치했다면 감독들의 정신세계에 교집합이 있는 듯도 하고. 아님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고전 영화에 있는 장면을 패러디했을 수도 있고.

 

3. 내 옴므파탈, 한석규님이 나오신다. 한석규님의 연기야 언제나 좋지만 이 영화에서 캐릭터는 좀 이해하기 힘들다. 어설픈 낭만주의자로 자신의 신념만을 위해 행동하는 고독한 요원인데 극의 흐름과 좀 섞이지 않는다. <베를린>은 각각의 인물들한테 동등한 비중을 주다보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베를린 보면, 인물을 다루는 솜씨는 최동훈 감독이 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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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0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이번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색깔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나름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감독인데 그 색깔이 흥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일까요?

저도 영화는 별로였지만, 한석규 씨는 저도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저는 한석규 씨가 욕할 때마다 그게 너무 좋아요. 영화보면서 한석규씨가 욕할 때마다 아이 찰져, 찰져,를 몇 번씩 반복..; (아..그렇다고 욕만 좋다는 건 아니고요.)

넙치 2013-02-09 17: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잘 하는 것과 잘 할 수 없지만 로망의 간극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일반인처럼.

하하. 한석규님의 욕에 반하다니..의외에요! 욕하는 사람한테 교정할 해 줄, 바른 생활할 거 같은 맥거핀님이.ㅋ
 

 

 

 

 

 

 

 

 

 

 

구성이 좀..당황스럽다. 어린 유치원생이 한 남자 선생님을 좋아하다 거절당한 마음을 거짓말로 표현한다. 어린 아이에 대한 성추행의 증거는 전적으로 아이의 진술. 아이들이 상상력이 풍부하긴 하지만 거짓말은 안 한다는 어른들의 강한 믿음을 기초로 영화가 전개된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스스로를 아직 보호할 수 없는 나이에 당한 폭력이나 학대는 형법과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 남자는 결백하다. 남자의 결백을 관객만이 안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모른다. 왜 하필 아동 성학대였을까. 아이의 말을 증거로 채택하는데 신중을 기해라, 하는 메시지같기도 하지만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나도 아이들은 거짓말 안 한다는 걸 믿는 어른이다.

 

위험한 이 기본 설정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좋다. 이 부분을 빼고 본다면, 한 집단에서 한 구성원을 고립시키는 게 얼마나 쉬우며 얼마나 잔인한지 밀도 깊고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묘사된다. 결속이 단단한 마을에서 죄를 짓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걸 고전소설이 많이 묘사하는데 그걸 이미지화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남자는 아주 성실하고 좋은 선생님인데 하루 아침에 친구와 가족의 의심을 받는다. 사람의 믿음은 마음 속에서 주입하는 면이 있다. 친구들은 남자의 성품을 한편으로 믿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이의 진술도 믿는다. 남자에 대한 믿음은 잠시 혼동을 거치고 불신으로 향해간다. 남자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모든 건 이제 남자를 자신들이 믿고 있는 틀 안에서 보기 시작한다. 식재료를사러 갔을 때 수퍼 상인들이 보여 준 적개심은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믿음에서 나온다. 수퍼도 출입금지니 뭘 먹고 사나.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났어도 사람들 마음에 자라고 있는 불신의 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일 년이란 시간이 흘러 암묵적으로 남자는 면죄부를 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가 사슴이 아니라 남자한테 총을 쏜다. 불신의 나무는 언제든 살아날 준비가 돼 있다는 걸 암시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남자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상흔은 쉽게 사라질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존 패트릭 샌리 감독,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수작 <다우트>가 내내 떠올랐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른다. 관객도 모르고 극중 인물들도 모르고. 다만 추정을 할 수 있는데 강한 의혹이나 의심도 믿음의 일종이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만이 의심도 키울 수 있는 거 같다. 지나친 의심은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확고한 믿음도 영혼을 잠식할 수 있다. 신념과 믿음의 차이는 뭘까. 소신있기도 힘드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감탄스럽다. 아주 확고한 신념으로 어린 수녀를 마녀사냥했던 원장 수녀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I dout를 외친다. 믿음이나 신념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가치있는 게 아닐까...뭐 이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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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0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관객을 좀 괴롭히는 영화로군요. 무고한 자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롭고, 또 한편으로 나도 언젠가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에 괴롭고...좀 다른 얘긴데, 저는 사실 애들이 거짓말을, 그것도 상당히 큰 거짓말을 가끔 한다고 믿습니다..;

넙치 2013-02-05 19:41   좋아요 0 | URL
집단적 통념의 생성과 진화, 그리고 확산을 유심히 봤는데 저도 진화과 확산에기여한 적이 있겠죠..ㅜ.ㅜ 이 영화가 성찰을 막는 이유가 꼬맹이가 엄청난 말을 한다는 데 있어서 이 꼬맹이 심리분석하는데 영화 보는 시간을 다 바친 거 같아요.;;;

음, 저는 애들은 사소한 거짓말은 해도 큰 거짓말은 안 하는데,하는 편견을 갖고 있어요.
 

 

 

 

 

 

 

 

 

 

1. 나처럼 <벌이 날다>로 민병훈 감독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는 다른 이가 만든 영화같다. 극한 인내심을 요구했던 롱테이크에 대한 애정이 이번에는 롱테이크의 대척점에 있을 수 있는 핸드핼드다. <벌이 날다>에서 탈내러티브를 지향했다면 <터치>에서는 지나친 내러티브로 전향(?)이다. 동식(유준상) 수원(김지영)은 부부란 관계를 형성하지만 두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한 동력으로만 작용을 하한다. 두 인물은 각각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끌고 나간다. 일반적으로 극이 주인공이 주인공 주변 인물들한테 행동하는 작인을 찾는 거에 비하면 굉장히 독특하다.

 

2. 어찌보면 두 인물 이야기다. 아주 현실적인 동식과 판타지적인 수원.

2-1. 동식은 알코올 중독자다. 한 때 아시안 게임에 사격 대표선수 출전했었지만 현재는 고등학교 사격 코치다. 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아마도 술에 의존하게 되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영화는 동식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결심과 번복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사회 생활이란 게 어디에나 술 한 잔의 유혹이 있다. 술을 끊기로 결심한 동식한테 술 한 잔은 엄청난 내적 갈등의 요소다. 처음에 몇 번 거절하다 결국에는 이성을 버리고 술한테 달려들면 술을 그의 영혼을 잠식하다. 다음 날 술이 깨면 일어났던 일들은 지옥과 같은 일이다. 음주 운전으로 마지막 시퀀스에서 사람인지 노루(?)인지를 치는 장면에서 나는 절망스럼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가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동식이 술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을 지, 동식을 믿지 못하게 된다.

 

동식이 왜 극도로 현실적 인물인가 하면, 우리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탓이다. 자신의 잘못과 나쁜 습관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주변인이 내 잘못을 지적할 때면 멋적게 분노하거나 아니라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동식이 그런 것처럼. 사람은 감정적 유기체라 이성이 기거하고 있는 동안은 정말 그렇지만 이성은 종종 변덕을 부리고 유기체 밖으로 이탈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다짐하고 다시 실수를 반복하는 주기로 생을 채운다. 동식을 보면서 내 모습 한 부분을 보는 느낌.ㅜ.ㅜ

 

2-2. 수원. 수원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도덕적 죄를 서슴없이 범하지만 사회 부조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하다. 냉담한 사회적 시선 속에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한 모자의 삶을 우연히 목격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격 후 잊으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수원은 모자의 삶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의 비정함은 수원을 허둥대며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지독하게 잘 묘사된다. 집, 병원이란 닫히 공간, 수원이 사는 동네는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나 있다. 수원은 영화 대부분을 닫힌 공간에서 혼자 헤맨다. 때는 여름이라 땀으로 젖은 머리칼, 목덜미와 수원을 불안하게 뒤따르는 핸드핼드는 수원의 고립을 가중시킨다. 세상과의 유일한 끈이 핸드폰인데 극한 상황에서 수원이 찾는 이는 사제다. 사제한테 수원이 퍼붓는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감독은 끝까지 종교를 부정하진 않는다.

 

3. 두 사람을 통해 나는 구원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구원이란 과연 있나? 구원의 의미란? 영화는 다행히 일말의 희망을 남기면서 끝난다. 하지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신은 절대로 구원을 행할 수 없다.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지만 신이란 존재는 내 마음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한다.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 나는 신의 뜻이라고 체념하고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빨리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처럼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는 신을 찾는 건 어리석다. 실체 없는 관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물질계를 살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구원은, 그러니까, 어떤 때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다리가 썩어가서 혼자 죽어가는 이의 고통을 중단시키는 일도 신의 이름을 빌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수원과 동식은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발버둥치는 실존적 인물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게 편하지 않다. 수원과 동식의 삶을 통해 내가 나를 구원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고 구원을 위해 고군분투해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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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는 미국영화답긴 하지만 독립영화 답게 진짜 감정을 어루만지는 면도 있다. 그래서 눈물을 좀 흘렸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만 감성을 건드려도, 주책맞게 눈물이 난다.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하면 간단하다. 소아마비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의 섹스 라이프와 사랑이다. 감독도 소아마비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반인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섬세한 부분을 잡아낸다. 가령, 쇼핑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전신이 마비돼서 누워서 세상을 보는 남자한테 옷쇼핑이란 어떤 기분일까. 카메라는 남자의 눈높이에서 옷을 바라보고 관객은 남자와 같은 각도로 옷을 바라보게 된다. 카메라의 각도가 남자의 눈높이에 있기 때문에 늘 누워서 일정한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체험을 하게 된다. 두 시간 동안 일어나는 불편함을 기꺼이 즐기지만 평생이라면, 생각하기도 싫다,는 유아기적 상상으로 결론을 맺는다.

 

2. 이 영화를 보고 그저그런 미국영화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감독이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캐릭터 모두 자신만의 고유 위치가 있다. 실재 속의 우리가 그런 것처럼. 현실 속의 우리는 아주 정해진 틀 안에서 생활하고 사고 한다. 다만 우리 모두 정해진 틀을 가졌다고 인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할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 자신만의 영역이 있고 감정을 가진다. 대표적으로 섹스 테라피스트이다. 이런 직업이 있는 지 영화를 보고 알았고 별 직업이 다 있네, 하는 일차원적으로 반응이 먼저 나온다. 직업 세계 탐구가 아니니 이색 직업에 대한 호기심은 좀 접어두자. 이 테라피스트는 장애우들의 성생활을 활성화는데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 그래서 제목이 세션이다. 세션마다의 기록이라고 하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은 정이 들게 마련이다. 우리는 미운 정, 고운 정하는 말을 사용한다. 두 사람은 고운 정이 든다. 원만한 가정이 있는 한 여자가 일 때문에 만나 흔들리는 과정을, 정말 직업적 단정함을 가지고 담아낸다. 사람의 감정은 재단할 수 없기에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사람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이란 연구가 있어도 대부분은 제도권이 인정하는 이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래서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착각한다.

 

많은 영화들이,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한 눈에 반한 사랑을 다룬다. 비운 밥 그릇 수가 좀 많아지면 한 눈에 반한 사랑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란 걸 알아버린다. 이 영화는 한 눈에 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오늘 저녁 같은 가랑비에도 우산을 안 쓰고 오래 맞으면 옷도 젖고 신발도 젖는다. 시인인 남자를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남자의 육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정신세계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수다스럽고 혈기왕성하다. 그의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말은 그를 매력에 조금씩 빠져든다. 그리하여 그는 생전에 세 여인의 사랑을 받았다.

 

3.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남자의 욕정을 곁에서 중계방송 듣는 이가 있으니, 교회 신부다. 신부는 남자의 정신적 갈등을 고해성사라는 이름으로 듣게 된다. 교회의 상징인 신부는 등장은 사랑의 정의를 에둘러말한다. 즉 사랑의 완성은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걸. 이건 감독이나 이 책을 쓴 마크 오브라이언이란 사람의 개인적 믿음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4. 1월에 두 번째 본 영화인데 영화를 보니, 삶이 좀 나아진 거 같은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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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기존 질서에 저항할 수 있나, 하면 없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답이 없는 암담한 환경에 내던져진 철 없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17세에 아들을 낳고 가출했다가 아들이 자신의 나이쯤 되었을 때 만난다. 아들, 지구는 소년원을 들락날락한다. 아들을 출산하고 재회한 경로가, 일반적 사회적 기준과는 다르다. 엄마는 삼십대 초반이고 완전한 성인이 돼있어야하지만 정신적 트라우마 탓인지 불안하고 아들의 눈높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는 느닷없이 세상과 만났고 엄마도 느닷없이 만났다. 아들의 눈에 엄마는 다른 어른한테 굽실거리는 약자로 보인다. 엄마가 척박한 세상을 견디는 방식은 거짓 웃음과 거짓말이다. 외부 세계에서 엄마는 아들을 보호할 힘 따위는 전혀 없다. 얹혀 사는 동생한테는 수족이 돼 주어야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서 하룻밤 잘 곳을 찾느라 친구들한테 전화를 할 때는 뻔뻔하고 씩씩해야 한다. 김밥을 한 입 가득 물고 목이 메이지만 가슴을 쳐가며 밝은 소리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한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한다. 신세한탄을 할 법도 한데 엄마는 그런 건 방법이 아니라는 걸 이미 터득한 것 같다. 텅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남의 지갑에 손을 대는 배짱(?)도 있다.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엄마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게 아니니까. 아들도 그럴 것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독립영화들이 한없이 어두운 톤을 가진데 비하면 이 영화는 긍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물들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 때문이다. 이 긍정적 방식이 몹시 좋으면서도 영화란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모순된 생각이 든다. 감독은 제도를 겨냥해서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그래서 영화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어쩔 수 없지, 하면서도.

 

두 모자의 모험같은 일상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면 영화에서 비추는 세상의 시선은 냉혹해서 아주 현실적이다. 타인의 일에 약간의 동정과 대부분의 무감으로 두 모자 관계를 정의해버린다.아들은 특수절도, 폭행 등등으로 소년원 출신이고 엄마는 아들을 버렸다. 이 말은 사실을 기술하지만 그 사이 함축된 개인사를 몰살시킨다. 판사, 형사의 일이란 게 개인의 역사를 제거하고 타자화의 앞잡이처럼 보인다. 뭐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이 대책없는 모자는 계속 살아갈 텐데 주변의 도움이나 동정이 없이 그대로 거친 세상의 폭력적 시선과 언어에 부딪칠 것이다. 마음이 쓰이지만 주변의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나마 잠깐이고 한줄로 그들을 정의하는 일을 거침없이 할 테지. 그래도 가끔 이런 영화를 보면서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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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2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라는 영화를 좋게 봐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영화라 챙겨 봐야지, 싶었는데 놓치고, 일단 글로 먼저 감상합니다. 영화라는 것의 힘이, 그 한줄로 정의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이 영화처럼 무엇인가가, 적어도 2시간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겠죠? 다시 한 번 챙겨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넙치 2013-01-22 22:10   좋아요 0 | URL
<사과>는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못 본 영화에요. 이 영화도 놓쳤었는데 지난 토욜에 아트시네마에서 작가와의 대화시간인가 하는 프로그램 덕에 운 좋겠 봤습니다. 메이킹 스토리를 들으면서..감독들은 참, 따뜻한 시선을 가진 영혼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본 후 맥거핀님은 어떤 메스를 사용할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