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기존 질서에 저항할 수 있나, 하면 없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답이 없는 암담한 환경에 내던져진 철 없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17세에 아들을 낳고 가출했다가 아들이 자신의 나이쯤 되었을 때 만난다. 아들, 지구는 소년원을 들락날락한다. 아들을 출산하고 재회한 경로가, 일반적 사회적 기준과는 다르다. 엄마는 삼십대 초반이고 완전한 성인이 돼있어야하지만 정신적 트라우마 탓인지 불안하고 아들의 눈높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는 느닷없이 세상과 만났고 엄마도 느닷없이 만났다. 아들의 눈에 엄마는 다른 어른한테 굽실거리는 약자로 보인다. 엄마가 척박한 세상을 견디는 방식은 거짓 웃음과 거짓말이다. 외부 세계에서 엄마는 아들을 보호할 힘 따위는 전혀 없다. 얹혀 사는 동생한테는 수족이 돼 주어야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서 하룻밤 잘 곳을 찾느라 친구들한테 전화를 할 때는 뻔뻔하고 씩씩해야 한다. 김밥을 한 입 가득 물고 목이 메이지만 가슴을 쳐가며 밝은 소리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한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한다. 신세한탄을 할 법도 한데 엄마는 그런 건 방법이 아니라는 걸 이미 터득한 것 같다. 텅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남의 지갑에 손을 대는 배짱(?)도 있다.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엄마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게 아니니까. 아들도 그럴 것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독립영화들이 한없이 어두운 톤을 가진데 비하면 이 영화는 긍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물들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 때문이다. 이 긍정적 방식이 몹시 좋으면서도 영화란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모순된 생각이 든다. 감독은 제도를 겨냥해서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그래서 영화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어쩔 수 없지, 하면서도.
두 모자의 모험같은 일상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면 영화에서 비추는 세상의 시선은 냉혹해서 아주 현실적이다. 타인의 일에 약간의 동정과 대부분의 무감으로 두 모자 관계를 정의해버린다.아들은 특수절도, 폭행 등등으로 소년원 출신이고 엄마는 아들을 버렸다. 이 말은 사실을 기술하지만 그 사이 함축된 개인사를 몰살시킨다. 판사, 형사의 일이란 게 개인의 역사를 제거하고 타자화의 앞잡이처럼 보인다. 뭐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이 대책없는 모자는 계속 살아갈 텐데 주변의 도움이나 동정이 없이 그대로 거친 세상의 폭력적 시선과 언어에 부딪칠 것이다. 마음이 쓰이지만 주변의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나마 잠깐이고 한줄로 그들을 정의하는 일을 거침없이 할 테지. 그래도 가끔 이런 영화를 보면서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