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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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로 줄리언 반스를 알았는데 꽤 흡족했던 기억이 있다. 줄거리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결말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사유에 매력적이었다. 이 소설은 마지막에 헉, 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하지만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다. 육십이 넘은 "평균적 삶"을 살아 온 한 남자가 십대와 청년기를 회상하는 연대기적 플롯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역사를 반추하는데 청년기의 치기를 미화하며 살다가 어떤 계기로 과거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가는 과정이 중요한 소설이다. 긴장감을 위해 스릴러 형식을 취했는데 좀 지루한 면도 있다. 반즈의 역사에 관한 입장은 이렇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

 

대학시절 자살한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화자는 그 친구의 당시 심경이 궁금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친구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추론과 억측으로 회자되고 시간과 함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사십 년이 흘러 친구의 죽음을 다시 소환하게 된다. 친구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건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궤적에 부여한 주관적으로 해석을 전복하고 객관성을 부여해 볼 것을 안내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가.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165)

 

말화는 이는 발화자인 동시에 청자란 말씀. 발화된 이야기는 더 이상 현재가 아니고 과거가 돼 버리는 속성이 있다. 실재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윤색을 통해 이미 더 이상 실재가 아닌 에피소드를 듣는 셈이다. 나는 어떤 윤색을 해서 내 삶을 허구화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이의 삶은 실재하며 또 한편으로는 허구다. 살아가는 것은 실제지만 어떻게 살아가는 지 말하는 건 일종의 허구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과거가 허구인 걸 깨달았을 때 우리가 취할 자세는? 소설 속 화자는 늙그막해서 그런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주변과의 화해를 권한다. 내가 반스 나이쯤 되었을 때 과거를 바로 알고 주변과 화해할 깜냥이 될 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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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수 많은 웨스턴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다. 내가 왜 장르영화를 봐야하는 고찰 없이 주말 밤이면 흘러나오는 TV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거칠고 고독한 영웅의 우수에 가끔 감동을 받기도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웨스턴 영화들의 존재 이유가 미국의 건국신화 정당화를 위한 장황한 변주란 걸 알았고 웨스턴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으로 바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녹아있긴 하지만 자유의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웨스턴 장르에 대한 애정따위는 특별히 길러지지 않았다. 영화 관람을 선택할 때 장르보다는 여러 가지 요인 중 하나가 맞으면 극장행을 선택한다. 그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가 영화를 누가 만들었나다. 쿠에틴 타란티노 팬은 아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와 웨스턴 무비의 조합은 좀 궁금했다.

 

역시 기발하다. 서사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통 웨스턴이 아니라 퓨전 웨스턴이다. 가장 인상적인 요소 중 하나가 음악의 사용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컨트리 음악이나 포크가 흐르는게 아니라 빠른 비트의 트랜디한 음악이 사용되서 시대를 초월하는 느낌이 든다. 뭐 물론 감독의 의도겠지만 고전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시대극에서 모티브만 얻어 오락성을 가미한 재창조다. 남북전쟁 전 시점을 택한 것도 아주 영리하다. 인종주의 집단 KKK단이 등장한다. 이들이 흑인을 공격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을 앞두고 머리에 쓴 하얀 두건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인다고 벌어지는 토론 에피소드는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인종주의와 노예제도를 소재로 쓰지만 감독은 거창하게 비판 혹은 고찰 영역으로 끌고갈 생각이 없다. 현상금 사냥꾼 닥터 슐츠의 입을 빌어서 감독이 인간에 대해 갖는 근본적 태도를 밝힌다. 흑인을 하나의 상품으로 대하는 백인이나 백인 지명수배자를 죽여서 현상금을 노리는 거나 동급이라고.  닥터 슐츠가 장고를 자유인으로 만든 것은 장고의 상품가치 때문이지 노예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미국 전반을 지배하는 관념이 실용주의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용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출현은 당연하고 아메리칸 드림 역시 허울만 좋지 실은 모든 걸 개인한테 떠넘기는 자본가들의 비열한 전략이니까. 노예상인들이나 노예 중간 관리자들로 등장하는 비실한 백인들 모두 착취자면서 피착취자의 계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고 거기에 각 개인의 고유성이 더해져 악랄한 캐릭터가 돼 버린다.

 

그래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모든 것에 냉소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냉소가 긍정정 재생산이 아니라 자본가의 냄새가 짙게 나서 그 역시 자본가랑 한통속 같은 느낌이 난다. 자본가를 비웃지만 그 웃음 속에 결이 다른 자본가상을 우뚝 심어놓는다고 할까. 감독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하는 존재다. 모든 건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고(장고도 예외는 아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괜찮다. 법을 어기든 사람을 개처럼 죽이든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개인이 영웅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뭐든 상관없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보는 것 같아 종종 불편하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지나친 폭력성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장총의 위력을 모르겠지만 총알이 순식간에 날아가서 살에 박히면 피와 함께 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낭자함을 종종 볼 수 있다. 총과 직면한 인간은 혼이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살덩어리에 불과하게 묘사를 한다.

 

이 영화에서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건 시련을 극복하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서사 전략일 뿐이지 시대적 아픔에 대한 숙고와 회한 탓이 아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성찰적일 필요는 없지만 역사까지도 자본에 봉사시키는 느낌이랄까. 말은 이렇게하지만 나란 관객은 이기적이어서 티켓값과 투자한 시간의 총합을 계산하며 경제효용을 따지면서 극장을 나왔다. 꽤 긴 런닝 타임인데도 안 지루하고 재밌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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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한 지 십 분이 지나서야 상영관에 들어갔다. 극장에 도착하기 전에 도입부를 놓칠 바에야 예매한 영화를 포기할까, 심하게 갈등하다 결국 놓친 십 분 안에 중요한 장면이 없길 바라다가 최면을 걸었다. 별 장면 없을 거라고. 십 분 놓친 거에 비하면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믿고 싶다).

 

먼저 영화는 너무 좋다. 집이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으스스하면서도 이미지는 너무 아름다워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디아를 매번 다른 각도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현란함, 집 내부는 화려한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톤이 다운되어있어서 서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인물들의 애증의 시선은, 저들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부풀린다. 전반적으로는 몽환적이다. 인디아가 질풍노도의 마음을 숨기려다 참고 참았던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실제인지 아니면 상상인지 관객 마음에 달려있도록 소소한 장치들을 한다. 어떤 이야기가 좋은 텍스트로 남아있으려면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열린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열린 텍스트의 여지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너무 의도되고 계산된 게 눈에 보이는 게 문제. 미장센을 상징적으로 마구 구성하는데 나는, 좀 글쎄올시다.

 

영화는 금지된 욕망에 관한 눈뜸이다. 인디아의 심리는 아빠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아빠와 사냥을 즐기던 인디아는 욕망의 억압을 배운다. 사냥 중 인디아가 배운 건 표적을 쏘는 게 아니라 표적을 쏘기 위해 다섯 시간도 기다려하는 인내다. 나뭇잎까지도 셀 수 있는 오랜 시간 동안 매복을 해야한다. 아빠의 죽음 후, 인디아의 가치관에는 혼란이 온다. 욕망을 억압하라고 가르쳤던 아빠 자리를 삼촌이 대신한다. 삼촌은 아빠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싫은 사람, 싫은 건 거침없이 제거하며 자신이 원하는 건 얻고야 마는 어른을 대표한다. 악은 선보다 달콤하고 매혹적이어서 습득하기 더 쉽다. 인디아는 18년 동안 따랐던 규칙을 서서히 버리고 삼촌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금기된 사랑(형수와 시동생)을 혐오하면서도 금기된 사랑(삼촌에 대한 사랑)에 충동을 걷잡을 수 없다. 그 절정은 삼촌과 나란히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다. 굉장히 에로틱하다. 피아노 건반 두드림이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인디아는 금기된 쾌락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불현듯, 삼촌이 피아노를 멈추면, 신기루처럼 모든 게 꿈이 아니었나, 싶게 처리된다. 마치 인디아의 욕망만 다 들킨 거 같은 황망함만이 피아노 의자 위에 남는다.

 

삼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삼촌의 살인 동기는 대체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삼촌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따를 후계자로 조카 인디아를 지목한다. 인디아의 살인 본능 역시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하실 냉동고에 있는 시체 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나중에 고모할머니 시체를 보고도 태연히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실수로 삼촌을 죽이고는 결국 자기 손으로 신발을 바꿔 신는다. 늘 스니커즈만 신고 다니던 인디아한테 삼촌이 신기고 싶어했던 하이힐이었다. 삼촌의 도움없이도 인디아는, 이제 힐을 신고 비틀거리지 않고 욕망을 드러내는 법을 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필요 이상으로 모호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시나리오가 원래 그런지 박찬욱 감독이 그런 식으로 연출했는 지, 모르겠지만 분석하기에는 신이 나는 영화지만 규격이 다 같은 최상품의 기성품같다고나 할까. 좋은 영화지만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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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는 기시감으로 가득한 영화다. <무간도>, <디파티드>, <대부>, <본 시리즈>뿐 아니라 조폭을 다룬 한국영화들 여러 편이 저절로 연상된다. 그러나 창작은 원래 모방이다. 선험적인 것들에 알게 모르게 빚을 진다. 좋은 작품은 익숙하지만 창작자의 반짝이는 창의성이 전해져서 보는 이한테 전혀 다른 작품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익숙한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적 설정에 배우들의 개성까지 더해져 <대부>, <무간도> 반열에 올리고 싶다. 어제 밤에 보고 들어와서 여운이 강해 한번 더 봐야겠다. 마지막 장면이 <대부2>를 상기시키는데 속편이 나온다면 좋겠다, 싶었다. 이야기는 부실하고 시각적 화려함에만 집중한 일차원적 <베를린>과 비교하면 이 영화는 얼마나 명작인지.

 

 

2. 이 영화가 관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좀 보자. 조폭 조직 세계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로 싸우는 장면은 몇 번 없다. 액션씬이 생각보다 없는 편으로 시각에 의존하는 원초적 진행을 차단한다. 그런데도 잔인하다고 느끼게 된다. 혈투 장면을 생략하고 칼 맞은 후 피가 뒤범벅 된  얼굴이나 피가 흥건한 바닥을 주로 보여준다. 지루한 싸움씬 대신 생략으로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상상하게끔 이끈다. 이중구, 장이사가 죽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죽기 전과 죽은 후를 보여준다. 사이에 물론 집단 구타가 있는 건 모조리 생략했다. 조직원들은 쇠몽둥이를 들고 있고 장이사는 얼굴이 피범벅이으로 앞으로 고꾸라진다. 사운드 트랙도 자제하는 편인데 싸움이나 일이 일어나기 전 전조로 까는 음악이  관객한테 긴장감에 대처할 준비 시간을 주면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약간 흘리는데 이 영화에서 사건은,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쿵 하고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늦출 수 없다. 카메라 앵글은 좀 고전적이다. 어찌보면 좀 단조로울수도 있지만 화려한 앵글 좋아하는 요즘 한국영화들 속에 있으니까 고전적인게 오히려 돋보인다. 인물 클로즈업을 사극처럼 빈번하게 사용하지만 정면이나 옆면에서 잡는 게 아니라 비스듬한 로우나 하이 앵글을 주로 사용해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면이 있어서 눈길을 잡아끈다. 

 

 3. 좋은 배우들이 있다. 황정민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 하고 탄성이 나온다. 껄렁거리며 품격이라곤 없는 생 양아치 느낌. 영화 내내 황정민은 원래 저런 사람일 거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소름돋게 연기 잘 하신다. 이중구로 나온 박성웅도 아주 강렬한 인상이시다. 눈빛에 살짝 광기도 있고 야비한 미소도 종종 지어주신다. 또 하나 반한 건 이정재의 곱상한 피부. 무슨 남자가 여자보다도 피부가 고운지.;;; 내적 갈등이 많고 카리스마를 지닌 캐릭터인데 살짝 후달리는 느낌은 있지만 피부가 고우니까 유약하면서도 무언가 지닌 순정만화형 인물로 무마.ㅋ 최민식 씨는 느끼해서 싫어하는 편인데 이 영화 보니 기름기 쫙 빠져서 나온다. 그러니까 그간의 영화에서 기름기는 의도된 연기였던 것. 언제나 '갑'인 연기자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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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견해는 좀 다르시지만, <베를린>보다 훨씬 낫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생략의 화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아..그리고 최민식 씨 처음 장면 딱 나올 때부터 연기톤이 확 달라진 것을 느끼겠더라구요. 이번 영화에 훨씬 잘 들어맞지 않았나 싶습니다.

넙치 2013-03-01 13:2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의 명품 리뷰 잘 읽었어요.^^
 
L'Etranger (Paperback, Revised)
Camus, Albert / Gallimard / 197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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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방인>에 관해 쓴 제국주의적 성향에 관한 글을 읽다 책장 깊숙이 잠자고 있는 <이방인>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뫼르소만큼 세상 두려울 것 없었던 시절에 열심히 읽었던 책이다. 책 여백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블라블라 적어놨는데 내 어린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뭐 지금이라고 정신세계가 성숙하진 않지만 그 시절보다는 경험으로 사람 심리에 대한 이해는 조금 늘었다고 위안을 해 두자. 아무튼 기억은 언제나 왜곡이어서 두 파트 중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이는 파트만 머리에 선명한데(실은 여기까지만 열심히 읽었다) 이번에 읽으니까 까뮈가 하고 싶은 말은 두 번째 파트에 다 들어있다.

 

2. 구원의 문제는 서양문학의 오랜 화두인데 구원의 문제를 신이 아닌 인간의 실존에서 찾는 게 실존주의라고 해 두자.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궁금해하는 검사가 뫼르소가 신을 믿는 지 안 믿는 지를 관찰한다. 단 한 번의 대화로 검사는 뫼르소를 무신론자로 규정하고 뫼르소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원천 봉쇄한다. 실제 뫼르소와 검사의 눈으로 본 뫼르소는 다른 인물이지만 검사는 자신의 판단을 신의 이름하에 권위를 부여한다. 뫼르소의 사형 집행 전에 신부와의 대화에서 뫼르소는 신부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신의 대리인이란 지위를 대체 누가 부여하나. 신부가 뫼르소의 두려움을 아는 척할 때, 결국 신부도 사람일 뿐이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은 한정적이라고 판단한다. "어느 누구도 (죽은) 엄마를 위해 울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다른 이를 위한 동정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를 말하고 있다.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약혼을 한 이유를, 뫼르소는 죽음을 앞에서 이해한다. 이 대목에서는 좀 까뮈가 비관적으로 보이긴 한다. 그 사람의 처지에 있지 않으면 공감이 일어날 수 없다는 지점까지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린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실제 공감의 능력이 없어도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게 좀 더 인간적이진 않을까.

 

부조리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에서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뫼르소는 살인을 했지만 심문의 핵심은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았고 졸고 카페오레를 마신 일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여자친구와 잠을 자고 코미디 영화를 보러간 패륜아가 된다. 아무도 뫼르소한테 살인의 직접적 동기를 안 묻는다. 재판이란 제도의 함정은, 본질보다는 사람의 심성에 관한 소고로 보이고 한 사람을 합법이란 이유로 한 집단이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타자화의 합법화. 나는 여기서 까뮈의 출생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으로 어느 누구보다 타자화의 대상인 동시에 타자화를 솔선하는 알제리 출생의 프랑스인이 돼 버린 슬픔을 느낀다.

 

뫼르소는 비관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삶에 애착이 있다. 다만 제도권이 규정에서 벗어난 삶에 대한 애착을 갈망한다.

 

"Comme si cette grand colere m'avait  purge du mal, vide d'espoir, devant cette nuit chargee de signes et d'etoiles, je m'ouvrais pour la premiere fois a la tendre indifference du monde. De l'eprouver si pareil a moi, si fraternel enfin, j'ai senti que j'avais ete heureux, et que je l'etais encore"(185)

 

3.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건 까뮈의 깊은 사상이라기 보다는 까뮈의 서정적 문체였을지도 모른다. 간결하고 시적인 표현들. 눈부신 태양 아래 숨겨진 우수가 느껴지는 문체는 매혹적이다. 흰 셔츠랑 검은 바지만 입었을 뿐인데도 자체 발광하는 사람이 있다. 까뮈의 문체가 바로 그런 사람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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