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한 지 십 분이 지나서야 상영관에 들어갔다. 극장에 도착하기 전에 도입부를 놓칠 바에야 예매한 영화를 포기할까, 심하게 갈등하다 결국 놓친 십 분 안에 중요한 장면이 없길 바라다가 최면을 걸었다. 별 장면 없을 거라고. 십 분 놓친 거에 비하면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믿고 싶다).
먼저 영화는 너무 좋다. 집이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으스스하면서도 이미지는 너무 아름다워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디아를 매번 다른 각도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현란함, 집 내부는 화려한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톤이 다운되어있어서 서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인물들의 애증의 시선은, 저들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부풀린다. 전반적으로는 몽환적이다. 인디아가 질풍노도의 마음을 숨기려다 참고 참았던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실제인지 아니면 상상인지 관객 마음에 달려있도록 소소한 장치들을 한다. 어떤 이야기가 좋은 텍스트로 남아있으려면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열린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열린 텍스트의 여지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너무 의도되고 계산된 게 눈에 보이는 게 문제. 미장센을 상징적으로 마구 구성하는데 나는, 좀 글쎄올시다.
영화는 금지된 욕망에 관한 눈뜸이다. 인디아의 심리는 아빠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아빠와 사냥을 즐기던 인디아는 욕망의 억압을 배운다. 사냥 중 인디아가 배운 건 표적을 쏘는 게 아니라 표적을 쏘기 위해 다섯 시간도 기다려하는 인내다. 나뭇잎까지도 셀 수 있는 오랜 시간 동안 매복을 해야한다. 아빠의 죽음 후, 인디아의 가치관에는 혼란이 온다. 욕망을 억압하라고 가르쳤던 아빠 자리를 삼촌이 대신한다. 삼촌은 아빠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싫은 사람, 싫은 건 거침없이 제거하며 자신이 원하는 건 얻고야 마는 어른을 대표한다. 악은 선보다 달콤하고 매혹적이어서 습득하기 더 쉽다. 인디아는 18년 동안 따랐던 규칙을 서서히 버리고 삼촌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금기된 사랑(형수와 시동생)을 혐오하면서도 금기된 사랑(삼촌에 대한 사랑)에 충동을 걷잡을 수 없다. 그 절정은 삼촌과 나란히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다. 굉장히 에로틱하다. 피아노 건반 두드림이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인디아는 금기된 쾌락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불현듯, 삼촌이 피아노를 멈추면, 신기루처럼 모든 게 꿈이 아니었나, 싶게 처리된다. 마치 인디아의 욕망만 다 들킨 거 같은 황망함만이 피아노 의자 위에 남는다.
삼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삼촌의 살인 동기는 대체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삼촌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따를 후계자로 조카 인디아를 지목한다. 인디아의 살인 본능 역시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하실 냉동고에 있는 시체 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나중에 고모할머니 시체를 보고도 태연히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실수로 삼촌을 죽이고는 결국 자기 손으로 신발을 바꿔 신는다. 늘 스니커즈만 신고 다니던 인디아한테 삼촌이 신기고 싶어했던 하이힐이었다. 삼촌의 도움없이도 인디아는, 이제 힐을 신고 비틀거리지 않고 욕망을 드러내는 법을 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필요 이상으로 모호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시나리오가 원래 그런지 박찬욱 감독이 그런 식으로 연출했는 지, 모르겠지만 분석하기에는 신이 나는 영화지만 규격이 다 같은 최상품의 기성품같다고나 할까. 좋은 영화지만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