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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ranger (Paperback, Revised)
Camus, Albert / Gallimard / 1972년 1월
평점 :
1.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방인>에 관해 쓴 제국주의적 성향에 관한 글을 읽다 책장 깊숙이 잠자고 있는 <이방인>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뫼르소만큼 세상 두려울 것 없었던 시절에 열심히 읽었던 책이다. 책 여백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블라블라 적어놨는데 내 어린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뭐 지금이라고 정신세계가 성숙하진 않지만 그 시절보다는 경험으로 사람 심리에 대한 이해는 조금 늘었다고 위안을 해 두자. 아무튼 기억은 언제나 왜곡이어서 두 파트 중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이는 파트만 머리에 선명한데(실은 여기까지만 열심히 읽었다) 이번에 읽으니까 까뮈가 하고 싶은 말은 두 번째 파트에 다 들어있다.
2. 구원의 문제는 서양문학의 오랜 화두인데 구원의 문제를 신이 아닌 인간의 실존에서 찾는 게 실존주의라고 해 두자.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궁금해하는 검사가 뫼르소가 신을 믿는 지 안 믿는 지를 관찰한다. 단 한 번의 대화로 검사는 뫼르소를 무신론자로 규정하고 뫼르소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원천 봉쇄한다. 실제 뫼르소와 검사의 눈으로 본 뫼르소는 다른 인물이지만 검사는 자신의 판단을 신의 이름하에 권위를 부여한다. 뫼르소의 사형 집행 전에 신부와의 대화에서 뫼르소는 신부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신의 대리인이란 지위를 대체 누가 부여하나. 신부가 뫼르소의 두려움을 아는 척할 때, 결국 신부도 사람일 뿐이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은 한정적이라고 판단한다. "어느 누구도 (죽은) 엄마를 위해 울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다른 이를 위한 동정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를 말하고 있다.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약혼을 한 이유를, 뫼르소는 죽음을 앞에서 이해한다. 이 대목에서는 좀 까뮈가 비관적으로 보이긴 한다. 그 사람의 처지에 있지 않으면 공감이 일어날 수 없다는 지점까지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린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실제 공감의 능력이 없어도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게 좀 더 인간적이진 않을까.
부조리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에서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뫼르소는 살인을 했지만 심문의 핵심은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았고 졸고 카페오레를 마신 일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여자친구와 잠을 자고 코미디 영화를 보러간 패륜아가 된다. 아무도 뫼르소한테 살인의 직접적 동기를 안 묻는다. 재판이란 제도의 함정은, 본질보다는 사람의 심성에 관한 소고로 보이고 한 사람을 합법이란 이유로 한 집단이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타자화의 합법화. 나는 여기서 까뮈의 출생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으로 어느 누구보다 타자화의 대상인 동시에 타자화를 솔선하는 알제리 출생의 프랑스인이 돼 버린 슬픔을 느낀다.
뫼르소는 비관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삶에 애착이 있다. 다만 제도권이 규정에서 벗어난 삶에 대한 애착을 갈망한다.
"Comme si cette grand colere m'avait purge du mal, vide d'espoir, devant cette nuit chargee de signes et d'etoiles, je m'ouvrais pour la premiere fois a la tendre indifference du monde. De l'eprouver si pareil a moi, si fraternel enfin, j'ai senti que j'avais ete heureux, et que je l'etais encore"(185)
3.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건 까뮈의 깊은 사상이라기 보다는 까뮈의 서정적 문체였을지도 모른다. 간결하고 시적인 표현들. 눈부신 태양 아래 숨겨진 우수가 느껴지는 문체는 매혹적이다. 흰 셔츠랑 검은 바지만 입었을 뿐인데도 자체 발광하는 사람이 있다. 까뮈의 문체가 바로 그런 사람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