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수 많은 웨스턴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다. 내가 왜 장르영화를 봐야하는 고찰 없이 주말 밤이면 흘러나오는 TV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거칠고 고독한 영웅의 우수에 가끔 감동을 받기도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웨스턴 영화들의 존재 이유가 미국의 건국신화 정당화를 위한 장황한 변주란 걸 알았고 웨스턴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으로 바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녹아있긴 하지만 자유의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웨스턴 장르에 대한 애정따위는 특별히 길러지지 않았다. 영화 관람을 선택할 때 장르보다는 여러 가지 요인 중 하나가 맞으면 극장행을 선택한다. 그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가 영화를 누가 만들었나다. 쿠에틴 타란티노 팬은 아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와 웨스턴 무비의 조합은 좀 궁금했다.
역시 기발하다. 서사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통 웨스턴이 아니라 퓨전 웨스턴이다. 가장 인상적인 요소 중 하나가 음악의 사용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컨트리 음악이나 포크가 흐르는게 아니라 빠른 비트의 트랜디한 음악이 사용되서 시대를 초월하는 느낌이 든다. 뭐 물론 감독의 의도겠지만 고전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시대극에서 모티브만 얻어 오락성을 가미한 재창조다. 남북전쟁 전 시점을 택한 것도 아주 영리하다. 인종주의 집단 KKK단이 등장한다. 이들이 흑인을 공격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을 앞두고 머리에 쓴 하얀 두건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인다고 벌어지는 토론 에피소드는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인종주의와 노예제도를 소재로 쓰지만 감독은 거창하게 비판 혹은 고찰 영역으로 끌고갈 생각이 없다. 현상금 사냥꾼 닥터 슐츠의 입을 빌어서 감독이 인간에 대해 갖는 근본적 태도를 밝힌다. 흑인을 하나의 상품으로 대하는 백인이나 백인 지명수배자를 죽여서 현상금을 노리는 거나 동급이라고. 닥터 슐츠가 장고를 자유인으로 만든 것은 장고의 상품가치 때문이지 노예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미국 전반을 지배하는 관념이 실용주의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용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출현은 당연하고 아메리칸 드림 역시 허울만 좋지 실은 모든 걸 개인한테 떠넘기는 자본가들의 비열한 전략이니까. 노예상인들이나 노예 중간 관리자들로 등장하는 비실한 백인들 모두 착취자면서 피착취자의 계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고 거기에 각 개인의 고유성이 더해져 악랄한 캐릭터가 돼 버린다.
그래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모든 것에 냉소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냉소가 긍정정 재생산이 아니라 자본가의 냄새가 짙게 나서 그 역시 자본가랑 한통속 같은 느낌이 난다. 자본가를 비웃지만 그 웃음 속에 결이 다른 자본가상을 우뚝 심어놓는다고 할까. 감독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하는 존재다. 모든 건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고(장고도 예외는 아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괜찮다. 법을 어기든 사람을 개처럼 죽이든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개인이 영웅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뭐든 상관없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보는 것 같아 종종 불편하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지나친 폭력성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장총의 위력을 모르겠지만 총알이 순식간에 날아가서 살에 박히면 피와 함께 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낭자함을 종종 볼 수 있다. 총과 직면한 인간은 혼이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살덩어리에 불과하게 묘사를 한다.
이 영화에서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건 시련을 극복하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서사 전략일 뿐이지 시대적 아픔에 대한 숙고와 회한 탓이 아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성찰적일 필요는 없지만 역사까지도 자본에 봉사시키는 느낌이랄까. 말은 이렇게하지만 나란 관객은 이기적이어서 티켓값과 투자한 시간의 총합을 계산하며 경제효용을 따지면서 극장을 나왔다. 꽤 긴 런닝 타임인데도 안 지루하고 재밌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