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봤더니 본 영화가 없다. 이 분 원래 이렇게 연출하시나? 영화가 강약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이다. 영화 보고 나니 기가 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프레디와 랭카스터의 버디무비로 보고 싶다. 랭카스터는 프레디한테, 프레디는 랭카스터한테 서로 마스터다. 영화는 먼저 프레디를 소개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대를 하는 군인들을 모아두고 장교가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누구라도 신경쇠약자가 될 것이다." 전쟁의 상흔로 프레디는 섹스,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이런 소재를 수도 없이 보아 왔지만 프레디의 캐릭터에 입혀진 불안한 모습은 슈퍼갑인듯. 제대 후 쇼핑몰에서 사진사로 일하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프레디한테 왜 마스터가 필요한지 보여준 후 랭카스터를 소개한다. 현재는 수면상태고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서 분노와 억압을 치유해서 동물적 행동을 통제하는 영적인 완전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이론의 창시자다. 영화 속 묘사로 짐작할 수 있는 건, 랭카스터는 지지자들도 많지만 반대자들도 많다. 랭카스터와 프레디가 만나는 장소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로 의미심장하다. 어떤 가설이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실험과 증명의 과정이 필요하다. 실험과 증명 과정에는 무수한 의심과 회의가 존재하고 반박도 있다. 랭카스터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지지자가 필요하다. 물론 배 안에 모인 사람들은 지지자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신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의 아들과 딸은 그 대표자들이다. 그러니 랭카스터는 적들을 피해서 바다 위에 있다. 그리고 긴 힘든 여정을 함께 할 프레디를 만난다.

 

사람은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라 그런지 자기와 친구가 될 동질감이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경향이 있다. 랭카스터와 프레디는 한눈에 서로 닮은 꼴이라는 걸 알아본다. 인간의 동물성을 지양을 주장하는 이와 신체 감각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는 동물성의 표본이 어떻게 닮은 꼴일 수 있는가? 랭카스터는 모순적 인물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본성은 모순된다. 착한 사람도 악할 수 있고, 이성적인 사람도 감정적일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고 서머싯 몸이 말씀하셨다. 랭카스터는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느라 극도의 긴장 속에 있다. 나머지 한쪽 본성(환각제가 든 술에 대한 탐닉과 성적 욕망, 분노같은 다혈질 기질 등)은 프레디를 만나면서 자연히 드러난다. 프레디는 랭카스터가 억눌러야 하는 본능에 대해 의문이나 질문을 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프레디 역시 어느 누구와도 진지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시절 가족사부터 해군시절 만났던 가슴 속 첫사랑의 이야기까지 장난스런 놀이 혹은 실험 프로세싱을 계기로 발화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사실 모든 정신분석학적 치료 과정의 제 일단계는 발화에 있다. 말할 줄 몰랐던 프레디가 말을 하게 되고 랭카스터는 이성으로 누르고 있던 본능을 육체로 말하는 전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프로세싱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은 점점 커져간다. 프레디는 랭카스터를 닮아가고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닮아간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동료애를 넘어선 사랑까지도 존재한다고 확장 해석하고 싶다. 프레디가 랭카스터를 떠나서 이성의 사랑, 도리스를 찾아간다. 그러나 도리스는 떠나고 없다. <캐스퍼>란 애니매이션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축 늘어져 있는 프레디는 유령같은 캐스퍼다. 랭카스터가 자금유용으로 경찰에 연행될 때 보여준 프레디의 광기 어린 우정은 마치 연인같기도 하다. 우리는 연인의 개념을 지극히 협의의 의미로만 사용하는데 광의에서 연인이란 혈육이 아닌 다른 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않나.....

 

아무튼 그러니까 인간은 혼자서는 불완전하고 마스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같다.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완전한 영적 존재라는 말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이론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는 많은 변수가 있는데 이론은 이 변수의 움직임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아 약점이 많다. 인간이 육체와 정신 중 어느 한쪽으로만 집중해 있을 때 드러나는 불안정성은 얇은 유리같다. 언제든 산산이 조각나버릴 수 있는. 엔딩 무렵에 랭카스터가 프레디한테, 마스터가 없이 살 수 있다면 떠나라고 한다. 프레디는 떠난다. 그러나 한 여자를 만나고 섹스 중 프로세싱을 한다. 프로세싱은 프레디한테 일종의 대화법이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노래가 나오는데 후렴으로 파트너가 바뀐다..라고 반복된다. 랭카스터는 더 이상 프레디의 마스터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프레디는 또 다른 마스터를 찾고 찾아야한다. 아마도 랭카스터도, 그리고 관객도. 삶은, 어쩌면 마스터를 찾아 헤매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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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신 덕후질 중 하나로 다시 본 영화. 다시 보니(기억하는 건 몇 가지 이미지 뿐이어서 새로 본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오, 이런 휼륭한 영화를 전에 박찬욱 감독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나는 왜 균신의 매력을 이제야 알아보는가 하는 자책. 잔인한 장면은 모두 잊혀졌었는데 또 봐도 잔인하다. -_-

 

아무튼 복수의 속성이 원래 무정부적 성향이다. 제도권에서는 복수라고 말하지 않고 처벌이라고 한다. 처벌 주체가 누구인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우리는 처벌은 정당하고 복수를 꾀한 자는 처벌을 받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복수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손으로 받은 걸 갚겠다는 의지 속에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공권력 혹은 제도를 불신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에서 출발해 보자. 류. 그는 청각장애인이다. 소리를 못 들으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시각보다 덜 중요하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는데 어리석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어떤 위험 상황에 달했을 때 눈이 스캔할 수 있는 반경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속수무책이다. 찌개를 끓이고 있을 때 누나가 통증 때문에 울부짖어도 모르고, 아이가 익사 하기 직전에 다급하게 소리를 내도 모른다. 비극의 기원은, 그러니까 신체적 기능장애에서 시작된다. 신체적 기능장애는 사회적 기능장애로 이어진다. 보통 참을 수 없는 소음 속에서 일해야하는 공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해고 당한다. 해고 통보는 류의 청각기능장애가 더 이상 쓸모없다는 통보다. 류의 신체적 장애가 경제사회 속의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데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는 순간에 모든 일이 줄줄이 일어난다. 누나한테 맞는 신장을 사기 위해 저축한 돈과 신장을 강탈 당한다. 인생에서 필연은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마침 누나한테 알맞은 신장 기증을 찾았다고 병원에서 연락을 받는다. 하지만 불법장기매매업자들한테 수술비를 털린 후라 유괴를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으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류의 청각 소실은 사회에서 노동계급에서 잉여 인구로의 이동을 추진하는 매개다. 류는 혈육인 누나와도 별 대화를 하지 않고 류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이는 여자친구 영미다.

 

영미는 정체가 불분명한 단체 소속으로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를 외친다. 영미는 류의 유일한 조력자다. 재벌해체를 외치던 영미가 유괴하기로 지목한 건 동진의 딸. 동진의 지위는 딸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그는 착취계급인 동시에 피착취계급이다. 아마도 하도급업체를 운영 중이었다가 도산한 걸로 짐작된다. 영미가 동진의 딸을 유괴하기로 한 건 동진을 착취계급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동진은 먹이 피라미드에서 중간 위치에 있다는 게 드러난다. 그러니 동진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복수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먹이 피라미드에서 피착취계급인 류와 영미를 죽인다. 그러나 그 역시 류와 영미와 같은 피착취계급이다. 동진 역시 무정부혁명단체의 남자들한테 살해 당한다. 동진의 죽음은 그럼 무정부혁명단체의 승리인가? 그럴리가. 피착취계급의 복수 순환을 지켜보는 게 착취계급의 임무다. "우리는 가치와 정의를 측정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측정할 수 없는 세계에 의해 길러질 수 있다."란 네그리의 말이 떠오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면.

 

덧. 십 년도 더 된 영화인데도 영화적 수사법은 낡지 않고 화려하다. 새삼 좋아서 씬의 강약을 감탄하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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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7-19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좋습니다. 넙치님의 방식대로 생각해보면 영화가 더 뭔가 씁쓸해진다고 해야하나, 좀 더 무서워진다고 해야하나..그런 것 같아요. 그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해보면요. 신하균이 좋은 배우이기도 하지만, 특히 박찬욱의 영화들에서 더 빛나는 것 같아요. 박찬욱 감독이 배우를 잘 살린다고 해야하나..

넙치 2013-07-19 14:52   좋아요 0 | URL
"복수는 나의 것"이란 말이 로마서에 나온 말이더라구요. 신이 한 말인데, 착취계급이 신처럼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복수를 하는 게 아닌가..그런 생각도 드네요. 영어 제목은 다르지만, 그러니 미스터 복수한테 동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하고요. 영화 본 후 네그리의 책을 뒤적이다보니 더 잔인하게 보게 된 거 같아요. 아무튼 다시 보니 말할거리가 풍부한 텍스트더라구요. 카메라 움직임만으로도 썰을 풀 수 있을 거 같아요.

<박쥐>에서도 신하균이 나왔다는데 제 비루한 기억력 탓에 전혀 기억이 안 나요.ㅠ박찬욱 감독 영화들에서 개성있고 강한 역할들이었는데 말이죠. 박 감독이 연출력은 정말 훌륭하신듯. 영애 씨도 금자 씨로 만들고.
 

 

 

 

 

 

 

 

 

 

 

오종 감독 영화 중 제일 재밌게 본 거 같다. 영화 전반에 클로드 샤브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긴 했지만 원래 창작이란 게 모방이라지 않나. 플롯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스페인 소설 <마지막 줄에 앉은 소년The Boy in the Last Row>을 각색했단다. 영화사 초기에 영화가 문학의 하위 장르 취급을 받았는데 21세기는 다시 영화사 초기로 돌아간 듯. 요즘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들이 소설, 만화 등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있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영화란 매체가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말은 영화 감독의 역량도 한정하는 거 같기도 하다. 영화사의 발달은 어찌보면 기술사의 발달인데 21세기는 어째 기술사에 무게 중심을 더 두고 있는 듯하다. 감독은 기술 진보를 통합하면서 그 이음매에 대중의 정서를 건드릴 지점을 찾아내는 사람같다. 현대의 경향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아무튼.

 

영화는 중층 플롯으로 이루어진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학 선생인 제르맹이 학교 이름답게 문학에 재능이 있는 소년 클로드를 개인지도 하게 된다. 클로드는 또래들 중 군계일학이다. 클로드가 쓴 에세이를 픽션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선생 제르맹이 깊이 관여를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클로드가 픽션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스릴러 혹은 다음회가 궁금한 인기 드라마처럼 묘사했다. 현실에서 제르맹과 클로드의 관계의 미묘한 변화가 또 다른 축이다. 제르맹과 클로드의 관계에서는 예술 창작에 도덕성이란 게 있나, 하는 문제를 슬며시 던진다. 클로드가 쓰는 소설은 같은 반 친구의 엄마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 관한 것이다. 이건 픽션이니까 접어두자. 문제는 클로드가 친구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러 계속 친구집에 갈 수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기에 제르맹은 수학 시험지를 훔쳐다 준다. 예술가들이 영감의 원천을 위해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도 종종 괜찮은가. 영화는 안 괜찮다고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다가도 묵인하는 거 같다. 클로드는 제르맹의 평범한 삶을 거의 파괴했다. 엔딩에서 그런 두 사람이 공원 벤치에 앉아 다른 집 창을 보며 소설 쓰기 워밍업 단계로 대화를 한다. 비윤리적인 일들은 일어나버렸고 창작은 계속 되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 같기도 하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고.

 

클로드의 소설을 같이 지켜보면서 청소년인 클로드의 심리를 엿 볼 수 있다. 원래도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기도 하지만 소년은 다른 여러 관심사 중 왜 친구의 가정이 되었는가? 그 나이 또래라면 이성이여야 하거늘. 클로드의 엄마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사고로 중증 마비환자다. 클로드한테 집이란 공간은 자신한테는 결핍된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은 결핍에서 나온다. 끝까지 독신으로 산 플로베르가 정열의 아이콘 보바리 부인을 만들어 냈듯이. 클로드한테 친구 집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일상이 모두 관찰 대상이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친구 엄마의 권태를 이해하기도 한다. 관찰자는 소년이지만 소년이 본 친구와 친구 아빠, 즉 남자란 성은 여자의 권태를 헤아리기에는 일차원적으로 묘사된다. 소년이 현상을 보는 태도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 편인데 소년도 크면 친구나 친구의 아빠처럼 변하려나? 아님 그 장점을 가진 채로 성장하려나?

 

제르맹도 소년기에는 클로드 같았을지도 모른다. 한 때 소설을 썼지만 재능이 없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내는 현대 미술 큐레이터인데 현대 미술에 대해 기본적으로 경멸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토로하는 어려움에 귀 기울여주는 비교적 자상한 남편이지만 아내가 처한 위기에 진심으로 공감하진 못하게 된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 더 팔려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을 사용하는 광고 문구와 전시회 도록을 동급 취급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젠가 들키기 마련이니까. 클로드 친구의 부모 커플보다는 이성적이고 더 교감하는 커플로 그려진다.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역사가 시작한 시대부터 지각에 형성된 깊은 틈을 보여준다. 클로드도 제르맹처럼 자랄거라니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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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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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굳어져서 책이 잘 안 읽힐 때 주로 소설을 찾게 된다. 편애하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소설책을 사려고 지갑을 열 때 인문서들에 비해 몇 배로 고민 하면서 사게 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비용대비 거둬들일 즐거움과 몰입의 효과를 미리 시뮬레이션해 본다. 리뷰도 미리 찾아보기도 하고 작가도 좀 조사해보고. 소설은 읽다가 재미없으면 안 읽게 되고 성격상 책을 처분도 못 해서 더 신중해는 거 같다. 내 편견은 당연히 객관성이 없기에 어떤 작가의 소설은 무조선 사기도 한다. 이기호 작가는 그 중 한 명이다.  이기호 작가는 김영하 작가 만큼 팬을 거느릴 필력과 유머가 있다고 믿는다. 저평가된, 혹은 이기호 작가의 장점을 독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술술 읽히지 않았다. 책 읽을 때 요즘 심각하게 장애를 느끼는 내 탓도 있지만 작가의 탓도 있다. 예전의 발랄함이 사라지고 강박관념이 좀 보인다고나 할까. 사회적 약자들이 여전히 주인공이고 주인공들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 또한 비슷하니 주제의식도 여전하다. 하지만 좀 무거워지고 스토리를 전개가 힘들어지는 느낌이 든다. 혹은 주인공들이 아주 소심해졌다고 할까? 인물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이 쭈뼛거릴 때 그 인물을 대하는 인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작가가 어떤 뻘짓하는 주인공들의 관찰자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이런 느낌이 없었던 거 같은데....(물론 내 기억은 불확실하다). 피식하는 맥빠진 웃음이 나오면서 다음 페이지가 별로 안 궁금하게 전개된다. 내가 변해서일 수도 있고 작가가 정말 변해서일 수도 있고. 전작들에서 인물들은 불안에 휩싸여 즉흥적으로 움직여서 통통 굴러가는 공같아서 열심히 그 공을 따라 달렸었는데, 이번 소설집은 그게 없어 좀 아쉽다. 그래도 이기호 작가의 작품집이니까 일독할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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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게 개봉 한 지 얼마 안 된 5월 셋째 주다. 결혼한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봤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왜 남의 부부싸움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내 첫마디는 지루하다,였고 친구는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정말 저렇다, 고 했다. 다들 좋다는 평 일색인데 내 멘탈에 문제 있나를 두 주 동안 고민해 봤다. 전 편의 영화들과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관점의 문제로 접어든다. 비혼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토요일 오후 남산에 산책갔는데 가족끼리 산책을 많이 왔단다. 아이들 손 잡고 천천히 걷는데 친구는 혼자라는 생각보다는 앞에서 빨리 안 가고 뭐하나, 하는 짜증이 더 컸다고. 나도 친구와 같은 멘탈의 소유자다. 

 

이 영화는 세 시퀀스로 나눠진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의 수다 씬, 여러 커플들이 모여 점심식사 하는 씬, 이 시리즈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호텔까지 걸으며 호텔 방안에서 본격적으로 싸우는 씬. 그 중 덜 지루한 씬은 점심식사 씬이다. XX 염색체와 XY 염색체가 가질 수 있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이를 논하는 대사들을 주고 받는다. 대사가 기억날 리 없고 영화 내용이라기 보다는 계속 머리 속에 찾아드는 생각을 좀 정리해 보려고 한다.

 

셀린느의 불만은 내가 결혼한 친구들한테 흔히 들어온 불만이다. 자신이 없어지고 아이들만 있는. 육아는 중요한 일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모성이란 게 한국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지. 한 때 나와 같은 생각을 나누었던 이들의 SNS에서 나는 내 과거의 일부를 찾기를 원한다. 이들의 SNS는 온통 그들의 현재고 미래인 아이들 사진 밖에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의 안부지 그들의 아이들의 안부가 아니다. 더 당혹스러운 건 전화 통화를 해도 내 안부를 묻기 보다는 아이들의 일상을 늘어놓는다. 셀린느의 딜레마는 자신만의 시간을 원하지만 뜻대로 하지 못하는 거다. 육아를 하는 이들의 푸념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이해하는 할 수 있지만 공감 할 수는 없다. 공감할 수 없는데 슬픔이 20퍼센트고 80퍼센트는 감사한다. 나이들어 점점 고립되어 가는 거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여러 군데 기웃거릴 여력이 있다니는 사실에.

 

가끔 엄마가 혼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세상에나 내 친구들이 가끔 그런 말을 한다. 친구들은 엄마의 도플갱어다. 육아를 하는 여자들한테 "자기만의 방"은 정말 불가능한걸까? 궁금하다. 자신의 아이 이외에 타인의 삶도 궁금해 하는 아주 당연한 방을 갖는 걸 막는 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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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7-0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얘기하신 질문과 다른 얘긴데, 저는 이 영화의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막들을 보면서 내가 과연 이 영화를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사실 자막이 거의 숨돌릴 틈 없는 속도로 쏟아지기 때문에 그것을 읽기도 바쁘잖아요. 그래서 이걸 보는 것은 거대한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굳이 이것을 영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요.

넙치 2013-07-05 12:43   좋아요 0 | URL
시네마틱한 면이 없어서, 여러 면에서 제시와 셀리느한테 어느 정도 애정이 없으면 보기 힘든 거 같아요. 그게 배우에 대한 취향이든 아니면 공감이든, 뭐든 있어야 대사 때문에 놓친 표정들을 보려고 또 보고 하는 거 같아요.

저는 <코스모폴리스>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전반부에 잔뜩 기대감만 부풀려 놓고 후반부에 가서 주저 앉는데 대사도 그닥 새롭지 않은 말장난을 보는데 굳이 볼 필요가 있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