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 감독 영화 중 제일 재밌게 본 거 같다. 영화 전반에 클로드 샤브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긴 했지만 원래 창작이란 게 모방이라지 않나. 플롯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스페인 소설 <마지막 줄에 앉은 소년The Boy in the Last Row>을 각색했단다. 영화사 초기에 영화가 문학의 하위 장르 취급을 받았는데 21세기는 다시 영화사 초기로 돌아간 듯. 요즘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들이 소설, 만화 등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있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영화란 매체가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말은 영화 감독의 역량도 한정하는 거 같기도 하다. 영화사의 발달은 어찌보면 기술사의 발달인데 21세기는 어째 기술사에 무게 중심을 더 두고 있는 듯하다. 감독은 기술 진보를 통합하면서 그 이음매에 대중의 정서를 건드릴 지점을 찾아내는 사람같다. 현대의 경향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아무튼.

 

영화는 중층 플롯으로 이루어진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학 선생인 제르맹이 학교 이름답게 문학에 재능이 있는 소년 클로드를 개인지도 하게 된다. 클로드는 또래들 중 군계일학이다. 클로드가 쓴 에세이를 픽션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선생 제르맹이 깊이 관여를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클로드가 픽션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스릴러 혹은 다음회가 궁금한 인기 드라마처럼 묘사했다. 현실에서 제르맹과 클로드의 관계의 미묘한 변화가 또 다른 축이다. 제르맹과 클로드의 관계에서는 예술 창작에 도덕성이란 게 있나, 하는 문제를 슬며시 던진다. 클로드가 쓰는 소설은 같은 반 친구의 엄마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 관한 것이다. 이건 픽션이니까 접어두자. 문제는 클로드가 친구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러 계속 친구집에 갈 수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기에 제르맹은 수학 시험지를 훔쳐다 준다. 예술가들이 영감의 원천을 위해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도 종종 괜찮은가. 영화는 안 괜찮다고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다가도 묵인하는 거 같다. 클로드는 제르맹의 평범한 삶을 거의 파괴했다. 엔딩에서 그런 두 사람이 공원 벤치에 앉아 다른 집 창을 보며 소설 쓰기 워밍업 단계로 대화를 한다. 비윤리적인 일들은 일어나버렸고 창작은 계속 되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 같기도 하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고.

 

클로드의 소설을 같이 지켜보면서 청소년인 클로드의 심리를 엿 볼 수 있다. 원래도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기도 하지만 소년은 다른 여러 관심사 중 왜 친구의 가정이 되었는가? 그 나이 또래라면 이성이여야 하거늘. 클로드의 엄마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사고로 중증 마비환자다. 클로드한테 집이란 공간은 자신한테는 결핍된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은 결핍에서 나온다. 끝까지 독신으로 산 플로베르가 정열의 아이콘 보바리 부인을 만들어 냈듯이. 클로드한테 친구 집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일상이 모두 관찰 대상이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친구 엄마의 권태를 이해하기도 한다. 관찰자는 소년이지만 소년이 본 친구와 친구 아빠, 즉 남자란 성은 여자의 권태를 헤아리기에는 일차원적으로 묘사된다. 소년이 현상을 보는 태도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 편인데 소년도 크면 친구나 친구의 아빠처럼 변하려나? 아님 그 장점을 가진 채로 성장하려나?

 

제르맹도 소년기에는 클로드 같았을지도 모른다. 한 때 소설을 썼지만 재능이 없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내는 현대 미술 큐레이터인데 현대 미술에 대해 기본적으로 경멸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토로하는 어려움에 귀 기울여주는 비교적 자상한 남편이지만 아내가 처한 위기에 진심으로 공감하진 못하게 된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 더 팔려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을 사용하는 광고 문구와 전시회 도록을 동급 취급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젠가 들키기 마련이니까. 클로드 친구의 부모 커플보다는 이성적이고 더 교감하는 커플로 그려진다.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역사가 시작한 시대부터 지각에 형성된 깊은 틈을 보여준다. 클로드도 제르맹처럼 자랄거라니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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