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 그림을 정말 그대로 옮겨 놓는 미장센이고 시각적으로는 황홀하다. 그래픽과 실제 인물, 그리고 세트를 잘 섞어서 호퍼 그림을 스크린에서 보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그림이 사진처럼 어느 한 순간만을 포착했다면 감독은 그림 속에 인물이 들어가기 전과 후까지도 잡아내서 호퍼 그림을 확장시키는 일도 한다. 인물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익숙한 그림이 아니라 인물이 빠진 공간을 한참 비춰준다. 감독이 노린 효과는 이 점인지도 모른다. 인물이 중얼거리고 지나간 후에는 같은 공간일지라도 더 이상 호퍼가 점유하는 공간이 아니게 돼 버린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경험이다. 호퍼 그림에 대해 내 머리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에 무수한 균열이 생기게 만드는 촬영법이다.

 

감독에 관해 좀 찾아보니 비엔나 출신이고, "예술이 예술을 모방하는 게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20년 대 대공황부터 세계대전을 거쳐 50년대까지를 아우르면서 호퍼 그림에서 여백으로 남아있을 것들에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눈은 즐거운데 이런 식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내레이션은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호퍼 그림하면 여백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도시인의 외로움에 감정이입이 아닌가. 가령 <호텔방>에서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팜플렛을 클로즈업하면서 여자가 음악회 프로그램을 낮게 읊는다. 아, 여자가 들고 있는 종이를 규정하니까 호텔방 그림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우수가 저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여자가 읽는 책까지도 검색을 좀 해봤다. <The Skin of our teeth:간신히>로 손톤 와일더가 써서 퓰리쳐상을 받고 엘리아 카잔이 연출해서 뉴 헤이븐에 있는 슈베르트 극장에서 상영되었단다. 이 책을 두 번이 줌으로 들어가서 클로즈업한다. 카인과 아벨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나본데 감독이 비판하는 건 작품 자체가 아니라 엘리아 카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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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같은 선상에 있다. 이틀 간격으로 두 영화를 봤다. 두 영화 속에서는 최소한의 정의가 살아있다. 송우석의 세계관을 바꾸는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란 말이 있다. 송우석이 세무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시각을 전환하는 일은 정치적이지만 개인적 동기가 그 추진력이다. 국밥집 아주머니에 대한 의리는 공권력의 어둠을 보게 이끌었다. <용의자>에서 역시 지동철이 탈북하게 된 계기와 북진회를 운영하는 이중간첩을 쫓는 동기는 가족을 잃은 데 대한 복수심에서다. 그리고 지동철을 돕는 해직 기자 역시 자신의 복직을 위해 지동철을 돕는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거나 모순을 폭로하려는 의도는, 이렇게 개인적 동기가 없다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래서 혁명도 내게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두 영화로 위안을 좀 받았다.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한테 직접적으로 소리치는 장면이 꽤 있다. 실제 재판과정을 본 적이 없지만 사실 안 이럴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법정에 있는 순간만큼은 변호인이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에두르지 않은 강하고 직설적 화법으로 뭐가 잘못인지 시원스럽게 말한다. <용의자>에서 민대령(박희순)이 지동철한테 김실장(조성하)를 죽이게 하고 지동철이 도망가게 놓아 준다. 김실장은  민대령을 약올린다. 윗선에 든 보험이 많아 법으로 하면 금방 풀려날 거란 암시를 하면서. 민대령은 지동철한테 총을 건네 주고 결국 지동철은 김실장의 머리를 날린다. 이 장면에서 일종의 징벌적 성격이 드러나서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법이란 필요한 순간에는 무력하고 법을 만든 이들이 사용할 때만 강한 성격을 지녔다는 걸 영화의 낭만성 속에서도 인정을 한다. 

 

멀티플랙스 영화관은 크래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불을 켜고 어둠 속에서 잠시라도 느낀 쾌감은 극장 안에 두고 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잠시 위안을 받았지만 나와서는 그 위안이 스펙터클이라는 걸 깨닫고 허둥댔다. 영화적 낭만성이 주는 긍정적 유통기간이 짧나?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라고 기 드보르가 말했다. "스펙터클은 기만되는 시선과 허위의식 양자의 공통지반이며 그것이 달성하는 통일이란 일반화된 분리의 공식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영화와 현실의 간극은 메꿀 수 없는 심해처럼 깊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긍정을 영화 속 인물들이 대신해 주고 있다. 이에 우리는 값 싼 표값을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행동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지만 표만 있으면 잠시 정의로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입장할 수  있으니까.

 

<용의자>를 본 날이 사랑의 레전드 예수 탄생일이었고 철도노조 지도부가 조계사로 들어간 날이었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려왔다. 작년 대선에 그네양을 찍은 이들한테 분노가 치밀었지만 씁쓸함같은 부작용은 곧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또 같은 재앙을 만드는 이한테 투표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위안을 주는 영화는 또 흥행할 것이고. <변호인>같은 영화를 외면하는 날이 현실이 영화같은 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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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여행을 다녀오면 허무의 쓰나미가 찾아온다. 허무를 떨치려고 여행 사진도 뒤적이고 여행기도 적어 보고 지명이 들어간 책도 찾아본다. 허무의 쓰나미가 밀려왔을 무렵 읽었던 책이다. 첫 부분에 익숙한 지명이 한가득 등장해서 과거 속으로 광속으로 달려 가고 있던 내 기억을 잠시 늦추게 하면서 잠깐 머물렀던 도시에 대해 놓쳤던 여러 가지를 떠올리곤 했다. 독서의 주목적이 위안인데 참 위안이 되었던 책이다.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라틴어로 세계란 뜻, 문두스mundus란 별명을 가진 고문헌학자 그레고리우스다. 그의 세계는 책이었다.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도 서점에만 들리는 사람. 책 속에 있는 삶을 진짜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낯선 포르투갈 여인을 잠깐 만나고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을 산다. 지은이 아메데우 드 프라두라의 흔적을 좇아 수 십 년간 일했던 학교를 떠나 리스본으로 향한다. 왜 리스본인가. 리스본이란 지명 자체가 갖는 아우라가 있다. 닿기 힘든 이국적인 느낌이다. 칸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보냈던 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갑자기 발을 쑥 집어 넣는 이유가 이렇게 묘사된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는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65쪽)

 

시계추처럼 정확했던 그레고리우스가 더 이상 시계추가 아닌 삶을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문헌학자답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프라두가 쓴 글을 읽으며 프라두가 글을 쓰게 되는 배경을 추적해간다. 프라두란 인물이 가족, 학교, 사회적으로 겪는 상대적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라두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신을 강요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의사란 직업을 통해 존경을 받고 어린 시절 혐오했던 권위자가 되려는 찰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독재정권 시절,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는 독재자 앞잡이를 살리고 직업 윤리와 일반적 정의 개념 사이에 혼란을 겪는다. 의사로서 악인을 살렸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를 살려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동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프라두의 견고했던 신념은 모래 가루로 흘러내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책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명확했는데 책 밖으로 걸어나와서는 쓰고 있던 안경마저도 불안하고 안 보이는 경험을 한다. 살아있는 그레고리우스가 이미 죽은 프라두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은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서 세상은 책처럼 혹은 자신이 알고 경험했던 범위에서 해석이 가능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책을 덮고 프라두가 왜 글을 썼는지 주변을 추적하면서 "침묵하고 있는 경험에 색채를 입히고 멜로디를 적는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따라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경험과 비일상적인 면을 소환해서 지금 걸어가는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그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빈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이 주는 커다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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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 어거스트
    from free-floating ennui 2014-06-11 22:39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가 개봉하면 안 보는 편이다. 책의 밀도를 두 시간 짜리 영화가 담아내는데는 데 무리가 있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이 궁금했다. 소설이란 틀만 빌린 철학서 같기에 어떻게 이미지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과 리스본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이미지를 기웃거릴 수 있을 거란 호기심이 만나 극장을 찾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소설은 추리극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
 
 
 

 

 

 

 

 

 

 

 

 

 

1.

요즘 과도하게 피곤하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숙면을 취하다 못해 아예 다리 뻗고 눕고 싶었다. 내려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격하게 애정하는 구스 반 산트님의 영화를 불경한 태도로 감상하다니ㅜ.ㅜ 이런 정도면 재관람을 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재관람 의지를 돋게 하진 않는다. 구스 반 산트님의 감수성을 동경하고 애정하는데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님의 독특한 감수성보다는 맷 데이먼의 세계관이 조금 더 드러난다고 할까. 영화를 3분의 1정도만 보고 이렇게 단정하다니, 나도 참. 위키를 찾아 봤더니, 원래 이 영화는 맷 데이먼이 감독으로 데뷔하려는 작품이었다고. 맷 데이먼이 시간이 안 맞아 구스 반 산트님이 감독을 했다고.

 

2.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하고도 무언가를 끄적이는 이유는, 이 영화의 주제 때문이다. 영화 줄거리는 개발을 앞둔 시골 마을 사람들의 태도와 거대 개발회사의 탈도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업윤리에 대해 흥미가 있다. 글로벌이란 개발사의 탈도덕이나 두 얼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고 싶지 않다. 현재 우리가 신문이나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이야기니. 초점은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기업의 비도덕한 윤리가 아니라 그 부도덕한 기업을 위해 일하는 한 개인의 입장이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우리는 사소한 일에 너무 진지하게 접근한다고 했다. 제과 회사에서 홍보라고 불리는 일은 과자를 많이 팔기 위해 하는 여러 가지 노력이다. 과자 포장에서 부터 과자 모양, 포장지를 편하게 벗길 수 있는 점선에 이르기까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대부분인데 이런 걸 생각해내기 위해 수 많은 토론과 회의가 이루어지고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진지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원시 시대 정글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썼던 인간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다만 그 겉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다. 개인은 정글이 아니라 정글을 사 들인 기업의 우리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좁은 우리 안에서 누울 자리를 확보하려다 보면 윤리의식 따위는 잊어린지 오래다. 거대 기업이 추구하는 이익을 개인은 왜 추구하면서 갈등을 겪어야하나. 기업은 직원이 퇴사를 하든 해고되든 거기에 있다. 한 개인의 양심이 기업을 흔들 수 있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양심이 승리하는 판타지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을 위해 일한 스티브가 잊고 있던 윤리 의식을 깨우는 과정을 보면 석연치 않다. 자신이 다른 이들을 속이고 설득할 때는 괜찮고 기업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속일 때 비로소 잊어버린 소중한 걸 깨닫는다. 추상적인 일이 자신의 일이 되는 순간에 구체적으로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스티브(맷 데이먼)이 글로벌 기업에 속은 걸 알고 자신의 양심을 찾기로 하고 회사를 떠나도 멋지게만 보이지 않는다.

 

그가 원래 선한 사람이었고 본성을 갈망해 선한 사람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속지 않았다면 그는 갈등없는 회사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계속 있었을 거라고 뒤집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존경받을 이유가 없다. 개과천선한 개인을 나는 왜 비난하는가. 기업을 비난해야지. 기업을 비난하는 일은 쉽다. 내가 그 기업에 속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기도 쉽고. 하지만 기업의 구성원은 개인이고 각 개인은 각자의 삶과 일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스티브의 동료 프랜시스 맥도맨이 이런 말을 한다. "일은 해야할 일일 뿐"이라고. 그녀는 일을 끝내고 빨리 돌아가서 아들을 돌봐야한다고. 나도 역시 프랜시스 맥도맨의 태도로 일을 대한다. 그러다가 가끔씩 감상적인 스티브가 돼서 사회적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면 잠깐씩 괴로워하다 다시 일은 일일 뿐이라는 태도로 빨리 돌아온다. 프랜시스 맥도맨의 말은 진리고 이렇게 프랜시스 맥도맨의 말에 공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스티브의 감상적 태도마저도 삐딱하게 보는 태도도 마음에 안 든다. 직업윤리란 걸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들고 안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들고. 밥벌이란 게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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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나는 관심이 많다. 팩트란 역사를 픽션화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을 애정한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비난을 받을 숙명에 처해 있지만 나는 역사를 비트느라 작가가 흘린 땀을 존중하는 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는, 조선시대 등장하는 장희빈만큼 빈번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잘 다룬 영화를 보지 못했다. 소피아 코폴라가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도 시각은 아주 훌륭했다. 어린 시절 타국으로 시집 온 소녀가 정쟁 속에서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치에 탐닉하는 영화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내면을 접근하는 시도가 좋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한계점이 보이는 영화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전달하는 방식이 소녀적이었다. 그저 쇼핑에 중독된 앙투아네트를 묘사했다. 이 영화만 보면 감독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하는 게 마땅하게 그려졌다.

 

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을 다루려는 시도는 많이 있어왔지만 역사와 개인을 섞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이 영화도 한 개인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한테 책을 읽어 주는 하인, 시도니 라보르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신선한 설정인데 원작 소설이 있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7월 14일부터 단 4일 간에 시도니가 보는 베르사이유 궁의 모습이 담긴다. 시도니가 바라보는 궁의 혼돈과 변덕스런 그러나 자신한테 친절한 앙투아네트 왕비. 시도니는 친절한 왕비한테 존경과 헌신을 넘어서는 애정을 갖게 된다.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분량상 어떤 부분만을 확대 해석하고 다른 섬세한, 그러나 꼭 필요한 부분이 빠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보다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애정, 그리고 앙투아네트가 플라냐크 공작부인한테 보이는 사랑이라는 사랑의 삼각형을 축으로 한다. 입체적이지 못하고 좀 평면적이라 사랑의 삼각형이 가져 오는 밀당의 기쁨이나 슬픔이 잘 표현되지 못했다. 원작에는 없는 폴리냐크 공작부인과 앙투아네트의 애정관계를 부각시켰단다.

 

쓰다보니 계속 안 좋은 부분만 쓰게 된다. 엔딩 시퀀스에서 폴리냐크 부인을 살리기 위해 시도니한테 폴리냐크로 변장하라고 여왕은 명령한다. 주종관계에서 불복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여왕에 대한 무한 사랑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시도니의 미묘한 심리가 좀 거칠게 다뤄졌다. 감독이 여자라면 어땠을까, 좀 더 섬세하게 다루지 않았을까. 소피아 코폴라를 보면 성별이 문제인 거 같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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