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여행을 다녀오면 허무의 쓰나미가 찾아온다. 허무를 떨치려고 여행 사진도 뒤적이고 여행기도 적어 보고 지명이 들어간 책도 찾아본다. 허무의 쓰나미가 밀려왔을 무렵 읽었던 책이다. 첫 부분에 익숙한 지명이 한가득 등장해서 과거 속으로 광속으로 달려 가고 있던 내 기억을 잠시 늦추게 하면서 잠깐 머물렀던 도시에 대해 놓쳤던 여러 가지를 떠올리곤 했다. 독서의 주목적이 위안인데 참 위안이 되었던 책이다.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라틴어로 세계란 뜻, 문두스mundus란 별명을 가진 고문헌학자 그레고리우스다. 그의 세계는 책이었다.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도 서점에만 들리는 사람. 책 속에 있는 삶을 진짜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낯선 포르투갈 여인을 잠깐 만나고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을 산다. 지은이 아메데우 드 프라두라의 흔적을 좇아 수 십 년간 일했던 학교를 떠나 리스본으로 향한다. 왜 리스본인가. 리스본이란 지명 자체가 갖는 아우라가 있다. 닿기 힘든 이국적인 느낌이다. 칸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보냈던 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갑자기 발을 쑥 집어 넣는 이유가 이렇게 묘사된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는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65쪽)

 

시계추처럼 정확했던 그레고리우스가 더 이상 시계추가 아닌 삶을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문헌학자답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프라두가 쓴 글을 읽으며 프라두가 글을 쓰게 되는 배경을 추적해간다. 프라두란 인물이 가족, 학교, 사회적으로 겪는 상대적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라두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신을 강요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의사란 직업을 통해 존경을 받고 어린 시절 혐오했던 권위자가 되려는 찰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독재정권 시절,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는 독재자 앞잡이를 살리고 직업 윤리와 일반적 정의 개념 사이에 혼란을 겪는다. 의사로서 악인을 살렸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를 살려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동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프라두의 견고했던 신념은 모래 가루로 흘러내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책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명확했는데 책 밖으로 걸어나와서는 쓰고 있던 안경마저도 불안하고 안 보이는 경험을 한다. 살아있는 그레고리우스가 이미 죽은 프라두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은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서 세상은 책처럼 혹은 자신이 알고 경험했던 범위에서 해석이 가능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책을 덮고 프라두가 왜 글을 썼는지 주변을 추적하면서 "침묵하고 있는 경험에 색채를 입히고 멜로디를 적는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따라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경험과 비일상적인 면을 소환해서 지금 걸어가는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그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빈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이 주는 커다란 위안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 어거스트
    from free-floating ennui 2014-06-11 22:39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가 개봉하면 안 보는 편이다. 책의 밀도를 두 시간 짜리 영화가 담아내는데는 데 무리가 있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이 궁금했다. 소설이란 틀만 빌린 철학서 같기에 어떻게 이미지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과 리스본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이미지를 기웃거릴 수 있을 거란 호기심이 만나 극장을 찾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소설은 추리극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